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의 사회 개혁 사상에서 얻은 결론
이상에 살펴보았듯이 20세기의 거장 프랜시스 쉐퍼의 사회개혁의 분명한 인식은 "절대권위의 회복, 절대 기준의 회복"에 있다. 쉐퍼는 모든 사회 현상의 붕괴에는 바로 이러한 절대 권위의 붕괴에 기인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그가 이 시대를 말하면서 절망의 선 아래 사는 시대라고 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권위의 붕괴는 성경 권위의 붕괴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부조리한 사회의 회복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지적하였듯이
"만일 어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참조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부조리 하다."
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시작한다. 무한한 참조점을 회복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 무한한 참조점이 바로 절대권위요, 절대기준의 회복인 것이다. 쉐퍼는 여기서 그의 사회개혁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이것의 회복만이 진정한 사회개혁의 완성이라 본 것이다. 쉐퍼는 인간 사회의 문제의 근원 즉 삶의 영역에 나타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러한 세계관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날 것임을 보았다. 이러한 선지자적인 인식은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행동하는 성경적인 응답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쉐퍼의 사상은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이고, 문화적인 기반은 신 칼빈주의이고 역사적으로는 청교도 신앙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쉐퍼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향들은 20세기의 혼합된 세계관 속에서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쉐퍼의 사상으로 모든 것이 용해되어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매우 독특한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어졌다. 특별히 개혁주의 자들이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 이었다는 비판을 쉐퍼는 막아주는 역할을 하면서 균형 잡힌 개혁주의 사상을 실천하였다.
이렇게 균형 잡힌 개혁주의자 프란시스 쉐퍼의 사회개혁사상을 통하여 우리가 도전 받을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개혁자의 삶은 사상과 삶이 일관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쉐퍼의 문제는 일관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의 사상은 매우 일관되어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인생 전반에 걸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였던 그의 사상은 복음주의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인 것이다. 사상은 행동을 낳는다는 일반론이 바로 쉐퍼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쉐퍼는 초기부터 주장하였던 '내적 사상세계는 외적인 행동을 결정 짖는다"는 주장을 누구보다도 일관성 있게 실천하였던 것이다. 사상과 삶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것은 두 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첫째는 그의 사상이 오류가 있는 것이거나 둘째는 그 사상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결론뿐이다. 그런의미에서 쉐퍼의 사상과 삶은 일관성이 있었고, 일관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진리임을 증거 하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처럼 말과 행동이 밤 낯으로 달라지는 시대에 쉐퍼의 모습은 하나의 등대인 것이다.
그동안 개혁주의라고 부르짖었던 많은 부류들은 이러한 일관성이 없었다. 진리는 실천으로 나타나야하는 기본적인 모습도 개혁주의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칭 개혁주의라 일컫는 교회들이 내적인 성장에만 몰두하다니 정장 돌아보고 주도권을 잡아야 할 사회에서 그 키를 빼앗기고 말았다. 즉, 진리라고 외치는 복음이 교회 안에서만 메아리 쳤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게 하였고 결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의 권위, 성경의 권위, 구원의 진리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일관성 있는 세계관과 삶이 살아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적 세계관의 재점검을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바른 세계관을 정립해야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에 대한 재인식
둘째로 볼 수 있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를 다시금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살면서 21세기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주요한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하였듯이 점점 종교개혁의 원리가 사라지는 현상에서 그는 개혁의 원리를 재인식하게 하였던 것이다. 문화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의 문제, 그리고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세 문제까지 잊어지고 있었던 원리들을 재인식하게 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정권 유착적인 모습은 개혁주의 교회의 치욕적인 모습인 것이다. 개혁주의라 부르고는 있지만 개혁주의 교회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개혁주의는 단순히 교회성장을 통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개혁주의 교회 목사라고 소개하면서도 정작 문화와 정치 그리고 환경과 사회의 질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혹 관심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2차나3차의 문제이다. 이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는 것을 본다.
국가에 대한 태도도 여전히 왜곡되어져 있다. 독재국가의 통치원리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개혁주의라고 인식하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들은 청산해야 될 것들이다.
시민 불복종을 가르치라
셋째는 시민 불복종의 운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개혁주의의 유산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한다면 교회는 이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쉐퍼도 지적하였지만 사회 개혁의 주체로서 나서지 않으면 그 자체가 인본주의 세계에 협력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죄 인 것이다. 특별히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참여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손봉호의
견해처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수준을 볼 때 협의의 정치참여보다는 광의의 정치참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주]
[주] 손봉호,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한계“, 신앙과 학문 [서울:기독교 학문연구회1997].pp.9. 협의 정치 참여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고 거기서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다.기독교 정당을 만드는 것도 같은 것이다.광의의 정치참여는 제도적,정치적,법적인 권력을 갖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기관에 영향을 끼침으로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손봉호는 광의의 정치참여를 말하는 이유를 “첫째 우리 유권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수준은 정단한 수단을 통하여 권력을 얻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둘째, 그리스도인 유권자들도 민주의식 성숙도에 있어서 비기독교인 유권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셋째, 우리 사회가 다종교 사회이므로, 비록 보편적인 정의를 위하여 노력할찌라도 다른 종교 신자들이 정당하게 평가해 줄 가능성이 희박하다.”[ibid.,pp.9-11.]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본다면 기독교적 시민운동이 가장 적절한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가 강조한 한계선으로서의 시민 불복종운동은 일종의 기독시민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영역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사회전반에 걸친 운동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당 정치 참여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주]
[주]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빔 리트케르크가 주장하였던 것처럼 기독교 정당이 세워져야함을 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의 전초적으로 소수의 기독교 정치세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빔 리트케르크,세상을 정복하라, 라브리 편지제36호,[서울:라브리],pp.7 또한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입장로만 하는 것은 또다른 독재와 같다는 의미있는 말을 하였다.[ibid.,pp.7]
현실적 선지자가 되라
넷째는 오늘 우리를 향하여 현실적 선지자가 되기를 가르쳐 주고 있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지막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특별한 노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① 인본주의 사고 방식을 가진 지금 세대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하며
② 기독교인으로서 참된 세계관을 알 뿐 아니라 세계관에 따라 살아야 한다.
③ 우리는 노예제도 섀와 산업혁명이후의 시대를 돌아보면서 노에 제도를 반대하여, 축적된 부의 무자비한 사용에 반대하여 공개적으로 소리를 높이고 행동했던 엘리자베스 프라이, 샤프츠베리경, 윌리엄 윌버포스 그리고 죤 웨슬리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감사한다.
④ 정치의 성장에 관하여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이미 그것을 지지하는 판단이다.”1)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개혁 교회가 심각하게 보아야 할 부분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은 젊은층들이 점점 교회를 등지고 로마 카톨릭이나, 무교회주의자로 이동한다는 데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 내부의 문제이다. 한극의 1/4이 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영향력은 없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무능이요 죄악이다.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모든 영역에의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해야 하는 명령을 감춰버리므로 결국 세속적 인본주의 자들에게 내주었고 결국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상실되는 사회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진정으로 사회의 소금이되려면 사회를 향한 외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쉐퍼가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주]
[주] 쉐퍼의 현실주의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바로 이해 하여야 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다 죄악의 현실 가운데서 사랑을 전제하는 정의의 구현을 향하여 힘쓸 것을 부르짖었음은 높히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니버가 산업사회와 현대문명의 제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키에르 케고르의 지혜를 좇아 하려고 한 것과,문화적인 면에서 교회는 물론 성경까지를 개혁의 대상으로 본 것은 그의 큰 실책이자 과오라고 본 박아론의 평가는 쉐퍼와 니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박아론 ,현대신학 연구,[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1].p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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