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토기장이와 그 손에 있는 진흙/김홍전 목사
성경: 렘18:1-6절
제목: 토기장이와 그 손에 있는 진흙
오늘 원단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가운데 잠시도 잊어버려서는 아니 될 것을 잠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잘 아시는 에베소서 2:10 말씀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라.” 여기 ‘만들었다’는 말 뜻은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고 정교하고 치밀하게, 목적에 맞게 가장 효과적으로 만든 ‘하나님의 솜씨’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지었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 여기의 지었다는 말은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함을 받은 우리’라 하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느냐? 선한 일들을 위해서 지으셨다. 선한 일이 무엇인지는 개개인의 경우가 다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 ‘선한 일들’을 위하여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한 일들을 만세 전에 예비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도록 다 배포해 놓으셨다 하는 이야기올시다.
여기서 우리가 자연히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당신이 공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 놓은 작품과의 관계입니다. 물론 그 작품은 우리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단순한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합목적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중요히 보아야 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헌상(獻上)의 예식을 했습니다. 헌상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예식입니다. 우리 자체를, 생명이나 호흡이나 활동이나 가능성까지라도 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 하는 예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확보하는 한편 우리도 하나님의 것답게 은혜를 받고 지키심을 받고 또 사명도 받아서 행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받고 또한 어떤 목적을 위해 정밀하게 지으심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런데 그냥 창조된 게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됐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는데 장성해서 예수를 처음 믿고 나올 수도 있고 어려서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나올 수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라났으면 어떤 획시기적인 변화가 갑자기 왔다는 것을 보통은 생각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신앙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인이 다 돼서 자아의식이 분명했을 때 믿게 된 경우 갑자기 큰 변화와 함께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깨닫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큰 변화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전까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인 까닭에 이방인이었고 또 무지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다른 말로 비교할 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다시 살리셨도다” (엡 2:1) 하는 말씀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란 말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보면 죽은 사람입니다. 아무 반응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 자신이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하시는 방식으로 성삼위의 성신께서 은혜로써 적용하사 새로운 생명을 부어넣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어넣어 주신 그 생명이 곧 영원한 생명인데 그것을 가리켜 쉽게 영생이란 말을 씁니다. 영생(永生)이란 말은 오래오래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쓸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썼을 때에는 분명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생명과 같은 생명, 그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5:11). 그러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되 우리에게 있는 영혼의 기능이 극단적으로 변화되어, 다른 말로 하면 지적인 정적인 의지적인 모든 기능이 극단적으로 변화돼서 하나의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사람이라고 가르쳤고 이와 같은 새사람이 나타나기 이전에 있던 사람을 옛사람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9). 이것이 새로운 창조올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세 전에 경영하신 어떤 좋은 일들이 있어서 그 선한 일을 그가 받아서 의식하고 행해 나아가는 성숙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새 생명은 무엇이며 그 생명의 받은 바 새로운 일은 무엇이냐 할 때 토기장이와 그 손에 있는 진흙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예레미야서뿐 아니라 토기장이 이야기가 이사야 45:9에도 나옵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패역한 백성 이스라엘은 족히 그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선지자가 타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와 그 손에 있는 진흙의 관계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통치를 받는 백성 사이의 관계를 표상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 가운데에는 나도 들어 있는 것이올시다. 만일 내가 내 생명을 가지고 자행자지(自行自止) 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그것은 마치 토기장이의 진흙이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로마서 9:19-24을 봅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또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것은 그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들 너희가 거기에 대해서 힐문할 까닭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토기장이가 그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은 나를 어떻게 만드시든지 그것은 상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니까 우리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볼 때 내가 우수한 것은 그만두고 여러 가지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어디다가 쓰시려고 세상에 내어 놓으셨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의 대권을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의 권리에 대한 내용으로는 욥기 9:12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가 있으랴.”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도로 취해 가신다고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으며, 대체 그것을 누가 ‘왜 그러십니까?’ 하고 항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아무런 위치도 보람도 없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보람 없는 한 인간으로서 자처해야지 존대한 자존심을 가지고 항상 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도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 앞에서 사는 방식이 겸허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실로 자기가 무엇인지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쓰일 만한 것이 못 되는 결핍 많은 자임을 느끼고 그렇게 느낀 대로 자기 생활을 늘 조절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스스로 높은 체하고 뭣이 있는 체하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했습니다(약 4:6). “진실로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하나님의 절대권을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보라 - 혹은 행하시는 일을 보라 -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나님께서 한 번 구부려 놓은 것을 누가 무슨 능력으로 바로 잡겠다고 하느냐?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계의 역사 가운데 나오는 말, 소위 절대주의 체제에 나오는 ‘절대’라는 용어와는 다른 절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까닭에 우리를 없는 데서 있게 하셨지만 다시 있는 데서 없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권은 진정 말 그대로 절대(絶對)입니다. 그러한 절대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혐오와 진노의 뜻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심과 관용의 은혜를 베풀고 나가시는 까닭에 하나님이 주시는 바 그 거룩한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경영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늘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우리가 새로운 각오를 또 하지만 그것은 해마다 하는 일들이고 또 해 보아도 별것이 안 나옵니다. 우리 자신이 변동되기 전에는 무엇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늘 선의를 가지고 계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감사히 여기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고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을 때에 중요한 것은 ‘우리 각각에게 하나님께서 배포하신 바 거룩한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먼저 묻는 일입니다. 그 거룩한 대답을 생활 가운데에서 혹은 자기 환경의 변동에서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각의 추리 가운데에서 어떤 상을 얻어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로 나아가야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행자지의 길을 걸어 왔다 하는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 간곡히 죄를 자복하고 ‘주께서 내게 주신 바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는 동안이라도 여전히 자기에게 주신 현실의 일들이 있는 경우 그 일들을 진실되이 충성스럽게 해 나가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들 자신이 잘못 선택한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므로 이끄신 결과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처한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언제든지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현실에 충실하면서 하나님께서 별달리 뜻을 가지고 계시면 그것을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되 만일 주께서 별다른 길을 보여 주시면 두말없이 순종하겠다는 확실한 각오를 가지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