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제5강 성신의 유기적 역사
본문: 행전 10:1-8
우리 안에 거하시며 가르치심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은 우리의 생활에서 현실적인 중요한 문제로서 진실하게 주를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깊이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문제이다. 특별히 성신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보존하시고 가르쳐 주시며 인도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찬송과 감사 등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심정을 일으켜 주신다. 이것은 성신님의 특별한 은혜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의 시기에 우리가 갖는 한 특권이다. 이러한 특권을 바르게 생각하고 행해야지 그릇되게 생각해서 함부로 다루면 하나님 앞에 큰 책망과 괴로움을 받을 수가 있다.
성신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먼저 가르치신다는 문제에 대하여 주의해서 생각해 보겠다. 이것이 오묘한 도리이므로 한 가지씩 들어서 설명해 나갈 때 전체를 종합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우므로 우리가 비교적 알기 쉬운 방법으로 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다. 우선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사 가르친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신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고 할 때에는 직접적이고 여러 현상이 있는데 주로 성신님께서 유기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 특징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이다. 성신님 따로 계시고 내가 따로 있어서 내 의지는 성신의 의지와 달리 움직여 나가는데 성신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보이시고 "네 마음대로 가겠느냐, 나를 좇아오겠느냐?" 하는 이런 상태에서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신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생각과 판단, 의지의 발동, 행보 전체를 나 스스로 한 것 같을지라도 사실은 성신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힘 주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나오게 되는 이런 형태가 성신님의 인도를 받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이렇게 두 개의 인격이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고, 인격자이신 성신님의 거룩하신 인격적인 발휘, 즉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하고자 하시는 이런 모든 인격적인 활동이 내 것이 되어서 내가 생각하고 활동하고 행하는 이런 것이 유기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신 받았다고 갑자기 어떤 입신 상태에 들어가서 자기의 의식을 상당히 제한받고 별다른 인격의 의식이 내 위에 군림하여 나를 끌고 나간다든지 나에게 명령한다든지 하는 상태는 유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는 거룩하신 경륜의 정책 즉 사역의 계획이 있으셔서 어느 시대를 통해서든지 꼭 한 가지 양식으로만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과 계약을 하시사 그 계약에 따라서 혹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상태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따라서 즉 계시의 단계에 따라서 일을 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약과 계약에 의한 거룩하신 은혜의 여러 가지 방도를 오해하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세분해서 "이 세대에는 이런 조건하에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저 세대에서는 저런 조건하에서 구원받는다" 하는 이런 배제 혹은 행정을 말하던 주의가 19세기 중엽 중국에서 팽배하게 일어났다. 이것이 미국을 거쳐서 마침 한국에 선교사들이 초기에 선교를 하려고 들어올 때에 그러한 새로운 주장을 마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빛나는 교리인 양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전파되었다. 한국 교회 초대의 저명한 목사님들에게도 그 세대주의의 영향이 참 강렬하게 나타나서 그분들의 가르침에 그것이 많이 있었고 한국에 있는 수많은 성경 학교에서 쓰는 공부지(잡지)도 보면 이런 이론 일색이었다. 그런 역사적인 원인하에서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그릇된 일들이 빚어지는 것을 볼 때 항상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계시의 단계에 대해서 하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크신 계약하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이 반드시 일양이 아니라는 말과, 말하자면 에덴의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 정부 시대 혹은 아브라함의 허락 시대, 모세 시대 혹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혹은 교회 시대, 그리고 천년 왕국 시대로 제 마음대로 나누는 것과는 전연 딴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사실 당신이 계약을 하셔야 할 필요가 없는 주권자이지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사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서 "너 이렇게 하라,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하마" 하고 계약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가장 이지적으로 나타내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조건을 내시고 "네가 이렇게 하면 거기에 상당한 보응이 있을 것이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계약이 되었다. 마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헌법을 세우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한 세대의 큰 계약을 가리켜 옛 계약이라고 했는데 계시의 발전에 따라서 그 계약이 갱신되어서 새로운 많은 은혜의 조건이 나타난 까닭에 이 새로운 계약하에서 볼 때에 그전 것은 옛날의 계약이라고 한 것이다. 이 옛날의 계약을 주로 다른 책이 구약이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을 주로 다룬 것이 신약이다.
이러한 구 배제(여러가지 약제를 배합함) , 옛날의 오이코노미아 아래에서 성신님께서 역사하시는 양식과 신약에 와서 역사하시는 양식이 꼭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 계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하시고 승천하셨는데 그 약속하신 것이 바로 오순절에 성신께서 역사하신 충만한 역사이다. 이에 비해 구 배제에서 성신님의 역사는 여러 가지 양식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삼손은 아주 비상한 물리력을 가지고(삿 14:6) 개인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군대 노릇을 했다. 필요할 때에는 성신님께서 그렇게도 역사하지만 언제든지 그와 똑같이 역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가령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그에게 성신이 갑자기 임하시니까 혼자서 예언을 하고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삼상 11:6-7). 그런데 신약 시대에 성신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그러한 독특한 현상과 같지 않으므로 성신님의 충만한 역사 혹은 내주와 가르침과 인도하심의 역사를 구약에서 받은 인상에 적용시켜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성신을 받았다'는 말을 쓰면서 삼손이 성신 받아서 어떻게 되었고 사울이 성신 받음으로 어떻게 되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유기적 역사와 유기적 영감
우리가 성신님의 역사를 생각할 때에는 항상 유기적인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신의 역사는 성신께서 다른 인격으로 와서 나를 제한하고 입신한 상태에서 나를 좌지우지하고 나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신께서 내 생각을 바르게 하고 내 심정, 내 마음먹는 것을 바르게 하고 내 행보를 바르게 잡아 주시는 것이 성신의 역사이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풍부한 영감과 성신님의 특별하신 감동과 주장하에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그런 양식을 쓰신 것이지 입신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는데 서취(받아쓰기)를 시킨 것이 아니다. 물론 신비하게 직접 임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모세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가락으로 쓰신"(출 31:18) 돌판이라는 말로 표현한 계명을 받았을 때 그것은 모세 자신의 두뇌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밖의 모세의 많은 글들은 모세의 생활과 환경의 결과이다. 즉 자신이 궁구하고 살피고 연구한 결과인 것이다. 이사야도 그렇게 예레미야도 그렇고 다니엘도 다 그렇다. 성신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갑자기 불러내어서 무불통지(무슨 일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한 상태로 쑥 들어가게 역사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을 성신의 영감으로 썼다는 사실을 잠깐 접어두고 성경을 냉정하게 관찰하면 그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문제에 답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 선생은 그 당시의 교회들의 문제를 듣고서 마음 가운데 이건 이렇게 해야겠다고 판단하고 가르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 예의(銳意) 조사하고 성실하게 파악한 다음에 그에 대하여 답변을 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어디까지든지 그 사람의 작품이다. 즉흥적으로 쓱쓱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간이 없고 긴박할 때에는 불가부득 빨리 썼겠지만 바울 선생이 로마서를 쓸 때에는 일기가성(일을 단숨에 몰아쳐 해냄)으로, 숨을 한번 쉴 동안에 척척 써서 딱 끝내고서 붓을 놓는 식으로 쓴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 생각을 하고 생각한 다음에는 말이 되도록 하고, 문장을 구사할 때에도 생각을 해서 단어 하나조차 심사숙고한 것이다. 그런 흔적이 얼마든지 있다. 비슷한 말이 많을 때에는 무슨 말을 써야 정확하게 이 말이 전달되고 오해하지 않을까, 하고 그 말들 가운데에서 적절한 말을 주의 깊게 선택한 흔적들이 있다. 그러므로 흔히 하듯이 그 말이 조금씩 다른데도 더팽이 공사로 비슷한 말이라고 얼른 넘겨집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말을 신뢰해서, 이건 말이 이만큼 다르니까 그만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고 주의하는 것이 옳다. 특별히 바울 선생은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2)고 했다. '내가 전한 그 말'이라고 해서 언어가 심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기적인 역사란 그런 것이다.
성경의 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쓸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앞에 놓고, 영세불망(영원히 잊지 아니함)의 진리를 내가 쓴다고 자부해 가면서 쓴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 꼭 있어야 할 중요한 것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를 취사 선택도 하고 퇴고도 해서, 지울 것은 지우고 넣을 것은 다시 넣고 한 것이다. 가령 오늘날에도 무슨 글을 쓰면 원고지에 올리면서 교정을 하는데 교정을 할 때 다시 새로운 상(생각)이 생기면 단어를 고치기도 하고 문장을 조금 바꾸어서 쓰기도 한다. '아니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아니치 못한다' 이렇게 뒤집어 놓아서 그 말의 어운으로 어떤 강조를 더 이룰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한다. 음악을 짓는 사람들도 그렇고 어떤 창작을 하든지, 창작할 때에는 즉흥적으로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쓰던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의 중요성으로 봐서라도 심히 신중한 문제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그 문제들을 검토해 볼 역사의 방향을 전환하는 문제도 거기에 있었다. 그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에 대한 의식을 충분히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그런 문제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성신의 유기적인 역사이고 성신께서 정상적으로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성신의 비상한 역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상궤(언제나 따라야 하는 떳떳하고 올바른 길)가 아니므로 언제든지 성신의 거룩하신 조명과 인도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할 때에 어떤 비상한 종교적인 상태 가운데에 들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는 특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것뿐이다. 우리가 신약에 있는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살펴서 검토할 때 유기적인 역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의 영감을 말할 때 축자 영감이네 목적 영감이네 하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 붙이고 동력적인 영감이라든지 기계적인 영감이라는 말도 쓰지만 개혁교회가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유기적인 영감이다. 성경은 유기적으로 영감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쓴 사람에게 어떤 이상한 신통력이 비치되어 있어서 그것에 의해서 쓴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불러 주는 것을 서기 받아쓰듯이 기계적으로 쓴 것도 아니다. 유기적인 영감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의욕이나 심상, 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없애 버리고 딴 것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쓰신다는 의미이다. 그 사람이 모르는 이야기나 지식의 한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실을 언급하시는 일은 없다. 그만큼 미리미리 그 사람들을 준비시키시고 각각 가지고 있는 은사를 선용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 선생은 풍부한 지식과 논리력을 가지고 있어서 신학적인 체계를 이루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적격자이었으므로 그렇게 쓰셨다. 요한이 가지고 있던, 항상 먼 사실을 바라보는 성격과 시적인 은사는 결국 요한의 서신이라든지 묵시록을 쓰는 데 사용하셨다. 이처럼 각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 안에 성신이 충만히 역사한 것이다.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그릇이 작으면 작은 대로 밖에는 더 안 된다. 충만하다고 해서 갑자기 모르던 것을 다 알게 되는 법은 없다. 이렇게 성경을 쓰는 데도 성신님이 유기적으로 영감해서 쓰게 하셔서 그것을 유기적 영감이라고 말하듯이 성신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역사도 유기적이어서 유기적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유기적인 역사로 성신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성신님의 가르침이 꼭 무슨 소리로 금방 들리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한다. 생각이 떠오르기를 바랄지언정 내 바깥에서 청각을 통하여 무엇이 들려오기를 바란다든지 할 수 없다. 결국은 내가 A라는 것을 생각했다가 안티A를 생각하더라도 내가 생각한는 것이다. A를 해야 할 것인가, 안티A를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내 스스로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면밀하게 판단하는 것이지, 잘 모르겠으니 동전을 던져서 떨어지는 대로 혹은 어떤 이상한 현상이 나에게 보여 주는 대로 하겠다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의 분명한 의식 작용으로 해결을 얻어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성신의 일반적인 역사와 성신의 가르침의 구별
하나님께서 이 세상 피조물들 위에서 보존하시고 다스려 나가시는 거룩한 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당신이 친히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고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동시에 발생시키셔서 통치해 나가신다. 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간 일을 보면 베드로에게 어떤 이상으로써 깨달음을 주시고 동시에 복음을 받아야 할 고넬료에게도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 이것이 성신께서 동시에 협조해서 일이 될 수 있도록 하신 예이다. 이런 것들이 섭리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이다.
하나님께서는이런 섭리하에서 만유를 통치하시고 또한 보존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데 이러한 성신님의 역사 즉 은혜를 적용하시는 역사를 소위 보통 은혜 혹은 일반 은혜라고 한다. 이러한 일반 은혜를 보존하시고 내려주시고 또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일반적인 역사가 불신자에게든지 신자에게든지 다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보이신 그 거룩한 계시가 일반 계시의 사실로서 사람들에게 비취고 그 위에 성신의 일반 은혜와 일반적인 역사가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에 늘 같이 역사함으로써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경험 가운데 이치를 깨닫게 된다. 어떤 쓰디쓴 경험을 한 사람은 전에는 모르고 물덤벙 술덤벙 뛰어들었지만 그 경험에 비추어서 다시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고, 거기서 배운 교훈을 살려서 쓰는 것이다. 그것도 교육이고 가르침이다. 이렇게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일반적인 진리, 일반 이법(다른 법) 위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을 예리하고 정당한 논리로 판단해서 다시 이런 것을 반복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다. 신자도 이 세상에서 인류의 한 구성원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내리신 일반 은혜 가운데 매일 호흡하고 사는 것이다. 이런 일반 이법을 토대로 특별한 이법의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지 그걸 무시하고 특별한 이법만이 전부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그릇된 생각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교훈과 도리는 이미 내려주신 공리(하나의 이론에서 증명 없이 바르다고 하는 명제, 즉 조건 없이 전제된 명제이다. 수학에서는 '이론의 기초로서 가정한 명제'를 그 이론의 공리라고 한다)를 기초로 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 이미 비치되어 있는 어떤 이법이나 질서를 다 무시해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사실 위에서, 피조물 가운데서 구원을 하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 역시 피조물이고 따라서 일반 이법 아래에서 은혜도 받고 규제도 받는다. 믿는 사람은 열 길 높이에서 떨어져도 상하지 않고 안 죽는 다는 법은 없다.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당하는 일은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이치를 가지고 자기의 생활을 반성하고 반성하는 데서 얻는 어떤 결론을 새로운 지식이 될 수 있다. 크게 말해서 그것은 성신의 일반 은혜나 일반 역사에서 얻는 지식이므로 개괄적인 의미에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론에서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론에서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때에는 거기까지 일일이 따져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성신님의 가르침은 새로운오이코노미아로 들어온 사람 즉 중생한 사람 속에 성신께서 보혜사로서 내주하고 계시면서 가르치고 나가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가르치실 때에는 어떤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 가르치신다. 그 가르침은 첫째로 그 사람의 장성에 필요한 양식이 되어 정상적으로 자꾸 장성해 가도록 하시는 데서 실질적으로 나타난다. 즉 그 사람을 정상적으로 장성하게 하시는 것이 큰 목적 안에 있는 작은 목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신의 가르치심은 교육적인 의미를 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사실로써 새로운 어떤 이치를 깨닫게 하셨으면 그 이치는 내 안에 살아 있어야 하고 나는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것이 다음에 올 문제를 판단할 때에 중요한 재료의 하나가 될 것이므로 잘 쥐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활 가운데 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신께서 인도하셔서 그 문제의 의미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거기서 또 하나의 지식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생활 경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훌륭한 서책과 훌륭한 선생,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의 가르침, 한마디로 거룩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전수해 준 것들을 받아서 필연적으로 사상적인 축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체계 있는 사상을 이루어 가도록 해 주시는 것인데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라는 것은 무엇이고 가정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사랑이나 미움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이런 것 즉 우리의 사상의 기저가 되는 내용들이 내 안에 자꾸 축적되어 나가서 그 다음에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좀더 풍부한 크라이테리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생활 행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들의 의미를 더 깨닫고 알게 해 주시는 이런 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 성신님의 역사 가운데 한 가지이다.
성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조건들
성신의 가르침을 깊이 배우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는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일생을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고잘 할 때, 주님의 뜻을 나에게 가르쳐 주셔서 점점 더 거룩한 사상으로 축적시켜 주신다.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하신 대로 하나의 진리에서 그 다음의 새로운 사실로 이끌고 또 하나의 진리로 이끌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가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안내해 주신다는 의미의 말, 호데게오로 썼다. 이것이 성신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양식이다. 옛날 우리말로 지로한다는 말이다. 이리로 가자, 하고 길을 비추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신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갈 5:18) 하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신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롬 8:14) 하는 말씀에 있는 인도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우리말로는 다 같이 인도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어도 원어로는 다른 말이다. 요컨대 이렇게 보여 주셔서 나로 하여금 아, 그렇구나 이것이 바르구나 하고서 자꾸 따라가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성신의 인도의 한 중요한 방식이다.
이런 인도를 받으려고 하면 적극적으로 따라가기를 원해야 한다. 제 마음대로 제 욕심을 위해서 일을 하면서 자기의 공리적인 타산에 따라서 뜻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 주실리가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 즉 왔다갔다 하면서 최종적으로 자기의 정신적 물질적 행복을 노리는 심정을 가지고는 안 된다. 옛 사람이 그냥 살아 있어서 그 옛 사람의 이상을 이루어 보려고 성신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쥐고 앉아서 제 일생을 경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신님이 "이것이 기다. 그리로 가거라" 하는 가르침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 사람 속에 계시는 성신님은 오직 그의 완고와 옛사람 때문에 근심하실 뿐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성신님의 참된 감화도 알아보지 못하고 소멸시키고 만다. "성신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소멸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할 때에도 "너희가 항상 성신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했는데 그렇게 성신을 거슬러 나가면서 성신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한다면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하면 아상이 없어야 한다. 옛사람이 살아서 성신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인생 철학이나 자기의 살고 있는 스타일을 앞에 내놓고 그 안에서 성신님이 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성신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자세가 아니다.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면 나는 그대로 살겠다 나는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 없다. 이렇게 자기의 죄 있는 것과 부족한 것과 우둔한 것을 알고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기만 바라고 맡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둘째 조건은 기도하는 것이다. 성신께 대한 기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간절히 마음을 집중하고 꼭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기도가 마음 가운데서 우러나는 것이다. 주님 이 문제에 대해서 알지 못하겠사오니 주님의 뜻을 보이시면 보이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알기 원하거든 구하라고 하셔서 가만히 앉아서도 저절로 알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하여 구하지 않는 까닭에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 진실하게 배우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찾는 것이다. 문제에 대임해서 어디를 봐야 내가 이것을 알까 하고 갑자기 성경을 사전 찾듯이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거룩한 도리를 언제든지 근실하게 배워서 문제가 있을 때에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더 높고 풍부한 크라이테리아를 가질 수 있도록 공부하고 있으라는 말이다. 성경이 원래 주고자 하는 거룩한 사상과 도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좋아하시는 것, 경영하시는 것, 나한테 하고자 하시는 것들을 자꾸자꾸 터득해서 깨닫고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넷째로 거룩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검증해서 우리에게 물려준 신령하고 훌륭한 유산들을 아주 존중히 여겨야 한다. 성경을 보고서 무엇을 깨닫겠다 할 때에 아무런 규범이 없고 힌트도 없다면 단번에 그 도리를 잘 깨달을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럴 때에 어떤 사람이 그럴 듯 하게 얘기하면 아, 그렇겠다 하고 그냥 오도될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이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그 예가 위에서 살펴본 배제주의적인 사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건실한 역사적인 테스트를 겪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금과 같은 유산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한때 일어나서 떠드는 이야기인갈르 주의해서 잘 살펴야 한다.
거룩한 교회가 규제하는 것과 유산으로 물려준 것을 잘 받으려고 하면 책을 가지고 배우기도 하고 훌륭한 스승에게 배우기도 해서 사상을 쌓아 가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을 배운다는 것은 교회가 마련한 참 귀중한 방법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예배식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강설이다. 강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되었던 것을 가급적 해명해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던 것을 훌륭한 스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해명해 가는 것을 통하여 기이하게도 자꾸 터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른 교리와 또 거룩한 유산 위에서 발전해서 깊이 파 들어간 것이어야지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럴듯하게 얘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강설도 거룩한 유산과 금과 같이 빛나는 거룩한 도리를 발판으로 해서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개혁교회라고 할 때에는 개혁교회의 유산이 위대하고 거룩한 까닭에 개혁교회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유산을 바르게 전승한 사람답게 살아야 하겠고 서책도 거기에서 나와야 하겠고, 스승들은 그 거룩한 도리 안에서 그 시대의 새로운 사실을 해석하고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것을 자꾸 찾아 나가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옙 2:20)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세워 놓은 거룩한 도리의 유산을 계승하여 받은 자라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먼저 중요하다.
출처: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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