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대하24장1-27절
제목: 구약의 사가들이 보인 참된 개혁
역대하 24장은 요아스의 행적에 관한 기록입니다. 요아스는 다윗계 제9대 왕으로 아하사야의 혈육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습니다. 그는 7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섭정 가운데 성전을 회복하는 등 개혁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죽음과 함께 종교 개혁의 열정은 시들었고 뒤이어 그는 곧 악의 길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요아스에게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그는 스가랴 선지자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결국 요아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심복들의 모반으로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아스의 역사를 기록한 사가의 기록 방식을 또한 중요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기나 열왕기를 쓴 사가들이 역사의 기록 방식으로 독특하게 가지고 있던 관점은 이 세상의 일반 사가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가들은 국가의 흥망의 문제나 여러 가지 제도의 쇄신이나 기구의 정비, 그렇지 않으면 독특한 산업 정책 등에 대해서 별로 크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논할 때는 정치를 잘하고 경제적인 발전이 은성(殷盛)하고 문화가 아주 무성하게 창달되어 나가는 면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나 사무엘서나 열왕기와 같은 구약의 이른바 느비임 곧 선지서라고 하는 부분과 느비임 속에 있는 것은 아니올시다만 우리가 통틀어 사기(史記)라고 하는 역사의 기록을 놓고서 그 역사의 기록 방법이나 내용을 볼 때에 특별히 느끼는 점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사기 내용에는 이 세상 사가들이 보는 어떤 국가의 중요한 발전의 요소나 또 그 국가가 가지고 있던 독특한 문제들을 별로 크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가가 기록한 그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도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의 문제를 중요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사가들은 항상 그들이 기록하는 나라의 통치자와 백성이 여호와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부국(富國)하느냐 어떻게 강병(强兵)하느냐 하는 것을 열심히 논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나라도 그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한다든지 아니면 그러한 점을 중요한 크라이테리아로 해서 국정을 비판한다든지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나라도 한 왕국으로서 다른 나라에 지지 않게 건실하게 자라야 할 것입니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기(國基)를 견고히 다져서 번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밤낮 외세의 침공을 받아 허덕허덕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올시다.
유형 교회의 중요한 임무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의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세우시고 보존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보존하심에 대해서 그 백성들은 먼저 제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하게 하고 번영시킬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주신 역사적인 사명을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명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갖는 독특한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보옥처럼 하나님의 것이 되고 만인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이 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낼 때 그 전문(前文)에 벌써 크게 천명된 사실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땅 위 역사에서 이루어 나가시는 나라,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그 나라의 영광을 어떻게 바르게 비추어 나가야 하겠느냐 하는 이것을 백성들은 생각하고 거기에 합당한 지도를 받아서 나가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유다 나라는 어떻게 하면 부자 나라가 되고 어떻게 하면 은금이 많게 되고 어떻게 하면 먹을 것이 풍성해질까 하는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불쌍한 상태의 노예였지만 하나님께서 건져 내사 민족으로 형성하시고 오늘날 그들을 왕국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공고한 국가로서 열강들 틈에서 그렇게 국가로서 유지하며 살게 하신 뜻은 자신들의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나라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국민은 항상 목표를 먼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실질과 그 성격을 어떻게 하면 국가 생활과 국민 생활 속에서 잘 나타낼 수 있겠느냐 하는 데 두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가 목표하는 바였습니다. 그런고로 사가들은 늘 그와 같은 목표를 향해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의 사가들이 이스라엘 나라와 그 백성을 다룰 때에는 항상 구약의 교회로서 다루었지 세상에 있는 다른 왕국의 하나와 같이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국가와 교회가 따로따로 존재할 때 중요한 것은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땅 위에 바로 증시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바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국가의 경제 문제와 정치 문제에 관여하여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느냐 하는 것이 본분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보호하시사 일을 할 수 있게 힘을 주셨다면 거기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거룩한 한 사회로서 마땅히 드러낼 바를 드러내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유형 교회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사가들도 이야기를 할 때 항상 강조하기를 ‘너희에게는 원래부터 하나님이 내리시고 요구하신 사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사명에 대한 각성이 없이 부자 나라가 되어 잘 살겠다고 떠들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나라들은 부국강병 즉 국가의 번영과 창달이 중요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어떻게 증시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그 나라의 영광과 능력과 그리고 그 목표와 성격들이 어떻게 잘 드러나느냐 하는 것이 앞서는 문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가들은 개혁이라는 것을 논할 때도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기본으로 해서 늘 평가하였습니다. 유다 나라 역사를 통해 볼 때 다윗 왕을 제외한 다른 왕들 가운데, 예컨대 제5대 아사나 제6대 여호사밧, 그리고 더 내려가서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왕들이 다 경건하고 훌륭했던 통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왕들이라고 하지만 사가들의 평가는 그들이 정치를 얼마나 잘했다 하는 얘기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백성을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하게 하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평가의 척도였습니다. 그것이 그 나라 백성들에게 주신 바 거룩한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왕기나 역대기를 읽으면서 거기서 중요한 사실들은 찾고자 할 때 이러한 사가들의 안목을 염두에 두고 찾아야 합니다.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얼마나 훌륭한 모사(謀事)로써 국가의 부국강병과 문화 발전을 도모하였는지를 찾는다면 그런 시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구약의 사가들은 철저히 믿기를 ‘이 나라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시고 하나님이 형성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지하실 것이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야 하겠다. 사명을 깨달은 백성이 되어야 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강조한 사실은 ‘늘 너희끼리 모여서 사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서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이 교회다 하고 어떤 종교적인 제도와 기구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무엇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흑암의 권세에서 불러냈다. 이 세상 흑암의 세력에서 너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 데에는 크신 목적이 있다. 목적 없이 너희를 구원하셨겠느냐’ 그것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친히 너희의 하나님이 되사 다스리시고 같이 계신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막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큰 상징이었습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성소였고 지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궤였지만 그보다 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거한다는 증거로서 있던 영광의 구름이었습니다. 이 쉐키나 구름이 떠서 진행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자 하신다’고 하여 다 성막을 싸 가지고 각각 그 임무를 맡은 대로 지고 또 자기네 텐트를 다 말아서 대열을 정비하여 따라갔습니다. 그것이 진행하다 어디에서 가라앉으면 거기에 다시 성막을 세우고 그 주위 사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캠프를 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거하신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심히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의미를 잘 알고 그것이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렇게나 되어도 같이 계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여러 번 여러 번 징계를 하고 깨닫게 해주셔도 알지 못했을 때 그 영광의 구름은 어디론지 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 이후로는 법궤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알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늘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거리에서 늘 교통하고 경배하고 또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나가서 그들이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인간관계에서 무엇인지를 증명하고 살아갈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의 기구로서의 국가 사회는 어떻게든 되는 것입니다. 누가 국가를 형성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어떤 제도 가운데서 국가는 형성된다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 사회의 성격이 열악하지 않고 고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좋으려면 각 사람이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을 주장하고 누르고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의와 평강과 기쁨의 나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요아스와 여호야다가 열심으로 개혁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목표 지점에 이르지는 못했으므로 요아스 말년에 가서는 그냥 일조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야다의 이해로는 아마 성전 예배 제도를 잘 정비하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면 된다 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그 선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은 미급한 개혁이었기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출처: 지명교회까페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씨뿌리는 비유(1)/김홍전 목사 (0) | 2014.07.25 |
---|---|
[스크랩] 그 나라의 열매/김홍전 목사 (0) | 2014.07.17 |
[스크랩] 토기장이와 그 손에 있는 진흙/김홍전 목사 (0) | 2014.07.17 |
[스크랩] 지역 주민을 위한 사랑의 빵 나눔 행사 (0) | 2014.07.09 |
[스크랩] 시편 121편 예화/ 김재윤목사 (0) | 2014.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