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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

[스크랩] 누가 주의 종인가/김홍전 목사

 

성경: 딤후2:1-26절

제목: 누가 주의 종인가?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서 특별히 사도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영하고 받들어 섬겨 나가는 자기의 일에서 큰 부분을 잇는 후계자가 된 디모데를 부를 때 ‘과연 이런 것이야말로 아들이다’ 하는 의미로 ‘내 아들아’ 하고 부른 것을 보았고(1절),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일을 맡은 일꾼이 이렇게 일해 나가는 것이다’ 하고 가르치면서 그 일꾼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비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꾼의 특성들을 여러 모양으로 비유해서 대략 여섯 가지로 나타냈던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입니다(3절).

“그리스도의 일꾼인 너 디모데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인내와 봉사를 해야겠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에게는 그러한 특성이 있어서 그와 같이 잘 감내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할 때에 성경을 보면 각각 그 사람의 자격에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입은 자는 개인이 되었든지 교회가 되었든지 하나님의 그런 여러 가지 요구를 이룰 의무가 있고 그 의무에는 그에 따라는 성격들이 붙여 있습니다.

 

지도자인 바울이 디모데 개인에게 그런 특성들을 찾을 때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 말로 표현해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면 그리스도는 너를 군사로 뽑고 지휘하고 명령하시는 분이니까 군인답게 그 명령을 복종하고 어려운 일도 참고 견뎌라’ 하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군인은 평안한 데서 지내라고 뽑혀 나온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쟁터에서 고난을 견디고 승리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노력해 나가는 데 그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면 네 생활이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하는가 하면 너를 군사로 뽑은 그분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군사로 뽑힌 자로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서 고난 개의치 말고 견디어 가자는 말씀을 간직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서 우리 앞에 있는 적을 분명히 잘 식별하고 또한 신령한 무장을 하고 주께서 주신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를 가지고 나가서 적을 무찌르고 하는 이 큰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할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십니다. 꼭 디모데만이 군사인 것이 아니라 디모데 같이 일을 맡은 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령하고 거대한 역사를 자기가 담당하고 나아가는 길에서 부딪치는 적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 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대로 이 세상의 혈육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입니다(엡6:12참조).

 

그러므로 군사 된 자는 이런 적과 더불어 싸우기 위해서 신령한 무장을 늘 해야 하는 까닭에 진실 혹은 참됨이라는 것으로 허리띠를 띠어서 먼저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꽉 붙들어 매고, 그 다음에는 의라는 흉배를 붙이고, 또 화평한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또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그 다음에는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엡6:14-17참조).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는 본질상 이 세상과 더불어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늘 전투해 나갈 때 자체가 교회인 것을 비로소 정당하게 드러내는 까닭에 ‘전투의 교회’라는 속성을 언제든지 중요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전투의 교회의 목회자요 지도자답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확호한 전투의 행동을 늘 취해 나가는 것이고,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전투 때문에 필연적으로 받는 고난을 그대로 견디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군사다 되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첫째는 군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는 5절에 나오는 “경기하는 자”입니다.

가령 무슨 운동회든지 경주가 있으면 어떤 일정한 법이 있어서 그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법 하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확호하게 세워 놓은 법칙에 의해서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그 법칙을 무시해 버리고 제멋대로 그냥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태도는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기가 일정한 트랙에서 일정한 시간에 다 같은 규율과 법칙 하에서 움직입니다. 경기 장소처럼 법칙이 일호도 틀림없이 준수되어야 할 자리가 없습니다. 만일 경기장에서 법칙을 무시한다면 경기의 정신이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그만큼 경기장은 법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선수들이 한 줄로 죽 서 있을 때 신호를 ‘땅’ 쏘면 그 쏘는 신호 소리에 따라 모두 다 같이 뛰기 시작해야지 신호를 하려고 피스톨을 들 때 한 사람은 먼저 뛰고 어떤 사람은 ‘땅’ 소리 난 다음에 뛰고 어떤 사람은 멀거니 있다가 그 다음에 뛰고 그래도 괜찮다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안 됩니다. 적어도 ‘땅’ 소리 난 다음에 각각 자기가 책임지고 뛰어야 합니다. 뛸 때는 또 자기의 트랙 위를 가야지 가다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앞지를 듯 하니까 앞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그 트랙으로 픽 들어가서 슬쩍 다리를 걸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그냥 달린다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경기장에는 까다로운 많은 법칙이 없을지라도 명확한 법칙이 서 있어서 그 중의 하나라도 유린해 버리면 전체가 통제가 안 되고 모두가 그 일에 대해 승인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맡은 사람은 마치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주하는 자라고 한 것은 많은 적수들이 있다든지 같이 뛰는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것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경주장에서 경주하는 때처럼 명확하게 법칙을 지켜야 할 때가 없지 않느냐, 법대로 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법칙대로 해야만 면류관을 얻는 것이지 법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쓰든지 속임수를 써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고 노름이나 도박에 불과한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경주의 법칙을 준수해서 스포츠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목적지에 제일 먼저 도달한다는 것이 항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전제로는 법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 한다는 데 첫째의 의미가 있고, 둘째는 물론 그렇게 법칙을 준수하고 최선을 다 한 결과로 우열이 드러날 때 우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여기에 같이 써 놓았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하고 5절에 썼는데,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고 법대로 경기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맡아서 가는 길을 여기서 이러한 비유로써 가르치는데, 우리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저기에 도달해라’ 하면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목적지에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바르게 순리대로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을 어기더라도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그만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일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이 내신 방법대로 정한 목적지에 도달하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이신 목적지에 도달해야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 없이 중도이폐한다면 물론 법칙은 다 준수했더라도 역불급이라 힘이 모자라서 끝까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정한 소기의 결과를 내지 못하고 가령 어느 기간 안에 어디까지 도달 해야겠다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게으르고 느려 빠져서 결국은 도달했다고 하지만 그 안에 여러 번 나태가 있고 잘못이 있고 좌절이 있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우승을 하는 경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맡은 자들에게 요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충성해야 하느냐 하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첫째는 일을 맡기시는 것이고 그래서 일단 일을 맡았으면 둘째는 그 일에 충성해야 할 것이고, 그 때의 충성은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법칙대로 성의를 다해서 해 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6절에 {농부}라는 말을 썼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은 농부가 수고한 결과를 얻지만 농부야말로 자기가 수고해서 직접 거둔 사람이니까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의 수고의 결과인 좋은 열매를 먹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사짓는 모든 것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다 같다는 이야기가 아닌 줄을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을 표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의 논리는 ‘농부가 수고하면 그 결과가 날 것이 아니냐? 곡식을 거두었는데 그 거둔 곡식을 자기는 차례가 돌아오면 그때야 조금 먹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농사 짓는 수고를 했으니까 최후에 자기가 먼저 맛봄으로써 결산이나 결론에 이를 때까지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것도 표시하고 또한 자기가 심어 놓은 원인과 가꾸어 나간 이 과정이 이런 결과를 냈으므로 자기가 친히 맛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법칙인 것을 여기서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로는 15절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겠다. 그러한 데서 너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늘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성경이 크게 두 가지의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궁구해 나가도록 보이십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셔서 재창조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어떻게 함양되고 장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주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품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의 품성 형성에 있음 가르칩니다. 즉 그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을 증오하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하고, 또 항상 비감과 절망과 슬픔 가운데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고, 마음에 항상 불안과 응애를 들끓는 것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안위가 늘 고요히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행하면 의로운 행동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늘 보유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라는 말을 볼 때에도 성령의 열매의 여러 가지 면으로서 인내, 자지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이 다 품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고 그리스도의 지체다운 열매를 표시하는 것인데(갈5:22-23참조), 이러한 품성을 함양하고 가지고 있어서 발휘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늘 요구하시는 것이고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방법으로 그런 것을 우리가 얻을 수 잇느냐 하는 문제가 거기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성경이 크게 두 가지의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궁구해 나가도록 보이셨는데 또 하나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우리가 크게 현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일면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일생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사명을 받아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심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명을 받아 가느냐 하는 문제뿐 아니라 그 사명을 받았으면 그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하며 어떻게 봉사해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사명을 맡은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써서 그 비유의 어떤 특성을 가지고 그가 일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나 자격들을 이야기해 나가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좋은 군사가 된다든지 법대로 경기하는 자든지 수고하는 농부하든지 하는 것들이 다 그런 사명을 밭은 종들에게 적용되는 법칙들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다른 데 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도 아니고 혹은 기도하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대로하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이처럼 명백하게 이 면 저 면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이렇게 해야겠다. 해라’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꾸 자기가 알고자 하는 일면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정당합니다.

 

디모데후서 2:15절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부끄러울 일이 없이 아주 훌륭하고 선량하고 무고한 좋은 일꾼으로 인정을 받은 자답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늘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군사, 경기자, 농부, 일꾼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에는 다섯 번째로 나오는 것이 {그릇}입니다. 20절에 이하에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여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마지막에 24절에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주의 종이라는 말에 대해 그릇되게 쓰는 경우를 보십시오.

1. 주의 종이라는 말에 대해 그릇되게 쓰는 경우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 의식은 어떠한 깨달음 가운데에서 명확하게 파악되느냐 하면 일찍이 죄의 종이 되었던 자리에서 구원과 구속함을 받았고 주께서 자유를 주셨다는 이 속죄의 사실에 대한 생생한 각성과 체험에 있는 것이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진리의 말씀, 영생하시는 말씀이 계시는 주님께 늘 복종하지 아니하고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요6:68) 하고서 주님께 늘 속하여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주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사실인가를 거기서 깊이 깨닫는 것이지 그냥 ‘주의 종, 주의 종’ 해서 무슨 종교의 직분을 하나 맡은 것으로써 금방 종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대단히 형식적인 이야기이고 또 기계적인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서 신학 공부를 하고 그 결과 얻은 신학교의 졸업장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신학교 졸업했으니까 목사 안수 받는다’ 해서 목사가 되고 또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며 찾아서 시골이 되었든지 혹은 도시가 되었든지 어디에 있는 교회를 하나 맡아서 가면 거기에서 자기는 주의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주의 종이라고 한다’ 하는 이런 아주 거칠고 그릇된 통념은 옳지 않습니다. 주의 종은 상전이신 주님께서 종으로 임명해서 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는 주의 종이다’고 자기가 제 마음대로 자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택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종으로 쓰려고 하니 너는 나와서 세상에서 다른 공부를 해서 달리 나가서 사업을 하려고 하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교회를 돌아보는 여러 가지의 지식을 잘 배워 훈련을 해서 적당한 시기에 내가 너를 내보낼 때 나가서 종노릇을 해라] 하고 그렇게 부르셔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찍이 부르신 일도 없고 그런 아무 소명도 없이 신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있습니다. ‘소명감이 잇느냐’고 물어보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소명감인 줄 아느냐’ 하면 ‘아’ 이것을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저것을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저리로 가려고 해도 안 되고 이 학교에 가 보려고 해도 안 되고 다 문이 닫혀서 할 수 없이 신학이라도 하려고 신학교에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제일 못난 사람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덤빈단 말입니까? 주님은 그렇게도 사람이 없어서 반드시 제일 못나고 학교도 다 떨어지고 그래서 이리 저리로 눈을 돌려도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데려다가 종으로 만드셔야 한단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주님의 종노릇을 하냐 하면 자기가 주님의 종노릇을 해서 신실하게 섬길 각성이 있으면 아주 큰 데 가서 이 세상 사회나 국가나 국민의 종노릇, 즉 공복노릇을 해도 잘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람의 공복 노릇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의 능력을 갖다 바치고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될 만한 그런 기우와 능력과 재능과 소질이 다 있어도 ‘그것 말고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나가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귀하게 잡아다 쓰시는 것이고, 혹은 큰 사회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이끌고 나갈 만한 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바쳐서 저는 이 일을 하겠습니다’ 해야 ‘그러냐 값있는 귀한 것을 네가 나한테 내놓고 네 마음대로 네 소원대로 성공을 해 보겠다고 다른 데 쓰려고 하지 않으니 과연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살려는 줄을 내가 알았다. 그러면 내가 그것을 그대로 쓰마’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역사상의 위대한 주님의 종들이 세상에서 다른 것을 했다면 아주 못나게 되었을 뻔 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것을 했더라도 위대하게 했을 사람들인데 다른 것을 안 하고 그 일을 버리고 주님의 일을 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적어도 기독교의 역사는 그렇게 찬란한데 이상한 기풍이 이 나라, 이 땅에 들어와서 한국에 있는 기독교에서는 제일 못나서 다른 것을 하도 안 되니까 어찌 할 수 없이 나중에는 신학교라도 가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이런 그릇된 생각이 지배합니다. 그리고는 자칭 종이라고 하고 돌아다니면서 사방에 분란을 일으키고, 주님의 나라를 선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 그 나라를 은폐하고 그 영광을 실추시킵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못나고 잘못하고 시시하고 저렇게 상식도 없는 짓을 하는 것이냐’ 고 할 만큼 사회 도덕상 또 기독교로서 가져야 할 상식조차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릇된 생각과 그릇된 칭호부터 다 지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 죄의 종과 의의 종

주의 종은 반드시 종교의 직을 가졌으니까 주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이라고 할 때의 전제는 과거에 무엇인가 그릇된 것에 종이 되어 살다가 그것을 깨닫고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이제는 자기의 전 지체를 하나님 앞에 드려서 의의 종이 되는 그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으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19-22) 하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것이 주의 종입니다. 첫째는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사람이 거기에서 해방되지 않았느냐. 죄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과거에 네 지체를 불의에 드렸던 것과 꼭 같이 이제는 의에 드려라. 그래야 종이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특별히 로마서 6장을 읽고 있습니다. 16절부터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6-18절)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가 결국 나쁘든지 좋든지 하는 것이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것은 없는 것이다. 명확하게 판단할 때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든지 그렇지 않고 거기서 해방되었으면 순종의 종의 되어서 의에 이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원래 너희는 죄의 종이었다. 그렇지만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그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먼저 이것은 위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에게 종이 되는 위치에다 갖다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했느냐 하면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이 되고 의에게는 종이 된 사람이라고 하지만 너희 육신이 연약해서 네 육신 생활을 보면 네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위치에 부합한 생활을 못하고 연약해서 도로 죄에게 가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을 많이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것을 일러주마’ 하고 그 다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에게 있는 여러 가지 예가 있는데 그대로 내가 일러준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19절) 죄의 종노릇하던 그 시대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 부정한 생각이나 하고 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아니한 불법의 생각이 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붙이고 또 여러 가지로 오해를 하고 망상을 해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과 불법에 지체를 드렸습니다.

 

지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 몸뚱이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모든 심리 활동에 따라 자연히 활동해야 할 육신의 모든 활동을 거기에 드렸던 것입니다. ‘너라는 한 지체를, 몸뚱이를, 너라는 한 인간 전체를, 개체를 항상 네 자신의 망상과 욕망과 부정한 것에 드렸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깨끗지 못하고 옳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에 맞지 않는 것들이지만 네가 거기에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이 된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3. 의의 종이 되려면

그러면 의의 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너희를 이미 죄에게서 해방해 주셔서 다시는 너희를 죄인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의의 종이라는 그 높은 위치에다 너희를 놓아주었다. 그렇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너희가 육신이 연약해서 자꾸 또 여전히 옛날식으로 부정한 생각이나 불법이나 욕망이나 탐욕이나 그런 것을 좇아서 그것을 자꾸 해 보겠다고 하고 그런 망상 가운데 젖어 있다. 이제는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마치 전에 너희 지체를 불법에 드려서 불법과 불의의 결과에 이른 것과 꼭 같은 양식으로 이제는 너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는 말은 ‘선’에다 너희 지체를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말을 안 쓰고 ‘의’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완전한 선인이 절대로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눅18:19)고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그러나 훌륭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언제든지 ‘의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이 특별히 히브리적 개념이고 또 구약에서 늘 그런 식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의롭다고, 즉 정당하다고 너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의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바 ‘이것이 바른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하는 것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네게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싫고 손해날 것 같고 남이 비웃을 것 같을지라도 상관할 것 없이 네 지체와 마음을 그쪽으로 기울이고 ‘예 하겠습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겠습니다’ 했으면 그 다음에 ‘아 참. 그래도 창피하고 싫은데 ---’ 하지 말고 네 발을 그리로 움직이고 네 손을 그쪽으로 향하고 네 몸뚱이를 그리로 향해서 나가라는 것입니다.

 

지체가 그렇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는 구별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성별된 위치에 이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죄의 종, 의의 종 혹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거기에 썼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20절). 이 말은 하나님의 의사가 네게 있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 나는 상관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고 했다는 말입니다.

 

4. 죄의 열매와 의의 열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21절). 이 말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바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그것은 내게 상관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하련다’ 해서 네가 자유를 누린 것 같지만 무슨 결과를 얻은 줄 아느냐? 네가 가진 그 어리석은 자유가 어떠한 결과를 네게 갖다 주었느냐? 그 마지막은 사망, 죽음인 것이다 하고 가르칩니다.

 

이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가르치는 사망,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아무 것도 없이 영원한 저주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저주와 서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21-22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해방되었다’는 말은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권세가 다시 지배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역사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죄가 사실상 실권을 가지고 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네가 자원해서 네 탐욕과 죄의 정욕에 네 몸뚱이를 맡기니까 죄가 자꾸 너를 지배하지 네가 그것을 거부해 봐라. 그러면 죄가 너를 지배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알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네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길이 없이 죄가 와서 너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죄에게서 너를 해방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속죄의 공효가 이미 네게 작용하여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노예 시장에서 나를 사 내왔다는 사실이 역사적인 사실로 현실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22절). 그것은 ‘이제 너는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 너를 인쳐 놓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으로서야 할 사람인 네가 하나님의 종다운 생각과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좇아가야 할 지체의 방향을 다른 데로 바꾸어 네 자신의 탐욕과 정욕과 부정과 불법을 따라다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여러분이 그전에 배운 것같이 7장에서는 율법에 대해서 자유를 얻은 이야기와 또한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면서도 죄에 질질 끌려가는 사실을 다시 묘사하고 왜 이러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 나갑니다. 이것은 다 우리들이 생활 가운데 얼마든지 경험하는 사실들이고, 그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위대하게 효과 있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이런 위치에 있어야 비로소 “주의 종이라는 사실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제 마음대로 결정해 가지고 기독교에서 무슨 월급 받는 직분을 하는 것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떠드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먼저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의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노릇을 못하는 사람이 주의 종노릇은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밤낮 죄의 종노릇만 하고 하나님의 종노릇은 하루도, 한 나절도 반듯하게 못하면서 주의 종이라고 누각 뽐냅니까?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주의 종임.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쓴 사도 바울 선생의 개념이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종이라고 할 때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이나 의의 종이라는 말의 중심에 있는 죄의 권세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특수하고 적극적인 일을 위해서 그를 쓰시는 그 시간부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런 특별한 의미에서 디모데나 바울 선생은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부르신 것은 주님께서 그 나라를 적극적으로 신장해 나가시는 일을 위해 뽑아서 그 일만을 전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만 주의 종인 것은 아닙니다. 주의 종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신장해 나가는 데 각각 자기의 사명감을 명확하게 가지고 자기 은사의 부분에서 충실히 일하는 모든 사람이 주의 종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종교 직분자만이 주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디모데 선생 같은 이를 특수한 의미에서 주의 종이라고 할 때 그들은 생활의 전체를, 자기의 생계 문제까지라도 다 주님과 직접 관계하고 주님의 나라를 신장하는 일에서 해결해 나갔다고 하는 의미가 있지만 바울 선생은 언제나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처음에 하나님 나라의 형태를 신약의 교회라는 형태로 세워 나갈 때에는 아직 제도가 확립되지 아니한 까닭에 확립된 제도 하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그 일들, 구약에서 이미 다 가르친 그 일을 제대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전도를 할 때 뒤에 안디옥 교회가 있다고 하지만 안디옥에서 수 천리 멀리 떠나서 나중에 헬라 땅으로, 그리스로 다니면서 전도할 때는 안디옥에서 그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여수 하게 자꾸 뒤에서 보급하고 수급해 나갈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가 바울 선생이나 바나바 선생을 내보낼 때에는 자기네가 내보내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졌습니다. 아무 책임 없이 덮어놓고 내보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단 거기를 떠나서 활동할 때 그 시대에는 바울 선생과 그 모교회의 연락이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쉽습니다. 미국 사람이 여기와도 미국과 연락이 금방 되어서 돈이 금방 오고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도저히 그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바울 선생은 그런 시대적인 곤란에 비추어 효과 있게 일하기 위해서 자기가 옛날에 배웠던 그 직, 장막을 짓는 일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만을 항상 하면서 그것으로 전부 자변을 했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바울 선생을 우리가 다 보면 자기와 자기 일행이 쓸 것을 자기 손으로 벌어서 자변을 했으니까 ‘내가 어떤 교회에 네가 돈을 내라. 하나님 앞에 너도 마땅히 바쳐라 하는 말을 할 때에는 떳떳하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그 도리를 모르니까 내가 그것을 가르쳐야겠다’ 하고 저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또 저들이 은혜를 받은 사람다운 사실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마땅히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헌금을 해야 할 것을 잘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여비에 직접 보태 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처음 선 초생 교회가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 것이지 그 원칙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후대에 오는 모든 원칙은 반드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10).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전9:9-10)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셔서 어떤 사회에 들어가서 그 일을 하면, 즉 곡식을 밟는 일을 직접 하면 자기가 밟는 곡식을 저부터 먼저 먹어야 할 것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가 곡식을 밟아서 자꾸 떨면 그 떨어 놓은 곡식을 제가 우선적으로 먹어야지 소는 일체로 먹어서는 안 되고 곡식만 애써서 밟아 주고 먹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 먹어야 한단 말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거기서 나오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결과에 대해서, 그런 축복에 대해서 먼저 거두어 갖는 것이 당연하다’ 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친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것은 바울 선생 자신도 나중에는 많이 자신에게 적용한 원칙으로 압니다. 어떠한 사람이 훌륭한 신앙이 있어서 그 일을 하기를 자원할 때는 바울 선생이 거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빌립보 성에 처음 들어가 전도했을 때에 하나님이 자주 장사하는 어떤 부인의 마음 문을 여셔서 처음에는 주의해서 듣게 하시고 즐겁게 그것을 받아서 주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루디아가 그렇게 주를 믿는 사람이 된 다음부터는 바울 선생이 다른 데 가서 유하면서 혼자 두류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주를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거든 나도 주 믿는 사람답게 봉사를 할 테니 우리 집에 와서 거하십시오’ 하고 그와 그 식구가 다 세례를 받고 그 집에 거하도록 강권해서 있게 했습니다(행16:11-15). 그만큼 루디아는 ‘나도 하나님 나라 일에 힘써서 내 몫을 하겠다’ 고한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많은 신학자들이 후대에 볼 때 그가 복음을 받는 과정이 아주 훌륭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복음을 제대로 받는 아주 전형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이란 그렇게 받는 것이 전형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물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밤낮 남의 집의 궤짝이라도 고쳐 주어 가면서 전도해 가면서 먹고사신 것은 아닙니다. 30세까지는 나사렛에 있으면서 목수 노릇을 해서 생계를 돕고 집안을 도왔지만 일단 집을 나온 다음에는 당시의 이스라엘 랍비들이나 또 그런 훌륭한 선생들이 하는 방식을 좇아서 그 주위에 있는 제자들이나 제자로 자처하고 사숙하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공궤하는 것을 가지고 지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이 멀리 유대 땅으로 가셨을 때는 갈릴리의 성도인 부인들이 거기까지 따라가서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주님과 그 제자들을 늘 공궤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그런 부인들의 이름을 쭉 썼습니다(눅8:2-3참조).

 

물론 어떤 하나를 가지고 이것이 모델이다. 저것이 모델이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칙은 성경에서 늘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그가 그 일로 생계를 해결한다는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생계를 해결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신 것을 천직으로 알고, 즉 그 나라에서 주님이 요구하신 중요한 부분인 줄 알고 충실하게 그것을 감당해 나가면 그가 주의 종인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만을 주의 종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교 역사상에서 기독교의 바른 발전을 위해서 충실하게 봉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여러 가지 일을 충실하게 하는 데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을 짓는 데에 늘 주력하면 그 사람을 가리켜 ‘너는 음악가지 주의 종은 아니다’ 하는 말을 하지 않고 훌륭한 주의 종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 어디서든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주의 종이라는 말을 다 쓰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로 주의 나라의 신장을 위해서 열심히 나가서 봉사를 했다면 주의 종인 것이지 돈 안 받고 나가서 자선 사업만 해야 주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선 사업을 백 번해도 주의 종이 아닌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믿고 섬기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나라의 신장에 바른 일을 해 나갈 때는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돈 벌어서 먹고살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 살더라도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의 거룩하신 목적과 주의 경륜의 전진을 위해서 주님께서 불러서 시키시는 일을 자기가 확신하고 그렇게 밀고 나가면 주의 종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다 주의 종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그렇게 ‘주의 종이면 이렇게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6. 주의 종은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의 부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 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과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7.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8.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나 은사를 정당하게 선용할 수 있어야.

 

9.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서 평가받을 때 인정받을만한 흔적을 남겨야

 

10. 하나님의 진리를 옳게 분변하여 자기를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서 드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출처: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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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아침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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