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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좋은 씨와 가라지/김홍전 목사

 

 

성경: 마13:24-30절(36-43)

 

제목: 좋은 씨와 가라지

 

 

 

오늘은 마태복음 13: 24에서 부터, 오늘 아침에 읽은 밭의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와, 그 해석에 있는바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코져 합니다. 그 비유가 24절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30절까지 있는데, 천국의 오의라, 혹은 천국의 비밀이라 하는것을 주께서 말씀하실때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여러분 13장 11절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이렇게 제자들이 “어찌해서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물으니까 대답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천국의 비밀인데, 이 천국의 비밀을 너희들은 알도록 허락 됐지만은, 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것으로써 이 비유 가운데에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것이 올시다. 천국의 비밀의 또 하나가 13장에 기록된 제 둘째의 비유 [가라지와 좋은씨]의 비유인 것을 여러분 다 아십니다. 또 우리는 과거에 다 배운것이고 이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올시다마는, 여기서 항상 우리가 그저 온고지신을 한다는 것뿐 아니라, 생각해야 할것들을 더 심각하게 깊이 세분해서 생각해 나가는 것이 좋은 것임으로 또한 몇가지를 여기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의 내용 얘기로서의 그 정경을 우리가 항상 잘 파악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가기의 밭에 갖다 뿌렸다.” 그랬어요.그랬는데 사람들이 다 잘때, 즉 조용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때에, 그리고 이것 “잔다”는 것은 특별히 태만하다든지, 게으른것을 특별히 표시하는것 보다, 사람의 세계에는 낮이 있고 밤이 있어서, 밤에 사람들은 잔다..., 그런 자는사이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는데 싹이 난 다음에 결실에 가까운즉, 결실할때가 되니까 가라지가 막연히 그 가라지인것을 보였다. 그러니까 그 집주인, --- 먼저 좋은 씨를 뿌린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인보고 하는 말이 “ 아, 주인님 밭에 심은 것이 좋은씨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가라지가 어디서 나온것입니까?”그렇게 말하니까 주인이 “음! 그게 원수가 이렇게 했구나” 그 종들이 “아, 그럼 주인님, 저희들이 가서 가라지를 다 뽑을까요?”하니까 “아니, 가만 두어라 왜 가만 두는고 하니 가라지를 뽑다가 좋은 곡식이나 둘다 - 추수할때 까지 가만 두었다가, 그때까지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때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가지고 불사르도록 하고 곡식은 모아서 내 곡간에 넣어 두어라. 그렇게 말하여 이것이 비유에요. 그 비유의 정경은 그런데 이 비유의 성경에 대해서 우리 주께서 모든 사람,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베푸셨지만은., 나중에 집에 들어 가서 조용히 제자들과 앉았을때 제자들이 (제자들만이) “ 주님, 밭에 그 가라지 비유를 하셨는데, 그 비유의 뜻이 무엇이지요?” 하고 물었어요. 하니까 “그러면 그 비유의 뜻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뿌렀다. 그러면 거기에 뿌리는 이가 있고, 좋은 씨가 있지 않으냐? 그러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누구냐 하면 그건 인자다” 이건 예수님을 지칭한 것이에요. 아무나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식으로, 씨뿌리는 비유에서나오는, 그 뿌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좋은 씨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다. “인자가 좋은 씨를 뿌렸다.” 하는데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인자로써 땅에와서 확실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씨를 뿌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올시다. 그 다음에는 어디다가 뿌리느냐 하면 어떤 지방에 있는 어떤 교회라든지, 세상에 있는 교회안에 다 뿌렸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밭은 이세상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이세상”이라고 가르쳤어요. “밭은 세상이고...” 그러면 그 뿌린 좋은 씨는 무엇이냐 하면은 좋은 씨라는 것은 천국의 아들들이라 천국의 자녀들이라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이라는 밭에 천국의 자녀들을 뿌려서 자라게 했다 하는 것으로 첫째 비유를 해석하시고, 그 비유의 첫째 씬은 그렇고, 그 다음의 문제는 그러면 원수가 사람들이 잘때 와서 가라지를 거기에다가 덧뿌리고 갔는데, 그러면 그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누구냐 하면 그건 누구나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한 인물, 마귀다고 가르쳤어요.

 

이 해석 가운데 예수님이 마귀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의 크신 경영과 사업을 적극적으로, 구체적으로 반대해서 행동하는 가를 가르치시는 것이 올시다. 마귀가 악의 한 원칙이라든지, 악의 한 세력이라든지, 이런 추상적으로 해석을 하시지 않고, 분명히 인격적인 행동을 한다. 마치 내가 세상에 천국의 아들들을 뿌려 놓은것 같이, 마귀도 이 세상에다가 - 천국의 아들들을 뿌려놓은 그 밭에다가 - 자기의 자식들을 뿌려 놓은것이다. 그러면 물론 그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이요. 여러분이 악한 자라는 것은 호 포네로스 언제든지 마귀를 특별히 가르칠때 쓰는 말이지요.(고로 가라지는) 세상의 나쁜 사람들이란 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다 하는 것이 올시다. 그 다음에는 이제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뽑으리이까?”하는 문제도 있지만은 결국은 “가만히 둘다 자라게 두어라, 추수때까지 자라게 두어라” 거기에 시간적으로 이 마귀가 그 자식들을 뿌려 놓은것을 용인하고 두어두는 시간이 있어서, 그건 한정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그대로 이상태대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할때, 그러면 소위 그 마지막의 시간 터미너스애드 퀨이라는 최후에 끝나버리는 그것이 있는데, 그건 언제냐 할때, 그것은 세상 끝이다. 추수때, 추수때까지는 자라게 두어둔다. 추수때는 세상끝이다. 그때는 추수군들은 보내서,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불사르기 위해서 단으로 묶는다 그랬는데, 그 가라지를 거두는 사람들은 누구냐? 주인의 종들이냐? 그건 주인의 그 종들은 아니고 추수군들은 천사다. 하나님의 특별한 영광으로써 입하심을 받은 그들이, 초연한 영광으로써 입히심을 받은 그들이, 초연한 힘을 가진 그들이 나가서 추수를 할것이다. 세상끝에 종말에 일어날 사실이다. 그런즉 그런 추수군들인 천사들이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른것 처럼 세상 끝에도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면, 천사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낸다 그랬어요. 가라지의 성격, 가라지의 하는 일, 이걸 여기 가르친 것이요. 그 나라에서 즉 인자의 나라에서 - 저 하늘에 있는 나라 얘기가 아니고 땅위에 건설된 그 나라에서 -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걸려서 자빠지게 하다는 말이에요. 누가 넘어지느냐하면 그 나라의 자녀들이 부주의 하든지, 알지 못해서 그 덫에 치어서 넘어지고 자빠지게 하는 덫을 놓고, 그 물을 처 놓는 이런자들이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불법이라고 할때는 법이 앞서 있는 것이요.. 법없이 불법이라는 말은 성립 안해요. 물론 종합적인 말로 볼때는 “죄는 무엇이냐?”할때 “죄는 곧 불법이니라”고 요한 1서 3장에 말씀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추상적으로 그냥 죄라 하는것 보다도, 그나라에 법칙이 있어서 엄연히 준행하고 준수되어야 할 것을, 그걸 다 위반하고 그걸 범해 나가서 파괴하고 나가는 자들이 있다. 그런것들이 곧 가라지, 즉 그 악한자 “호포네로스”의 자녀들이다. 그들을 다 그때는 거두어 낼것이다. 그래가지고“풀무불에 먼저 넣으리니” - 이건 상징적인 용어가 아니고 풀무불이라는 말로 표현한 무서운 불을 가르치는 것이에요.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불도 꺼지지 아니하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그곳에다(막9:48)집어 넣으면 거기서는 고통과 슬픔과 말할수 없는 처참한 상태에서 늘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반해서 인자의 자녀들, 즉“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13:43) 천국의 자녀들은 자기네가 부르는 하나님 하나님의 그 나라에서, 이제는 내부와 외부에 거칠것이 없이 충만한 영광에 차 있는 까닭에, 그 빛나는 것이 해 같이 밝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것이 천국의 비밀의 하나다. 이 비밀가운데에, 세상의 역사의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어떤 특성을 보이신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수 있고, - 동시에 그것은 역사의 과정에 나타난 특성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말할때에 말세론적 종말론적인 사실을 또하나 강하게 가르치시는 것이요. “세상 끝이다”하는 말을 쓰셔서, “추수때”하는 말을 쓰셨어요. 그리고 종말론의 중요한 성격은 그냥시간적으로만 끝이 아니라 그 종말에 발생하는 초 자연적인 심판의 상태 천사가 나타나고 그래서 그 나라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나 모든 걸치고 넘어질 것을 두어둔자들을 거두어 낸다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정화의 작용과 심판의 크신 사역을, 그런고로 이건 초 자연적인 사실이요. 천사들이 나와서 하늘의 하늘의 예지와 분별력을 가지고, 하늘의 그 엄숙한 명령하에서 위대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고 거룩한 힘을 받아서 그힘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 말씀이요. 그런고로 역사는 - 여기서 보는 얘기는 역사라는것은 - 한개의 어떤 얼른 보면 이원적인 현실과 같이 진행하는데, 그게 그렇게 해서 끝 없이 가는것 아니다 그거요. 여기서 한개의 사관으로써 분명히 가져야 할 것은 역사는 종국이 있는 것이지 무제한 하게 역사는 자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무제한 하게 사계적인 한복을 진행을 거듭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사관 가운데 옛날 헬라 사람들의 역사관을 그전에 들어서 아시지요? 역사라는 것은 항상반복하는 것이다. 자체를 반복하는 것이다. 유명한 소위 사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로도투스, 그이가 그걸 주장을 할뿐아니라 헬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관찰이라는 것은 항상 늘 있는 일은 이 다음날에 또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해서 빙빙 윤회하는 것으로 늘 보았다 말이요. 이건 헬라 사람들의 아주 고전적인 사관이었어요. 헬라 사람들의 사관이란 말은 요컨대찬란한 헬레니즘이 가지고 있는 역사 철학이라 그 말씀이요. 그러나 두드러진 사실 하나를 볼것 같으면은, 현대의 슈펭글라 같은 사람의 “서양의 몰락”이라 하는데서 뵈는 그런 큰 사관의 하나는 식물적인, 사계에 적응한 발생의 반복이다. 봄이되면 봄에 적응한 식물이 나고 여름은 여름에 적응한 꽃들이 나고, 가을은 가을에 적응한 꽃과 나무가., 또 거기서 자기의 아름다운것을 경쟁을 하고, 겨울은 겨울에 적응한 것들이 있다. 이런 까닭에 봄이라는 역사기에 있어서는 봄에 나는 꽃과 풀이 다 나는 것이고, 이 봄이라는 역사의 시기가 지나면, 그 다음에는 봄에 나는 풀과 꽃을 가진 나라는 문화를 찬란하게 발휘할수가 없고, 문화의 권은 자연히 이동해서 여름이면 여름에 적응한 꽃과풀을 가진 나라가 번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은 그 시기가 지난 까닭에 몰락하는 것이고, 문화는 이동해 간다. 이래서 서양의 몰락이라는 사상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각각 식물원과 같이 사계에 나는 여러 화초들을 놓고, 봄이 되면 이것이 찬란하게 총생하고, 여름이 되면 이것이 아주 찬란하게 총립해서 총생을 해 가지고, 가을이되면 이것이, 여러분! 가을에는 국화 전시회 같은것 보지요? 그러니까 이런것이..., 겨울이 되면 또 특별히 이것이..., 이런것으로 써 역사는 그런것이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또 생각한다 말이요.

 

성경은 그렇게 안 가르쳤어요. 우리 주님도 명백하게 역사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 근대에 와서는 토인비 같은 사람들이 사관이 있어 가지고서, 그는 역사가 - 중요히 문화의 발전이라는 것이, 그 배경에는 무슨 요소보다도 종교의 요소라는 것이 가장 강한 것이다. 예언자의 요소가 강하다 하는 것을 얘기 했어요. 그러나 역사가 종교의 요소 때문에 종교의 변천(혹은 발전)과 더불어 진행하는 까닭에, 역사가 가령 어떤 시간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내재한 종교 요소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이 사관들을 다 일일이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처음 부터 보이는 역사관이 무엇이라고 전에도 말씀드렸어요? 히브리 사람들은 처음 부터 그렇게 알고 그렇게 배우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요. 그건 무어냐 하면“역사는 직선으로 전부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계시의 발전과 더불어 명백하게 우리에게 더욱 가르쳐 주는 것은 다만 진행 할뿐 아니라, 역사는 끝나는 날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끝은 초 자연적인 하나님의 위광 - 권위의 영광 - 이 나타남으로써 모든 불순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정화의 위대한 사실로 말미암아 끝난다. 이것은 대 심판이니라 그거요, 이런것을 이런 간단한 비유 가운데서도 명백하게 보이시는 것이요.

 

그런데 단순히 종말론적인 사실과, 즉 종말의 초자연적인 심판의 사실만을 보이신것이 아니라. 심판하기 이전에 심판 받아야할 사실들을 땅위에서 어떻게 진행하고 나가는 가를 보이신 것이요. 땅에 좋은씨를 심었으나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하는것은 인자가 - 즉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려 오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나라의 큰 원칙과 능력과 구조를, 구상을 땅위에다가 확연히 충만한 계시로 보이실 그분이라 그 말이요. 그래서 인자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특별히 썼어요. - 이건 예수그리스도의 그 비류없는 인격을 표시하는데에도 중요한 말이 되어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이, 그가 가지고 있는 인격은 로고스의 인격, 그것을 가지고 나타나시지만은 (사람이라는 인격은 아니에요) 그것은 주의해야 해요.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인격을 표시하는 말은 아니에요. 사람의 본성 이것만을 표시하는 말이요. 이걸 사람의 인격을 표시하는 말로 해석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요. 주의해야 하는 것이요. 말을 함부로 그냥 쑥쑥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리하는 것을 과거에 들었는데, 명확하게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인격을 가지셨는가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드님이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드님이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나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냈다는 것 뿐이요. 그런고로 존재하신 예수님은 땅위에 계셔서도 그의 인격은 하나의 위대하고 하나의 완전한 인간 인격을 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즉 제 2위되신 하나님으로써의 인격적 존재, 다른 말로 말하면 로고스로서 존재하신 그분, 그건 인격자로 존재하셨는데 그인격은 변함없이, 그냥 가지고 나오시고, 그냥 나타내시는 거시요. 그런데 “인자”라고 할때는 (그것이) 무엇을 표시할때는 그 휴먼네이쳐라는 인간 본질을 취하신 것을 거기 표시하려는 거요. 그는 완전히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히 사람이신 그 분이다 그거요. 그래서 사람으로써 결여됨이 없이 완전성을 지니셨고, 또 사람의 모든 연약함을 다 같이 지고 그가 인간성을 취하실때에도 하늘에서 인간성을 별달리 준비했다가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고, 성모 마리아에게서 인간성을 취하사 가지고 나오신 것이다... 여러분은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도 명백히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할때 성모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그 인간 본질을 취하여 나오신 분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땅에 나오신 그 분은 자기를 스스로 바에노시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것은 인자라... 그러나 주의 할것은 인자라고 부르신 그 말씀에서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신 신성과 권위가, 행할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때때로 나오는데 여기도 보면 그 나라에서 그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름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는데, 그 보낼 사람, 보내는 사람들 보냄을 입는 사람은 천사들이요. 천사를 누가 보내느냐 하면 사람으로 나타난 인자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보낸다고 가르쳤어요.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를 보내리니”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계속해서 “인자가 천사를 보낸다. ” 천사 보내는 인자는 어떤분이요? 천사의 장이, 천사의 주가 되시는 분이요. 우리를 보낼때는 우리의 주가 되시겠지만은, 그러나 천사를 보낼때는 천사를 마음대로 보내시는 대권자인것을 표시하는 거요. 즉 하늘의 대권을 쥔 분인 것이요. 인자가 보낸다. 인자라는 성호를 가지고 명칭을 가지고 천사를 보내는 얘기를 하는 것은 인자라는 말이 단순히 인간성 만을 표시하는 얘기가 아닌것을 이런데에서도 가르치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 천사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 인자가 이땅에 오셔서, 즉 사람으로써 무엇을 세우시느냐 하면 땅에다가 거룩한 나라의 충만한 계시의 사실을 확연히 심어 주시는 것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그 거룩한 나라의 충만한 계시의 사실이라는 말은 왜 이렇게 말을 하느냐 하면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없었다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땅에 세웠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말이요.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라 할때는 어폐가 있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께서는 물론 항상 유지하시고 통제해 나가시는것이지만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땅위에 오신 이후에만 하나님의 나라가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로고스로 이미 하늘에 계실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으로서는 즉 이것은 나중에 인자로써 그 수난이후에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다.”(마28:18)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삼위의 일위되시는 하나님으로, 즉 삼위의 한위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내리셨다 그말이요. 그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것이요. 그것은 언제부터(든지) 있는 것이요. 이런 점에 있어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나 성신님되시는 하나님과 꼭 같은 권위와 영광과 능력을 가지시고 언제부터 - 태초에서부터 - 늘 그렇게 활동하시는 것이요. 그런고로 이런 말들을 우리가 항상, 아주 세밀하게 주의해서 생각해 가면서 이 얘기를 들으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는 말은 주신 권위인거요. 그런고로 그 이전에는 없었다는 얘기요. 이 말과 로고스로써 가지고 있는 원상의 본상의 권위와는 의미가 다른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삼위의 한 위로써의 모든 권위를 가지신 그 분은 또한 하나님의 크신 경륜하에서 땅에 그 나라를 세우셨고 그 나라를 지탱하게 하시되 그가 중보자로서의 거룩한 왕권행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실제의 세계에서 이미 벌써 발휘되고 있었다하는 것은,. 마치 그가 제사장르로서의 속죄의 사실은 이미 효과를 발생해서 십자가에 달리 신다는 역사 사실이 있기 이전에 아담에서 부터 속죄를 해 주신 것이요. 그건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있어서는 역사의 어느 경점에서 비로소 말효하느냐 하는 법적인 - 세상 사람의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재의 세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요. 즉 하나님께는 영원이라 하는 말이 있어요. 영원이란 말은 시간이 없다 그 얘기요. 시간적으로 따질수 없다 그 밀씀이요.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시간을 합친다고 해도 결국 시간이 존재하는 의미인데“ 모든 시간이 합친다” 우리가 표현할 길은 다른 수가 없어요. 시간위의 시간, 세월위의 세월이라는 이런 말로 표현하는 거요. 우리는 시간이라는 이 카데고리 이런 범주하에서 늘 생각을 해야 하는 까닭에, 우리의 생각은 그것으로써 할수 밖에 없지 마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이란 말은, 결국 시간이 라는 것을 초월하신 위치에 있는 분이다. 그러기 까닭에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는, 어떤 시간적인 범주안에서 발생하는 사실이고,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실은 시간의 범주하에서 발생하는 사실이지만은 십자가의 효과와 십자가의 사실 자체는 실재의 세계에 The world of reality,이 reality의 세계에 - 벌써 존재하는 것이다 말이에요. 그러기 까닭에 아담이나 노아나 혹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전부가 다 이미 그 십자가의 공효로써 구원받은 것이지 이 공효없이 그 사람들은 별다른 조건하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요. 이런 사실을 생각할때 그의 왕권의 행사가, 중보자로써의 그의 모든 직무의 행사가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 말이요. 다만 그때는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성육신의 사실이 있기 저이에요. 성육신으로써 분명히 땅에 거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여러 가지 모를 역사와 더불어 차츰 차츰 풍부하게 하시다가. 땅에 오셔서(계시의) 충만한 역사를 나타내신 이후는, 하나님의 나라의 충만한 도리가 예수님 오신 이후에 확연히 들어난 것이올시다. 이것을 신약시대에 이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영광의 자태가 어디서 늘 나타나고 있느냐 하면은 신약의 교회 안에서 늘 나타나고 있는 것이요. 구약의 교회라 할때에는 신약의 교회와 같이 확연히 독립된 힌 실체로써 존재한 것보다 민족생활 가운데 국가라는 형태안에서 존재하는 것이요. 그런고로 국가이자 그건 교회요. 그리고 교회라는 것이 전권적으로 교회만이 권위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국권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요. 이것이 이스라엘 에게 있어서의 교회 형태이지만 신약에 와서는 교회는 국가라는 형태를 빌리지도 않고 의존하지 아니하고 교회 독자의 권위를 권위와 능력을 늘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요. 이런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늘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올시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영광과 계시를 싣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 나타나시는 그때 - 그때 인자가 땅에다가 천국의 아들들을 심어 놓은 것인데 그때 - 어떠한 한 개의 사실이 엄연히 역사의 조류에 있느냐 하면, 마귀는 마귀대로 자기의 씨를 심어서 그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천국의 아들들이 나와서 천국의 형태를 이루고 천국의 역사를 지어나가는 사실에, 악한자의 아들들이 와서 덧 놓여 가지고 같이 뿌리에서 자라나는것 같이 보이게 하고 같은 양분을 뻘아 먹어 가면서 같이 진행한다 그것이 올시다. 그자리는 하늘이 아니고 땅이다. 세상이다 그 말이요. 교회라는 말을 쓰시지 않은 것은 특별히 교회적인 의미 보다도 즉 신국적인 의미를 가지는 까닭에 신국으로서의 의미를 해석하려니까 교회라는 말은 쓰지 않은 것이 올시다. 왜냐하면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꼭 동일한 것은 아니에요.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있어서는 구별이 있어야 할것인데.아까 말씀드린 것은 신약의 교회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구현됐다는 것 뿐이지, 신약의 교회는 곧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아니에요.(신약의 ) 교회라 할때는 그 특성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지체인것이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다는 것은, 로고스 이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머리로 삼은 지체란 말이 아니다. 그말이요. 이것도 주의해야 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았을때 에는 성육신 하시사.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분을 머리로 삼은 그 지체라 그 말이지 하나님의 제이로써 영원전 부터 계시는 그 인격을 머리로 삼은 지체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건(신약의) 교회라는 말뜻이고 만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는 백성과 왕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왕은 예수그리스도요. 중보자로써의 왕권을 행사 할때 그 왕권의 행사의 대상으로서의 백인인 것이요.

 

그런데 이와 같은 것들이 시작을 할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크신 경륜안에는 마귀가 자기의 자녀를 같은 이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진행하는 그 속에 다가 같이 뿌려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모르게 만드는 일이 많이 있다 그말이요. 이것이 가라지냐, 이것이 알곡이냐, 모르게 처음에는 해 놨다 말씀이요. 그러나 이것이 결실을 할때쯤 되어서 싹이 나가지고 열매를 맺어야겠다고 차츰차츰 열매의 싹을 보이기 시작할때 부터 - 여기 결실이라는 것은 열매가 맺힌 후에라는 의미는 아니 올시다. 결실할때 쯤, 즉 결실이란 열매를 맺어갈때 쯤 꽃피어 가지고서 꽃잎이 떨어지면 거기 조그마한 봉우리가 생겨서 열매를 보는데 이 열매를 맺어 갈때쯤 보니까 - 분명히 가라지가 보였다 그 말씀이요. 그때는 주인의 종들이 가령 그 종들이 세상 사람들이라도 크리소스톰 같은 사람말을 빌리면 많은 하나님의 종들 사자들 땅에 있는 교사들이란 말씀이에요. 또 사람들이 잘때에 와서 뿌렸다 하니까 그 교사들이 다 자고 취하고, 딴것에 정신팔려서 잘 돌아보지 못하고 태만했을 동안에 와서 후다닥 뿌리고 갔다 하는 식으로 이 크리소스톰의 해석이 있는 데 그건 그렇게 생각할 것은 없어요. 잘때라는 것은 특별히 그들이 태만 했다든지 정신놓고 있었다든지 하는 말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사람은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는 까닭에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있지 않으냐? 즉 사람이 미치지 못하고 불가항력적 사실도 많이 있는 것이다. 그거요. 그런새 좌우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때 뿌렸다.. 그러니까 언제 뿌렸는지 너희들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나 눈치채지 못한 동안에 이것을 뿌린것이다. 그거요. 이렇게 해서 잘때 거기다가 뿌리고 갔는데 이렇게 역사 위에는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요소만이 순결하게 늘 발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허다한 많은 가라지의 요소가 그 세력을 얻고 독을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거요. 그리고 이 종들이 “뽑으리이까” 할때에 “뽑지말라”고 한것은 주님이 그 거룩하신 경륜과 역사진행의 큰 법칙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얘기 올시다. 역사진행의 법칙 가운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고만 삭제 하고 깨끗이 숙청해서 신국은 완전히 순결하게 이 세상에서 구별된 위치로 별다른 콜로니 식민지를 만들려고 존재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땅위에 세상속에 같이 섞여 사는 것이다. 그 말이요. 땅위에 같이 섞여 살면서 거기에 가라진지 알곡인지 모르는 이런 알쏭달쏭한 여러가지 요소가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다. 여러분! 이건 이 세상에 있는 교회를 바라볼때 가령 하나님의 나라의 큰 계획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형태라는 점에서 교회를 바라볼때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가“저것이? 하나님 나라가 저런 모양이라면, 큰 문제다!”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만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가 알수 있지 않아요?! 그러면 떼어 놓고 한 교회를 볼지라도 그런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완전히 순결하게만 나가지 못하는 것이요. 물론 어거스티누스 시대에는 굉장히 이문제 가지고, 큰 -( 도나도쓰파요)큰 논쟁이 생겼고 시끄럽게 됐던것을 여러분 아시지요? 그래서 이단을 토벌을 하는데 땅에 있는 종들이라고 하는 교육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교사들이 땅에 이단자들을 완전히 숙청하기 위해서 카토릭은 나중에 이단자 숙청을 적극적으로 진율해 가지고 그만 알곡을 갖다가서 나무에다가 비뜨러 매 놓고 불지른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것은 안된다 그 말씀이요. 어거스틴은 물론 그런것을 맹열히 반대했어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그러나 카토릭은 그 후의 정책은 어거스틴을 그렇게 존중하면서도, 어거스틴적인 사상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것을 여러분 잘 아시지요. 단순히 그런식으로만 볼것이 아니고, 문제는 땅위에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요소의 진행에는, 항상 이 가라지적인 요소라는 것이 함께 뒤섞여 가지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말 까지 인자가 그 초연하신 능력과 거룩한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서 완전히 심판해 버리기까지는 끝없이 이땅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새에도 발생하고,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인 사실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 얘기 하는 것이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특별히 특정적으로 생각해 나갈것은 이 배교의 현실이라는 문제요. 배교의 현실이라는것... 마귀가 적극적으로 작용하면서 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거요. 여기 “뿌리고 갔더니” 하는 말이 여기 있어요. “곧 그 원수가 와서 곡식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25절끝에) “덧 뿌렸더니”가 아니고 “덧뿌리고 갔더니”이 말은 원문대로 그것 하나가 특색있는 말로써 쓴 것이다 말이에요. 그냥 우리말과 같이 “뿌리고 갔다”하고서는 붙어 다니는 말이 아니라 “뿌렸다” 했으면 그만인데 원수가 와서 “덧뿌렸더니”하지 않고 “뿌렸다. 그리고 그는 갔더니”하는 말이에요. 간 후에사 발견한다 그 말이에요. 간후에 발견하는 것은 마귀가 여러가지로 공작해 놓은 일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반듯이 아는것은 아니다. 그말이에요. 당시에 알지 못하고 특별히 역사의 공작은 그의 거대한 공작이라는 것은 - 처음에는 다 같이 좋은 알곡인줄 알고 받아 들이기가 쉬운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실할때쯤 - 그 자체의 열매가 무엇인것을 표시하기 시작할때쯤 되면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말이요. 그래서 이역사의 진행가운데 이배교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배교하는 사실의 확연한 성격을 가지고 시작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요. 이것이 한개의 비밀이니라. 다같이 정통이고, 다 같이 잘 믿는줄아는데, 차츰차츰 지내가 가지고, 독소가 나타날때 비로소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래서 독소가 나타난 다음에는 그걸 뽑아 버린다고 해도 뽑아 지지 않는 것이다. 뽑을 수가 없게 하나님은 법칙을 세웠다. 안뽑도록 해 논것이다. 아무도 가서 함부로 뽑지 말아라. 왜냐하면 알곡을 뽑기 쉬운것이다. 과연 카토릭은 많은 알곡을 뽑아서 죽였다 말씀이요. 그러면 교회안에서 가령 이단 사설이라는 것을 일체로 숙청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뜻은 하나도 없어요. 이것은 할수 없는 것이다. 이건 세상에서 그렇다 그 말이요.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확연하게 정확하게 구별할수 없다는 그런 얘기는 아니에요. 이것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구별 얘기가 아니에요. 가라지와 알곡이지, 잡초와 알곡을 구별 못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것이 믿는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명확하게 그릇된 것을 가지고 있는지 어쩐지는 그 독소가 환연히 한 열매로써 형체를 취해서 나타내 뵈기 까지는 알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속에서 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사람이 그런것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숙청하려면 어떻게 숙청하느냐 그것이요. 만일 교회안에서 그런것이 드러날때는 성경 다른 여러군데 얘기는 그것은 교회에서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이요. 교회는 항상 거룩한 한도리안에 서야지 각각 별다른 도리를 거기다가 함께 포함해서는 아니된다 그말이요. 그러나 이 문제를 그렇게 해석하지를 아니하고 이건 주께서 결국은 숙청할수 없다하니 숙청하는것은 월권이다. 하는것을 가르친 것이다고 묘하게 붙여가지고 교회가 순수한 신학과 신앙으로 가지않고 잡다한 이론을 교회가 베풀고 야단 냈어도 받아들이는 일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현저하게 발생한 것이요. 그것이 19세기 일이 아니 올시다. 19세기에는 여러가지 것을 떠들어낸 이상한 학설들이 많이 떠 돌아 다녔어요. 18세기 19세기로 소위 성경 해석에서 고등비평의 큰 운동 문서 비평, 문서 운동의 큰 여러가지 그릇된 사실들이 많이 나왔지만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세계에 가장 세력있고 전통있다는 교회들이 그릇된 것을 내부에다가 함께 포함했어요. 주장은 정통이요. 그러나 내부에 그릇된것을 포함 했어요. 작은 씨를 갖다가 집어 넣었어요. 이 천국의 비밀을 얘기할때에 나중에는 누룩이라는 말을 쓰실때도 있는데,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푸르게 한다” (고전 5:6, 갈 5:9) 그러나 이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누룩에 대한 비유는 반드시 나쁜것을 의미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천국의 성장의 상태, 상오를 가르치려고 하신것이지... 그런데 그걸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 올시다 만은, 요컨대 문제는 다른곳에서 “바리새 교인의 누룩을, 서기관의 누룩을 삼가라”(마 16:6,12)하는 말을 하신 일이 있어요. 이와 같이 거기에 그릇된 것을 포함해 나가더니, 어떻게 된줄 아시지요? 여러분 ! 과거에 그렇게 찬란하게 정통을 자랑하고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자랑하던 교회가, 그래서 세계 사위에 그 많은 영향을 끼쳤던 교회들이 하나가 아니고 큰 교단들이 전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칠수 있던 교단들이 다 넘어갔다 말씀이에요. 넘어가 가지고 그속에는 오히려 가라지적인 주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말씀이에요. 적어도 지도자들과 그 치리회는, 행정회의는 가라지의 주장이 압도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심지어 기독론의 문제까지라도 오늘날은 위험하게 다 되어 간것이요. 이런것이 배교의 현실이 올시다. 즉 처음에는 사람이 그속에서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한다고 해서 부주의 했을때, 그리고 오히려 어느만큼 용허 했을때, 한 동안은 공존했으니까 괜찮았던 것이요. 너는 주장을 그렇게 하고 너는 주장을 이렇게 해도 괜찮다. 그대로 지내가자, 서로지낸다. 어떤 설이든지 취해 가는 것이요. 그리고 그 기본의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성경이 완전히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하는데도 크게 관계 됐던 것이요. 그건 우리 나라에도 과거에 있던 문제 올시다만은 그 성경이 순수하게 완전히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더러에 시대적인 여러 표현을 취한것이 있다든지,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호소하기위한 변법을 취한 것이 있다할때,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한 교회안에 있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이 한 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어요. 이렇게해서 여러가지 [가라지, 알곡]이 뒤섞여 있는데 그 걸 교회의 치리회로서는 그냥 다 용인하고 그냥 그대로 괜찮은 상태로 승인하고 지나 갔어요. 그런결과 그것이 지금도 언제든지 같은 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안그렇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 탄생할 이유가 없다”는 세력이 강한 것이요. 압도적으로 강해요 다만 대안이 없어서 다른것 믿자니 별로 믿을만한 이론도 없고, 또 말지도 못하니까 전통적으로 배웠던 그건 믿겠다 하는것은 벌써 지금소위 기성세대의 얘기고 지금 자라나는 새 세대는 압도적으로 새로운 학설 - 예수님이 동정녀에게 탄생했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 역사적인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그걸 역사 사실과 같이 해석을 하면은 종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 다 그거요. 이런데로 그러니까 이게 한 개의 예 올시다. 그러면 이건 기독론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으면 교만 아니냐? 일단 그렇게 변호해 가면서 이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거이요.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이 세계의 큰 영향있는 교회들에, 배교의 현실이라는 것이 이러한 데에도 그 확실한 증상을 들어낼 것이다. .. 이런것들을 우리가 여기서 볼수 있읍니다. 이 비유 가운데서 우리가 봐야할 여러가지 사실들이 있읍니다만 오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할 것은 배교의 현실이라는 것은 처음에 시작할때에 알기 어려운 것이고, 또 알았다고 하드라도 상제하기 어려운 한 역사의 겨대한 불가항력적 사실과 같이 대두하고 말고 나가는 현실이니라 이것이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언제든지 그대로 가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너희 힘이 하지 못하나 내가 마지막에 한다” 주께서 천사를 보내서 마지막에 한다... 다같이 기도하시지요.

 

 

( 기 도 )

 

거룩하신 주님, 이땅에는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마귀의 그 해악과 궤계가 마침내 그 자식들을 주님의 나라 경영의 큰 사실가운데 들여 보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얼마동안 다자라게 두었지만 그걸 알았을 때에도 우리가 그걸 완전히 땅위에서 소멸시키지 못하는 역사 현실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또한 그것이 시비하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의 한 부분으로써, 주께서 친히 종말에 하실것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셨고 그러나 이런 사실을 경고하시고 알게 하심은 항상 주의해서 교회의 가지고 있는 순수성과 거룩한 구별된 성격을 어찌하든지 힘껏 바로 유지하고 살아가야 할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저희가 이제 생각했아옵니다.주여 저희 교회가 항상 순결하게 서게 하시고 혼탁한 것이 스며 들지 못하게 하시며 저희가 어리석고 깨닫지 못해서 때를 따라서 그런것이 침입하려고 할지라도, 주님은 막아주시고 저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며, 또한 항상 저희가 태만함이 없이 아버님의 거룩하신 교훈과 있기를 원하시는 거룩한 위치를 확연하게 늘 파악하고 거기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리하여 저희 교회의 진행이 스스로의 순결만을 유지하는것이 아니라. 이 혼탁한 배교의 도도한 탁류 속에서 능력있는 교회로 그 거룩한 빛을 발휘할수 있게 주여! 저희에게 힘주시고 저희를 들어서 쓰시옵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우리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였아옵니다.

 

아 멘

 

출처: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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