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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돈에 대한 염려를 극복하는 길(2)/존맥아더

 

 

마6장25-34절 돈에 관한 염려를 극복하는 길(2)

 

 

 

5. 돈에 관한 염려를 극복하는 길(2)

 

 

서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산상수훈으로부터의 교훈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의 관심사를 다루고 있는 매우 실제적인 교훈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 25-34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의 핵심은 물질주의의 문제, 즉 돈에 대해서, 생활에 대해서, 지상에서의 생존에 대해서, 그리고 생필품에 대해서 걱정하는 문제이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를 세 번이나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근심이나 두려움, 걱정 등이 들어설 한 치의 자리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배운 모든 것에 정반대가 되는 논리임은 물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주의적 세상은 물질 소유의 문제에 온통 빠져 있다. 삶은 사람들이 소유한 물질에서 시작하고 물질에서 끝난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말을 한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미국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지향하는 생활 방식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위해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소유물들은 바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갈 것이다. 이 세상은 현재 우리가 계속적으로 겪고 있는 경제상의 이 지나친 방임, 과생산, 과소비를 더 이상은 지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분명해지는 관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과 테드 하워드(Ted Howard)가 공동 집필한 「분명해지는 질서」(The Emerging Order)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책에서는, 현재의 과생산과 과소비를 계속 지탱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현재와 같은 삶에의 접근 방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1) 자원난(資源難)

 

일례를 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역사의 황금 시대 그 절반을 넘어서서 그 시대의 끝에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경제 성장의 무한성과 과학 기술의 지배적 진리를 신봉하는 팽창의 시대는 이제 결핍과 경제의 자가당착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 시대는 현재 우리의 시대와는 전혀 달라서 그것에 형체와 실체를 부여하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인간의 마음을 멈칫하게만 만들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엄청난 물질주의, 그리고 제한된 자원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리프킨과 하워드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계속적인 경제 성장을 역설하는 것은 재생 불가능한 지구상의 중요자원의 대부분을 이미 다 빨아들인 블랙 홀(black hole) 역할을 하고 있다”(New York:Ballantine, 1983).

 

우리는 과도한 생산, 과도한 소비를 하고 있으며, 물질주의 경제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파괴하고 있다.

 

 

 

 

2) 해결책

 

그 책의 말미에서 그들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복음주의적 기독교 윤리, 비이기적이고 저(低)소비를 지향하는 기독교 윤리가 다시 부각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윤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긴축과 전체주의의 독재 권력에 휘말려 자유라고는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실 비이기적이고 저소비를 지향하는 윤리가 지금도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윤리인지는 의심스럽다. 비록 그것을 끝까지 견지해 나갈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는 해도 과연 그 윤리를 실현하는 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이 아직도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다. 자기가 사는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적 체계에 속해 있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다름이 없을 정도로 물질주의적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주의적 시대에게 침노당해 유혹받고 있으며 또 그 권세에 고통당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의 먹이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에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이 사회의 표준이 되어 주기를 요구할 때는 우리 자신의 생활이 과연 그 표준을 벗어나지 않은 삶인지를 재성찰(再省察)해 보아야 한다.

 

 

 

2. 성경적인 관점

 

돈과 재산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는 어떤 것인가? 현재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생활에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나의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34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계신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할 정당한 시각에 관해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 중 가장 위대한 말씀이다. 19-24절은 필요 이상의 소유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견해를다루고 있고 25-34절에서는 꼭 필요한 재물을 보는 시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과 필요 이외의 것을 모두 다루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마땅히 헌신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단정적으로 말씀해 주고 계신다.

 

 

 

1) 필요 이외의 소유

 

사치, 즉 기본적인 생필품 이외의 소유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우리는 하늘에 투자해야 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좀과 동록과 도둑이 들끓는 이 세상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닌(19절) 영원한 곳에 투자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영원한 의의

 

21절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있어야 한다. 당신의 보물을 모두 이 땅에 둔다면 마음도 이 땅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은행 구좌를 염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목적과 그 계획을 이루는 일에 투자한다면 당신의 마음도 그곳에 있어 그 투자금이 영원한 배당금을 남겨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 투명한 시각

 

22-23절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린다. 땅에 투자를 하면 영안에 온통 어두움이 내려 덮일 것이고 영적 현실에 장님이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영원한 일에 투자하면 어둠이 걷히고 하나님의 빛이 마음에 흘러 넘칠 것이다.

 

 

 

 

(3) 한 마음으로 섬김

 

우리가 가진 것을 영원에 투자해야 하는 세번째 이유는, 그럼으로해서 우리는 돈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일에의 투자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든다. 그래서 필요 이외의 돈을 다룸에 있어 우리는 그것을 이 땅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될 것이고 영적 시각도 투명할 것이며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아까운 마음 없이 너그럽게 하나님의 일에 투자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2) 생필품

 

25절에서부터 34절에 이르기까지 예수께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것에 대한 말씀으로 넘어가신다.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이다. 사실, 몇몇 사람들이 현재 필요 이상의 돈을 쌓아 놓는 이유는 미래에 생활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해야 하겠는가?

 

 

 

 

복습

 

 

 

 

일반 원칙(25절)

 

 

 

본 단락의 핵심은 다음 세 구절 말씀에서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 염려하지 말라!”(25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 하지 말라”(31절).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34절상).본 단락은 위의 세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물질주의를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다. 헬라 원본에서 첫번째 말씀은 ”염려를 그치라”(Stop being anxious)고 되어 있고 나머지 두 말씀은 ”염려를 시작하지 말라”(Don't start being anxious)고 되어 있다. ”염려하는”(an-xlous)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메리므나」(merimna)인데, 이는 ”걱정하는 것, 초조해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불안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1세기의 헬라어 사본을 보면 초대 교회의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에 티테디오스 아메림노스(Titedios Amerlmnos)라는 이름이 있다. 「메림노스」(merimnos)라는 말 앞에 알파( )가 붙으며 이는 ”걱정하지 않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 이름은 '티테디오스,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25절)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기본적인 것에 대해 염려를 하지 말라.

 

 

 

 

인도하고 보호하심(26-32, 34절)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요. 그분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걱정은 불필요하고, 둘째 걱정은 믿음을 가진 자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세째 미래가 있기 때문에 걱정은 지혜롭지가 못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활의 기본적인 필요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1. 아버지가 계시므로 염려는 불필요함(26-30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에 염려는 불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고 또 그분을 소유자요 통제자요 공급자로 인식하고 또한 사랑 많으신 아버지로 본다면 걱정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계신 분이라면, 그분은 자기 자녀의 편에 서서 그것을 통제하실 것이다. 당신이 그분의 자녀라면, 그것으로 염려는 끝이 나야 한다. 그 한 예로 마태복음 7장 7-8절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두절 말씀은 여러 가지 일에 적용이 되나 우리 주님께서 기본적으로 문제 삼으신 것은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분은 뒤이어 9-10절에서 그 원리를 설명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다시 말해,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자기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 자녀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에는 그것을 준다.

 

 

 

계속해서 11절을 보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이란 무엇보다도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말한다. 악하고 죄악된 아버지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모르시겠는가?

 

 

 

 

1) 예증(26-30절상)

 

 

 

(1) 음식(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분은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이시다. 새를 돌보시는 분이라면 당신도 돌봐 주시지 않겠는가? 그분은 당신의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2) 미래(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죽음이 두려워서,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고가 생길까 봐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고 병이 날까 봐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니고 온천욕(溫泉浴), 건강 센터, 영양제를 쉬임없이 찾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기 목숨에 관한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산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돌보아주신다. 세상에 있는 모든 걱정들을 다 한다 해도 그것은 당신의 수명을 늘여 주지 못한다. 오히려 수명을 감(減)해 줄 뿐이다.

 

 

 

(3) 의복(28-30절상)

 

우리들 중에는 입을 만한 옷이 없다든가 유행에 맞는 옷이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옷을 정성들여 입는다 해도 들의 백합화 한 송이만큼은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름답게 옷 입히시게 하라. 역사상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던 솔로몬의 옷도 그 훌륭함은 한 장의 꽃잎에조차 미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먹을 것도 염려해 주시고 수명의 문제도 돌보아 주시며, 입을 옷도 염려해 주신다.

 

 

 

 

★ 자녀들에게 공급해 주심

 

 

 

하나님은 생활의 기본적인 필요들을 공급해 주신다. 그분은 그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이 그 약속의 근거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1) 시편 34편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10 절상).

 

새끼 사자가 배고파하는데도 어미가 먹을 것을 마련해 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0절하)라고 했다. 동물은 먹을 것이 부족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부양하신다. 그것은 성경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거듭 반복되어 언급된 성경상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부양하신다.

 

 

 

2)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에게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걱정해 봐야 수명을 단 하루도 늘릴 수 없는데 왜 목숨에 대해 걱정하는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보다는 조금 못한 선물로 그 생명을 유지시켜 주실 뗀데 왜 먹을 것이 없을까 봐 심히 불안해하는가? 주님께서 인간이 입을 만한 것을 모두 미리 마련해 두셨는데 왜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하는가? 당신은 그분의 자녀이고 따라서 그분은 당신에게 입을 것을 주실 것이다.

 

 

 

3) 베드로전서 5장 7절

 

베드로는 걱정꾼이었다. 물 위를 걸을 때, 주께서 바로 거기 계심에도 불구하고 물에 빠질까 봐 걱정했고(마14:29-31),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께 어떤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검을 빼들고로마 군인들과 싸우려고 했다(요 18:10). 또한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걸 두려워하여 십자가로 가시지 말라고 그분께 말씀드리기도 했다(마16:22). 그는 정말 걱정꾼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큰 진리의 멧세지를 받고 그것을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인해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교훈

 

 

 

2) 고발(30절하)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만일 걱정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인가? 적은 믿음, 하잘 것 없는 믿음, 극소량의 믿음일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수명에 대해 걱정하는 태도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1) 걱정의 대표자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구절은 여기 이외에 복음서에서 네 번 쓰였다. 누가복음 12장 28절에서 사람들이 입을 옷에 대해 걱정했을 때와, 마태복음 8장 24-26절에서 제자들이 물에 빠질까 봐 염려했을 때, 즉 주님께서 자기들을 물에 빠져 죽게 하실까 봐 두려워했을 때 쓰였다. 그들은 ”폭풍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주무실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태복음14장 31절에서 베드로가 물에 빠질 것을 염려했을 때도 그 말이 쓰였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8절에서 그들이 먹을 것을 걱정했을 때도 쓰였다. 그 말은 모두 음식이나 옷 혹은 목숨을 염려하는 자들에 대해 쓰였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분의 제자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할 제자들을 향해 매번 쓰였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속하셨고, 죄에서 구원하셨고, 사단의 속박을 끊어 주었으며,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옮겨 주셔 그 나라에 있게 하셨으며,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께서 이 다음 날 먹고 입을 것을 구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보다 큰 선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면서 보다 작은 선물에 대해서는 그분을 믿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란 사실은 믿으면서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시고 생명의 길이도 또한 돌보아 주실 것이란 사실은 믿지 못한다.

 

예수께서 매 경우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런 질책을 내리셨다는 사실은, 곧 오늘날 신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그분은 불신자들에게는 결코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2) 걱정의 결과

 

O 걱정은 하나님을 튕겨 낸다

 

”걱정은 작고 사소한 죄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걱정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신적 질병의 대부분, 그리고 몇몇 육신의 질병은 걱정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걱정은 영육을 황폐케 한다. 하지만 걱정이 당신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보다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께 끼치는 영향이다. 걱정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걱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하나님되신다는 사실을 쳐서 튕겨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O 걱정은 성경을 불신한다.

 

나는 걱정은 중대한 죄라고 생각한다. 걱정은 성경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나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믿습니다. 말씀 한자 한자가 모두 절대적인 영감에 의한 것임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실제 삶은 걱정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다고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실 것에 대해 염려하는가?

 

 

 

O 걱정은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걱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주위 상황에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걱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기 신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걱정은 영혼을 황폐케하는 죄이다. 하나님은 나를 돌보실 수 없다고 말하는, 살인적이고 쇠약케 하고 방종적이며 소유욕 강한 죄이다. 걱정은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든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권세를 무시한다. 인생의 흥망성쇠와 시련과 여러 상황들을 구원보다 더 중대한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믿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

 

 

 

에베소서 1장 18-19절에서 바울은 기도한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당신도 성경으로 되돌아가 다시 한번 눈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O 걱정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걱정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을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을 잘 안다면 신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 그분이 진실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과거에 그분이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어떻게 공급해 주셨는지도 분명히 아는 게 좋다. 그러면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공부하는 자들조차도 때때로 염려를 한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그 말씀의 의미를 매일 새롭게 느낌으로써 하나님이 자기 마음의 중심에 계시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단은 마음의 빈 자리로 살며시 들어와서 무언가에 대해 걱정하게 만든다.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은 현재 당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2. 걱정은 믿음 있는 사람의 특성이 아님(31-32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인해 걱정은 불필요하다. 또한 걱정은 믿음 있는 자의 특성도 아니다. 그분은 이제 똑같은 원칙을 다시 부연해서 말씀하신다.

 

 

 

1) 이방인의 무지(31-32절상)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예수께서는 경건치 못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특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걱정이 불필요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에 걱정은 무의미하며,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걱정은 소용이 없으며, 걱정을 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불신자들과 똑같은 범주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은 곧 믿음 없는 것이기도 하다.

 

 

 

(1) 거룩한 자원이 없이 삶

 

”이방인”(gentile)이란 말은 ”이교도”(pagan) 혹은 ”유대인 이외의 사람”(heathen)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없이 사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 걱정한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그들은 손에 움켜쥐고 소유하기 위해서 산다. 그들에게는 필요를 공급해 주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아무런 약속도 안 주어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도움을 얻을 만한 아무런 신적(神的)인 자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사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근심스럽고 걱정스럽게 마음을 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심각한 죄악이기도 하다.

 

 

 

(2) 두려움 가운데 삶

 

이방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은 아무래도 그들이 기대하는 종류의 신성, 즉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신성을 갖지 못한다. 세상의 민족들이 그들 자신의 신을 만들어 세울 때마다 그들은 전형적으로 사단의 신을 만들어 냈다. 즉, 그 신들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파기된 약속의 신이고, 동정심이 결핍된 신이고, 두려움의 신, 공포의 신이며, 항상 무언가로 달래 줘야 하는 신, 모든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이다. 그들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충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희생 제물이나 그들의 종교가 요구하는 어떤 것으로 그 신을 달래고 유화시켜야 했다. 미래의 삶에 대해 모호한 관념을 갖고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안락과 부와 안전과 특권을 획득하려는 집착으로 부식되어갈 수밖에 없다.

 

 

 

(3) 세상과 똑같이 삶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의 ”구한다”는 말은 강력하게 추구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물질적인 만족을 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라, 내일은 죽을 것이니 손에 넣을 수 있는 즐거움은 모두 손에 넣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식의 생활 방식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우스울 것이다. 세상 백성들은 물질을 구한다(눅 12:30).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있어 걱정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O 그리스도인다운 믿음의 표현

 

”하나님이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뢰받으실 만한 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먹을 것이나 육신의 복락이나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은 곧 세상적인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 빌립보서 4장 6절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의 전반적인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속이 빈 신앙 고백을 한다. 입으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어느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걱정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과 똑같다.

 

- 요한복음 17장 15절 :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로마서 12장 2절상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왕의 자녀는 마귀에게 속한 거지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O 그리스도인다운 신실함에 대한 검토

 

당신 자신에게 한번 물어 보라. ”나는 그리스도인처럼 삶을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방인처럼 하고 있는가?”라고 달리 표현한다면, ”어려운 일이 닥칠 때나 미래가 불안정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그 질문에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느냐를 알 수 있다. 위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신앙은 내 인생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뿐더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게 또 이렇게 물어 보라. ”나는 모든 시련, 미래에 대한 모든 예상,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내 신앙의 맥락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2) 하나님께서 아심(32절하)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의 신과 우리 하나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방의 신은 말을 못하고 무지하며 실재(實在)치 않는다. 즉,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존재하지조차 않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을 도와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도 믿으라. 하나님께서 내 삶을 아시고 내 필요를 아신다고 할 때 내가 알아야 할 일은 그분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뿐이다. 그분께서 내 필요를 아시고 돌보신다면 나는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롭다. 이방의 신들과는 달리,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신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 필요를 공급해 주실 만한 자원과 사랑도 갖고 계시다. 그런데 당신이 걱정할 일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인해 걱정은 불필요하며, 또한 걱정한다는 것은 신앙을 가진 자의 특성이 아니다.

 

 

 

3. 미래가 있기 때문에 걱정은 지혜롭지 못함(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주님께서는 ”미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 미래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으니 그건 그때 가서 하라”고 말씀하신다. 내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내일을 위해 준비를 해두는 것은 좋으나 내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내일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애가 3장 23절에 보면 주의 성실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했다.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먹이신 것처럼 매일의 만나로써 당신도 먹이실 것이다.

 

 

 

1) 내일의 염려

 

걱정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걱정은 당신을 좌절시키려고 애쓸 것이다. 먼저 그것은 오늘의 당신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즉, 당신을 화나게 하고 불안하게 할 것이다. 만일 오늘 걱정할 것이 없으면, 당신으로 하여금 내일은 뭔가 걱정할 것이 없을까 하고 찾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걱정이 당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법이다. 걱정하는 죄에 몰두하여 뭔가 걱정할 것이 없을까 하는 눈으로만 미래를 바라보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걱정은 오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오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오늘의 자원을 취하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기쁨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기쁨이 결핍된 삶 또한 죄악이다. 내일의 염려 때문에 기쁨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늘 주시는 승리 또한 놓친다. 그것은 그분의 규칙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늘 영광되고 축복된 날을 당신에게 주신다. 그 날의 빛과 충만한 기쁨 가운데 살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활용하라. 미래 일을 앞당겨 생각하지 말 것이며 오지도 않은 미래 일을 염려하느라 오늘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라. ”두려움은 곧 거짓말”이라는 이 짤막한 한 마디 말의 의미를 깨우치라. 두려움은 당신으로 하여금 오늘의 기쁨을 상실케 한다.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을 금하신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2) 오늘을 위한 은혜

 

게다가 하나님은 한 번에 하루를 지탱할 힘만을 주신다. 내일이 오기까지는 내일을 위한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이다. 죽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가족 중의 어떤 한 사람이 죽음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 사람 없이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죤 목사님,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정말 놀랍게 저를 지탱해 주시고 뒷받침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슬프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이주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제 마음에는 힘과 확신과 즐거움이 생깁니다”라고 그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를 필요로 하는 그 시간을 위한 은혜만을 주신다. 그런데 지금 내일 일을 걱정하고자 한다면 내일 일을 위한 은혜가 없어 이중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주어진 은혜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을 겪는 게 좋다. 나는 내일이나 그 다음 날의 일을 걱정하기를 거부한다. 그 일을 감당해 낼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두려움은 곧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나는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자원이 없는 가운데 내 고통을 배가(倍加)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짐만을 어깨에 걸머진다. 하나님께서 그 집을 들어 올려 멀리 던지시는 것을 볼 때에 나는 오늘을 즐길 수 있고 내일의 고민은 내일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지금 살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내 자신을 절름발이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1) 계속되는 그분의 온전함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는 성경의 말씀은, 그분께서 어제 하셨던 일은 내일도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미래 일에 대해 어떤 의문이 있다면 과거를 뒤돌아보라. 그때 그분은 당신을 지탱해 주셨는가? 그렇다면 미래에도 역시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 그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걱정은 금하여 진다.

 

 

 

죤 스타트(John Stott)는 이렇게 말했다.

 

 

 

"물질적인 일에 점점 주목하게 되어 그것이 우리의 에너지를 모두 빨아들이게 하고 염려의 짐을 지우게 하는 방식으로써 물질적인 일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도 조화될 수 없고상식에도 어긋나는 짓이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신하는 것이며, 솔직히 말하자면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교도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고 또 가치도 없는 야심이다.”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그분은 영원에 속한 모든 자원을 자신의 처분대로 쓰실 수있다.

 

 

 

(2) 항구에 정박함

 

앨리스테어 맥클린(Alistair MacLean)은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Tauler)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인용하여 들려 준다.

 

어느 날 타울러가 한 거지를 만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날을 주셨군요, 친구여」 그가 말하자 거지는 대답했다. ”나쁜 날이 하나도 없었다는 걸 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타울러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행복한 삶을 주셨군요」”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결코 불행하지가 않아요” 타울러는 놀라서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 나는 날씨가 좋아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비가 와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풍성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배가 고플 때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나도 기뻐하는데, 왜 불행하지 않은 때에 불행해해야 합니까?” 타울러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왕이요”

 

「그럼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타울러가 다시 묻자그 거지는 조용히 대답했다.

 

”내 마음에 있소”

 

 

 

누군가가 ”나는 늘 행복하다. 그 비결은, 늘 바다를 항해면서도 마음은 항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자, 당신은 이 항구를 어떻게 찾겠는가?

 

 

 

 

보장된 약속(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시 말해 당신의 생각을 하나님이 계신 곳에 둔다면 그분께서 당신의 육신을 돌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일에 휘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신다.

 

 

 

1. 대조

 

”그러나”(개역 한글성경에는 생략되었음 - 역자 주).

 

아른트(Arndt)와 깅그리히(Gingrich) 공저의 「헬라어 - 영어 사전」(Greek-English Lexicon)에 보면, 영어의 ”그러나”(but)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de)는 주로 대조점을 강조하는 말로 쓰인다고 했다. 이는 ”오히려”(rather)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번역이다. 따라서 본문은, 걱정하기보다는, 이교도처럼 행동하기보다는, 믿음 적은 자가 되기보다는, 미래 일을 현재로 끌어당기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인 것이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기보다는, 물질주의적인 방향을 취하기보다는, 이 세대의 재산에 침식당하기보다는 그분의 나라를 구하라.

 

 

 

2. 염려해야 할 일

 

”너희는 먼저 구하라.”

 

 

 

여기서 ”먼저”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토스」(protos)는 ”선택권이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제일 앞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생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이것은 최우선 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1) ”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나라란 헬라어로 「바실레이아」(basileia)로서 ”그리스도의 규칙, 하나님의 규칙,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구해야 한다. 마태복음 6장 10절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검 앞에서도 자기 믿음을 지킬 각오를 했다. 사람들은 ”가지말아요, 바울. 거기 가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할 겁니다. 당신을 잡아 옥에 가둘 것이고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며 그를 말렸지만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는 자기 목숨을 연장시키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먹을 것과입을 것이 충분한가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일을 우선으로 삼으려는 이러한 자세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멋진 옷과 훌륭한 음식에 대해 작별을 고하고 감연히 미지의 땅으로 선교 사역을 떠날 수 있게도 만든다. 그는 훌륭한 옷이나 맛있는 음식에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쏟는 것만큼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친 음식, 초라한 옷도 개의치 않으며 외딴 곳에 떨어져서 전 생애를 보내는 것도 관계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

 

 

 

(1) 회심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으며 현재 몰두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나라에 더 관심이 많은가? 모든 에너지를 이 땅에 쏟아 붓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당신 자신을 투자하고 있는가? 그분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구하는 행동이고, 그분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기를 구하는 행동이며, 사람들이 구속받기를 구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확산시키는 것은 죤 스토트가 말했다시피 ”죄악된 영토 확장주의나 승리 우선주의”(sinful imperialism or tnumphalism)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나라의 확장을 구하는 것이다.

 

 

 

(2) 헌신

 

그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기쁨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내 삶에 나타나기를 구한다(롬 14:17).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내 삶 속에서 염려가 아닌 의와 평강과 기쁨을 보고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그들에게 모두 말해 주고 싶습니다”라고 말은 하면서 생활이 걱정과 염려와 근심뿐이라면,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당신에게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권세에 의문을 품을 것도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기쁨 속에 드러난다. 그것은 곧 염려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그분의 나라로 데려가고자 하는 것, 그 나라가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분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3) 다시 오심

 

지복 천 년의 영광 가운데서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를 갈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물질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서는 큰 흥분을 느낄 수가 없다. 그분의 나라가 임하면 그 모든 것이 아무 값어치도 없는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상속받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롬 8:17). 또한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며(계 22:5), 영원 무궁토록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리게 될 것이며(계 21:1), 영원한 하늘의 엄위로움과 부요함을 모두 누리게 될 것이라(계 21:1-22:5)고도 말한다. 이 세상은 온통 멸망되고 주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텐데, 왜 내가 이 땅에다 물질을 쌓아 두느라고 내 시간을 모두 허비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이렇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구하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도들에게 그 나라를 주실 때에 그분으로부터 올 영원한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와 평강과 기쁨을 통해 그 나라가 내 삶에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한사람들을 그분께로 데려가서 그 나라가 더 커지고 확장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2) ”그의 의”

 

돈을 좇지 말고 거룩함을 좇으라. 거룩함을 추구하라. 그분은 실제적인 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무언가를 추구하려면 경건함, 거룩함, 그리고 의로움을 추구하라. 우리들 중에는 돈, 자동차, 집, 옷 등을 추구하는 데 모든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고 거룩함을 좇는다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다음을 보라.

 

 

 

3. 돌보심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편 84편 11절 말씀에 의하면, 정직히 행하기만 하면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구하는 자를 돌보실 것이다.

 

 

 

솔로몬의 경우는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예가 된다. 그는 부를 구하지 않았고 멋진 옷이나 훌륭한 음식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오래 살 것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지혜를 구했다. 그 지혜를 받았을 때 그는 나머지 다른 것도 모두 받았다. 솔로몬과 같은 옷을 입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솔로몬처럼 부유했던 사람도 없으며, 그가 베풀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잔치를 베풀었던 사람도 없다. 그는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지혜를 구했으며 지혜를 얻었을 때 나머지 모든 것은 잉여의 축복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걱정을 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걱정은 불필요하다. 그리고 걱정을 한다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성이 아니다. 또한 장차 다가올 세상이 있기에 걱정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확인 질문

 

 

 

1. 풍요를 누리며 사는 현대 사회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생활 방식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2. 현재 우리의 생활 방식에 대한 해결책을 한 가지 든다면 어떤 것인가? 그 해결책을 적용함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맡아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3.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투자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4. 우리가 염려를 없애야 할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특성 네 가지는 무엇인가?

 

 

 

5. 예수께서 마태복음 7장 7-11절에서 논하신 내용을 설명하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6.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7. 베드로는 어떤 염려를 했었는가? 그리고 그가 마침내 깨달은 교훈은 무엇인가?

 

 

 

8. 걱정을 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을 나타내게 되는가?

 

 

 

9.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예수님의 질책이 매번 그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었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10. 걱정의 네 가지 결과는 무엇인가? 그 각각의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라.

 

 

 

11.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12. ”이방인”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왜 그들은 생활의 기본적 필요의 충족을 구하는가?

 

 

 

13.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그 신은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가? 그들의 신은 어떤 신인가?

 

 

 

14.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어떤 종류의 마음 자세를 드러내는 것인가? 정당한 마음 자세는 어떤 것인가? 성경을 근거로 대답하라.

 

 

 

15. 우리의 하나님과 이교도의 신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16. 기쁨이 없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는가? 왜 내일에 대해 걱정하면 안 되는가?

 

 

 

17.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들에게 유용하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내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왜 잘못인가?

 

 

 

18.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필요를 돌보아 주시므로 우리가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19.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20.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의 삶에 나타나는 세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신자의 삶에 그것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하라.

 

 

 

21.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모습으로 신자의 삶에 드러나야 하는지 세 가지를 들라(롬 14:17).

 

 

 

 

원리에 대한 재확인

 

 

 

1. 제레미 리프킨과 테드 하워드는 그들의 공동 저서에서 비이기심과 저소비로 특징지워지는 기독교 윤리로 되돌아갈 것을 호소했다. 비이기심이란 말을 보다 잘 표현하자면 겸손이라 해야 좋을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9절-2장 11절, 야고보서 4장 1-10절, 베드로전서 5장 5-10절 말씀을 상고해 보라. 그 말씀들이 겸손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당신이 관찰 가능했던 바를 모두 기록해 보라. 겸손하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에 의할 때, 그들은 어디에 충성하고 있는가?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행보에 늘 수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8절 말씀에 의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참고 감당하셨는가?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체험해 보지 않고도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는가?(참조 - 빌 1:29/벧전 5:10) 겸손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해주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에 의할 때, 당신의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 당신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다. 지금 즉시 그렇게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헌신을 보상해 주실 것을 알고 겸손한 삶을 살기 시작하라.

 

 

 

2. 당신은 적은 믿음을 가진 자인가, 큰 믿음을 가진 자인가? 염려가 생기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당신의 삶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약속을 반박하는 삶은 아닌가?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지는 않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겠는가? 여호수아 1장 8절을 읽으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의 결과는 무엇인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분을 더 잘 알아가겠다는 언약을 그분과 맺지 않겠는가?

 

 

 

3. 당신은 삶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처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는가? 삶이 험난하고 미래가 불안정할때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끼치는가? 끼친다면 어떻게 끼치는가? 당신은 생활에 닥치는 모든 시련, 미래에의 모든 예상, 그리고 현재의 모든 상황을 신앙의 맥락하에서 늘 생각하는가? 만일 인생을 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겪어야 할 체험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에는 변화가 일어날 필요가 있다. 기도로써 그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라.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으로 그러한 기도에의 힘을 얻으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과 병행하여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시편 42편 1절, 마태복음 5장 6절, 요한복음 6장 35절 말씀을 상고해 보라. 당신은 얼마만한 열심으로 그분의 의를 구해야 하는가? 의에 대한 그러한 주림과 갈급함은 어떻게 완전히 충족되는가? 로마서 8장 3-5절, 고린도후서 3장 18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을 읽으라. 성령 안에서의 성화(聖化)를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당신을 택해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그러한 시간에 기초하여 오직 하나님께서만 채워 주실 수 있는 주림과 갈급함으로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기 시작하라.

 

출처: 지명교회까페

 

출처 :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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