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앙

[스크랩] 교회의 세 가지 징표/김홍전 목사

아침그림 2014. 5. 27. 08:39

 

 

성경: 엡1:13-23절

 

제목: 교회의 세 가지 징표

 

 

1. 배교의 현실에 처한 교회

 

배교라는 큰 사실은 어디서 현저하게 역사적인 사실로 일어나느냐 하면 배교는 기독교를 전제로 하는 까닭에 기독교 국가라는 사회에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 있어야만 개혁교회로서, 건전한 교회로서 행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전부를 바치고 사는 생활인 신령한 생활을 통해 활동을 해서 역사를 이끌어 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오랜 세월 배워 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세우시사 나중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라고 하는 가장 위대한 본질, 위대한 존재인 교회를 바르게 증거 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대로부터 받는바 도전에 대해서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교회로서 거룩한 자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중요한 생활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떠나서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든지 이름을 내고 살겠다든지 어떻게든 좀 행복스럽게 살겠다는 지하는 소위 행복 론에 젖어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안 믿는 사람의 세계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공리주의적 생각 가운데서 종교까지 이용해 먹는 비천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진짜와 가짜, 사이비와 진실이라는 것을 나누는 날에 가까울수록 자꾸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관을 정확하고 심오하게 가지고 거기에 의거해서 바로 판단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교회가 바로 판단할 뿐 아니라 바로 행동하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 교회가 바로 서야 하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정신을 차려서 나가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라는 것을 자기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지내다가 아쉬운 일이 생기거나 어디 의지할 데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의지하고 나가는 공리적인 정도에 주저앉아 있다면 오늘날 교회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비로소 비천한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관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2. 말씀, 성례전, 권징.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의식을 집행하면 그것이 그대로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교회가 된다면 가정마다 예배하는 가정은 다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기도회를 가지고 예배드리는 의식을 좀 더 많은 친구들이 모여 행하면 그것은 곧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교회를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교회가 되려면 외부의 형성 요소부터 생각해 나가더라도 교회의 징표들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구별할 때 교회의 징표를 판단의 준거로 삼아야 한다.

 

 

징표가 교회에 구비되려면 어떠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있는데 그 내용은 말씀, 성례전, 권징입니다. 말씀이 첫째 중요한 징표입니다. 말씀이 순전하게 바르게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고 가르쳐져야 합니다(마28:19-20). 이것이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큰 사명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모든 백성을 제자로 삼아서 삼위의 거룩하신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 하시는 이 말씀의 뜻을 보면, 먼저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단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이제 이후에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 지켜서 행하게 하라 해서, 교육하고 실천하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말씀이 교회 안에서 사역하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셨는데 이것이 없이는 교회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 정당하게 공급이 되고 정당하게 사역이 되려면 유아에게는 젖을 주는 것처럼 차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의 실체로서 장성하기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늘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평신도들이 앉아서 성경 읽는 것으로 공급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슬하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집안에서 식구를 모아 놓고 기도회를 하는 식으로 무엇을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자리에 서서 말씀을 전할 때에는 숫자가 다만 몇 사람이든지 혹은 자기 식구들만이든지 교회는 교회인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 때라도 자기가 교회라고 선언하면 다 그대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상태와 또 그들이 모여 있는 목적과 동기가 교회로서의 의식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형식으로 바르게 공급해 주고 전파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권고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말씀을 눈에 보이는 심벌에 의해서 전해 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전입니다. 성례전이 또한 교회를 교회 아닌 것과 구별하는 중요한 하나의 표지입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성례전을 평신도들이 집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서운 경고가 하나님 말씀에 붙어 있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있는 경고는 너무도 잘 아시는 내용인데, 하나님께서 엄숙하게 다루는 사실을 그 의미도 잘 모르고 함부로 집행하는 것이 옳지 않은 까닭에 반드시 교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시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례전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신성한 예식이므로 아주 신중하게 행해야지 그냥 적당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근신해서 주의해 가면서 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거기에 적응한 사람, 하나님께서 불러서 그 일로 기름 부음을 받게 하신 사람이 서서 해야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징표는 권징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하시는 그 명령에 의해서 행하는 일에 태만하면 권고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징계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하는 교회 법적인 책벌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권징이 크게 해이해졌는데 특별히 한국사회에서는 굉장히 해이해졌습니다. 거의 권징이 있는가 없는가 모르게 속으로 가만가만 처리하려고만 합니다. 권징이 교회의 징표로서 지니는 하나의 증거로서의 의미는 이미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전성문교회는 명확하게 권징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시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때론 책망이 와야 할 것이고, 필요하면 경계가 가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권징은 개인이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주고 책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또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교리,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는 책망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말씀이 그를 책망을 않는다면 그 사람 자신은 말씀에 대해서 면역성이 있거나 둔감한 것입니다. 어딘지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책망도 듣고 깨달으면서 자랍니다. 말씀으로서 바르게 함이 없이는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본질상 사곡 되어 있다고 했지 결코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하고 악하기 때문에 때로 탐욕이 일어나고 정욕이 일어나고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나이를 먹어서 수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틈틈이 기회를 틈타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어린아이는 아이로서 그런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의 자연성을 계발시킨다고 그냥 방치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이론인데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법과는 먼 애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린아이들도 다 같이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당하는 제재라는 것이 또한 중요한 교육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구약 적인 용어로 보면 그것이 곧 구약의 종교였습니다. “주를 경외하라” 하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징표들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이러한 외부적인, 표면적인 표지가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예배당이 교회의 징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도 교회의 징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세웠던 1세기에는 그런 것 하나도 없었고 십자가 내걸고 돌아다닌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떤 집에서 같이 모이되 사도가 없으면 사도가 임명한 다른 사람이 가서 그때그때 인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단기간에 특별한 훈련들을 해서 내보냈을 것을 다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순회를 하면서 늘 교회들을 찾아가고, 거룩한 예식을 집행하며 지냈습니다.

 

 

3. 잘못된 교회 관이 가져온 결과

 

교회 관이 잘못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하여 보라.

 

 

교회의 일치라는 명분하에 믿는바 신조, 교리도 무시하고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자기네 식의 운동일 뿐이다. 하나님을 거의 훼방하는 용어까지 쓰는 사람들과 함께 붙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교회인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인데 과연 신앙의 정조를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이다.

 

 

개혁교회는 신앙에 대해서는 도무지 양보를 안 해 주고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천명하면서 말씀을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일을 엄격히 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냥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끌려가서 큰 데로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 주 일 때리까 모두 같이 예배하자 하고 우하니 모으면, 저희들은 무슨 개혁신앙을 가졌다고 떠들던 사람들도 금방 다 거기 들어붙어 가지고 프로그램을 맡아서 그 일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그것이 참다운 예배입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서 그저 크면 좋고 유리하다면 좋다고 쫓아다니는 심리가 만연합니다. 교회 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교회라고 모여 가지고 묶어서 도매금으로 넘겨주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가장 크게 확대되어 그릇된 교회 관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민사회입니다.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그 심리 자체가 이국에 처음 와서 외로우니까 서로 들어붙어 가지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살자는 식, 말하자면 클럽이나 계와 같은 정도에 머물러 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몸이 여기 나타나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저 말로만 주의 몸입니다. 그러나 주의 몸이라면 몸이 되는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소는 없이 말로만 한다고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관이 불확실하면 이 배교가 시대에는 누가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다 휩쓸려 간다는 것을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일에 대해서도 정신을 차려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고서 헤헤 하고 그냥 앉아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뭐가 뭔지 모르고 그런 사람들 생각도 옳은가 보다 좋은가 보다 한다면 마침 기회가 없어서 안 들어갈 뿐이지 언제 따라 들어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언제든지 교회를 생각할 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구상하신 가장 고귀한 실체라는 것, 그리고 나 하나의 존재보다도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가장 귀한 사실은 아닙니다. 내가 그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귀한 것인 줄 알고 교회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 적당히 만들면 교회인 줄 아는 그런 그릇된 관념이라든지 관습, 습성이 있다면 그것들을 완전히 불식해 버려야 합니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교회를 신성하게 아주 두렵게 생각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4.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 사역해야 함.

 

이제 교회에 대해서 다시 몇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무엇보다 말씀이 바르게 전달되고 공급되고 또 바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말씀은 대개 어떻게 공급이 되고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성경 말씀을 읽기만 하면 되는가, 읽고 그 뜻을 해석하면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규범이라는 것이 딱 서 있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성경 말씀을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처럼 끄집어내 읽고서 흥미롭게 이야기하더라도 거기에 교회가 성립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가 성립되는 요소로서 말씀의 작용이라는 것은 반드시 말씀이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사역뿐 아니라 문헌으로서의 역할도 합니다.

 

 

성경은 신학의 원천으로나 사상서류로나 예술서류로 위대한 책이고 또 특별히 도덕을 가르치는 점에 있어서도 위대한 서류입니다. 그러나 그런 작용도 은혜의 방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은혜의 방도의 요소 안에서 작용할 때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방도라는 사실을 떠나서도 그것대로 충분히, 안 믿는 사람에게 일반적인 서류로서의 작용을 합니다.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감동, 위대한 감화를 주기도 하고 그리하여 위대한 역사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에서 공급되는 말씀의 작용은 아닙니다.

 

 

교회적인 요소로서 말씀이 작용하려면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 역사해야합니다.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할 때 그 단계를 우리는 생각의 편의상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사실 즉 구속의 사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구원의 완성에까지 이르도록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되는 사실입니다. 말씀은 구속의 사실뿐 아니라 양들이 먹고 자랄 생명의 꼴로서 또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사상과 뜻을 내가 자꾸 받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예수 님 앞에 구하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신으로 나한테 역사 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확신케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교통이란 중요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어떤 감정적인 감응이나 찔림이나 마음의 떨림이나 이상한 촉감 같은 것들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자기 이성을 무시하고 순전히 감각에 의해서 신을 알려고 하는 사람의 짓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공급되어야 합니다.

 

 

5. 신자의 장성을 위해 공급되는 하나님 말씀

 

성경의 이런 쓰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씀한 곳이 디모데후서3:15-17절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느니라](15절).

 

 

첫째는 “구원”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책인데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믿음이 그에게 들어감으로 지혜가 들어가는 것이지 믿음 없이 읽기만 한다고 해서 구원의 지혜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에 이르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그 지혜를 성경이 주는 것인데, 그것은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은혜의 방도로 성령님이 그에게 역사 하셔서 보여 주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디모데후서 3:16-17절”입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의 장성에 관하여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혹은 교리)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책망만 하지 않고 무엇이 바르다 하고 바른데다가 갖다 놓는다는 말입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또 모든 착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신자가 세상에서 살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텐데 그 행동이 착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나 책망이나 바르게 함이나 의의 교육을 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으로 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심정으로 무엇을 해서는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안 된다는 애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로 난 사람은 새 생명인 까닭에 그 생명이 새사람을 형성하고, 그렇게 형성한 새사람은 곧바로 장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성해 나갈 때에 공급해야 할 것들을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5-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의 믿음에는 덕을 공급하고 또 덕에는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사람이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하나님을 늘 의지하고 살겠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내놓아야 할 덕이 있습니다. 관용이라든지 남에게 친절하게 하는 것, 또 항상 겸손한 것, 남에게 항상 바르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덕이 있어야지 덕 없이 믿음만 가진다는 것은 여느 종교인들처럼 다만 자기 종교를 하는 것입니다. 덕이라고 할 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순진성이라든지 착한 마음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이라도 다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믿음이 온 까닭에 그로 말미암아 더 공급해야 할 독특한 덕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또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믿음이 온 이후에 비로소 현저하게 보아야 할 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그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은 새사람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새사람에게서는 마땅히 여러 가지 덕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먼저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해서 덕행이 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덕행이라는 것은 멀리 가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나타나는 사랑, 희락, 화평, 이것들이 덕행을 하기 위한 자기의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또 오래 참는 것,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항상 자비로운 것, 그 다음에는 양선, 즉 친절이란 것, 또 하나님께 대한 충성, 온유함, 절제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성격으로 나아야 할 것들입니다. 성령님으로만 나올 수 있는 이런 덕들은 믿음이 있은 이후에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까닭에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령님을 믿음으로써 약속하신바 거룩한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확연히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밤낮 다녀도 대부분이 그리스도적인 도덕적 성격이 없는 사람들로만 형성된 교회라면 교회로서 생명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다른 요소를 아무리 풍부히 가졌다 하더라도 생명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즉 증거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예로 에베소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리의 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밝고 훌륭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첫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맨 처음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보면 그 교회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로 성립되었으니까 우리 주님도 교회라는 말을 써서 보내라 하신 것입니다. 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써서 보내라 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잠깐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5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를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먼저 칭찬을 한 뒤에 그렇지만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데 있습니다. 너희를 책망할 것은 첫사랑을 버렸다는 사실이라고 말씀하시며 “만일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대란 곧 교회를 들고 있는 빛입니다. 너희를 세상에서 빛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둘 데를 잃어버렸다. 그러고도 네가 무슨 빛이냐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흑암의 시대, 배교의 시대로서 우리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은 때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 역사의 종국에 가까운 시대라 말입니다. 그리로 갈수록 교회에서는 더욱 배교가 일어나고 세상에서는 대환난이 일어나서 큰 소란과 시끄러움이 사방에 가득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확호하게 서서 끝까지 거룩한 교회로 서려면 분명히 생명의 빛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빛을 확연히 나타내려면 그저 교회로서 몇 가지 요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촛대를 환히 들고 있되 믿음에 덕,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믿음에 덕을 더할 뿐 아니라 덕에 또한 지식을 더할 수 있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사상성과 지식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대한 깊은 지식이 되어야 한다.

 

 

지식 다음에는 절제를 말씀하였는데 더 알면 알수록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스스로 생활에서 조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절제라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납니다.

 

첫째는 “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마음을 슬프게 써서 세상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한다면 그런 이는 무절제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정이 무절제한 경우가 많아서 이것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며 사방으로 좋아하기 쉬운데,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세상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자 혹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것은 완전히 반대의 위치에 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중간에 서서 이쪽저쪽 다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절제라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주신 바 은혜를 잘 간직해 가지고 주께서 무엇을 요구하실 때 충분히 그것을 잘 감당해 나가는 신앙의 힘, 즉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저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 신앙의 힘이 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늘 준비성이 있어서 주께서 부르시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힘을 아무 데나 함부로 쓰지 않았냐 합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디모데후서 2:3저에서 말씀했습니다. 전장에서 절제를 하지 않고 아무렇게 라도 헤프게 써 버리면 나중에 기진맥진해서 제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절제하되 힘을 기를 때 기르고 저축할 때 저축해 가면서 우리 앞의 달려갈 길을 힘써 바로 달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선한 싸움에는 절제와 함께 인내, 즉 오래 참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늘 오래 참는다는 것입니다. 또 인내하는 경건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늘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인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과 교통을 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에다가 형제우애를, 형제의 우애에는 사랑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넉넉히 갖추어지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아는 데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또한 열매가 없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지 못한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어버린 자입니다. 한번 깨끗하게 해서 바르게 세워 주셨는데도 항상 공리적인 종교 하나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 옛날에 받은 은혜조차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복음으로 사역해야 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히 공급되는 데 있어서 첫째의 요소는 구원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로마서 1:16-17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복음으로 작용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이 공급될 때에는 먼저 복음의 사실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복음 사실을 흐지부지 대하면서 사회 개량 운동이라든지 민족 문제나 정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완전히 역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사실상 배교의 교회가 잘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실은 어디로 가고 소위 사회복음주의라는 것을 앞세웁니다. 복음이란 말을 쓰긴 하지만 사회 개량 운동이나 민권 운동, 인종차별 철폐 운동 같은 정치적인 면에다 주력을 한다. 진정한 복음은 없는 것이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내린 바 거룩한 기쁨소식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란 단순한 모범의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려고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속죄라는 말은 죄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속죄라는 관문을 통해서 예수님께 안 들어가고 엉뚱한 다른 문을 소개하는 것이 현재의 많은 현상이다. 세상이 허무하니까 예수 믿으시오 한다든지 하나님께서 기묘한 행복을 준비하시고 계시니까 예수 믿고 그것을 받으시오 합니다. 요새 어떤 그룹들은 성경주의, 복음주의라는 말을 쓰면서 그렇게 고쳐 가지고 말을 합니다.

 

 

속죄의 죽음이라고 할 때 누구의 죄를 속하느냐 하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죄입니다. 세상이 죄악 된 곳이라고 개괄적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면서 개인의 죄를 지적하기를 회피하고 나가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 개인의 죄를 속하시려고 돌아가셨다고 할 때 당연히 전제되는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죄책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일호도 용서 없이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받으시지 하나님이 그냥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라는 것은 어떤 정도냐 하면 내가 영원히 죽고 또 죽어도 다할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대신 받아 주셨는데 이것이 속죄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속죄의 죽음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면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으로 나의 죄책이 면제됐으니까 나는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느냐, 나는 이제 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보통, 관념으로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기지만 자기의 생활 감정을 살펴보면 사실상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크게 안 느끼고 삽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악폐입니다.

 

 

밤에 집에 들어가서 고유한 가운데 이 날 하루도 내가 사람들을 대하며 말한 것이나 행동한 것, 또 생활상 어떤 감정을 품었던가를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잘못이 있고 결핍이 있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였던가? 회개를 해야 할 문제도 있지 않았던가 하는 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회개한다고 할 때도 부흥회 때 몇 사람이 앉아 표면적인 몇 가지 시시한 문제만 가지고 밤낮 야단을 냅니다. 사실상, 성격상 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인간성의 결핍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아니면 남는 것은 결국 자기입니다. 자기라 할 것 같으면 좋고 나쁜 것이 다 뒤섞여 있습니다. 그 나쁜 것들은 다 죄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책을 짊어질 것들입니다. 여하튼 죄책이 있는 나로서는 하루에 열 번이라도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반성을 하고 자기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문제를 다른 데 가서 찾지 않고 먼저 자기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명확하게 취하는 생활을 하지 않고, 그 이외의 어떤 종교적인 요소를 그 위에다 자꾸 건설하려고 해서 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항상 교회적으로 자기의 죄에 대하여 반성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반성하는 일은 어떤 특별한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가만히 늘 생각합시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 개인이 자기 집에서 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이 예배당에 가서 예배 한번 드리고 무엇을 다 했다는 정도의 신앙생활이라면 그것은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바르게 사는 태도가 아닙니다.

 

 

{경건}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열의를 가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였는데 그런 열심은 어디로 가고, 이 세상에서 돈 벌고 사는 데만 굉장한 열을 낸다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죄를 반성하고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가지고 산다는 데에는 그렇게 열을 안 내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의 물결이 얼마나 강하고 그 영향이 커서 우리를 휩쓸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7. 교회로서 하나님 앞에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함.

 

우리가 교회로서도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우리 주위에 자꾸 몰려옵니다. 특별히 우리는 그런 점에 대하여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8.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격상 결합들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어야 함

 

먼저 시작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상 결합들에 대해서 각각 반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특별한 죄를 밖에 가서 범하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죄를 범해서 교회에서 책벌을 해야만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격상 죄악들, 사람과의 관계, 교회 안에서 그 동안의 자신의 처사, 자기가 생각한 것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면서 하던 일들을 살필 때 무엇이 잘못됐는지 생각할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로 생각하는 것이 곧 교회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정상적으로 사역하게 하는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막고 저항하고 나간다면 타락할 길밖에 달리 없는 것입니다.

 

 

9. 교회로서 하나님 말씀이 그 안에서 정상적으로 사역하게 할 수 있어야 함.

 

 

10. 거룩한 교회의 참된 자태를 드러내는 길로 바르게 전진해야 함.

 

 

11. 교회가 교회로서 역할은 참된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함.

 

 

출처: 지명교회까페

 

출처 :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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