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1)/김홍전 목사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제1강 보혜사인 성신
전체 8강으로 되어 있는 김박사님의 이 말씀은 지금부터 약27년전(1982년 3/7일-4/25일) 주일에 강설된 것들이다. 본 저자는 '성령'이라는 말 대신 1930년 이전에 한국에서 신,구약을 통하여 널리 쓰이던 '성신'이라는 성호를 사용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격을 구체적으로 표시할 때는 신이라는 말이 영이라는 말보다는 더 가까운 말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신으로서 하시는 영적인 역사에 중점을 두지 않고 삼위의 한 위로서의 인격적인 존재를 중요시하기에 그렇게 썼다. 그러면서 어떻게 부르든 게의치 않겠다고 이야기 한다.
본문:요 16:7-15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제 1 강 보혜사인 성신
구원의 신앙
중생하여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는 새사람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새 사람의 생활이란 것이 도덕적인 면에서 완전 무결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유치한 것이나 흠있는 것이나 불완전한 것이나 혹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금방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갑자가 무능한 사람이 유능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불신자의 생활과 비교할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점이 있다. 신자에게는 어떤 목표를 향해서 자꾸 성장해 가는 모습이 있다. 그의 아는 것이나 그의 정적인 또 의지적인 생활이 점점 성숙을 향해서 향상되어 나아가는 생활의 모습이 있다.
첫째로. 신자와 불신자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신자의 장성의 생활은 불신자가 자기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든지 인격적인 성숙울 향햐여 가는 성장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른 점들에 의해서 성장의 차이점이 자꾸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 성장의 기초에는 먼저 전적으로 주님께 자기를 전부 드린다는 사실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만약 예수님을 믿고 나온 사람이 주님께 자기를 전부 드린다는 정신이 없을 때는 그것이 그에게 구원의 신앙의 도리로서는 의미가 없다.
구원의 신앙이란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자기 일생의 길을 주께 다 맡기고서 지금까지 자기가 구상하고 계획하고 경영하던 것을 일단 다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구원의 신앙의 그 출발점은 자기를 완전히 드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와서도 자기를 드리기를 꺼린다면 그것은 자기의 공리적인 요구에 무엇을 덧붙이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믿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새 생명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환연히(의혹이 풀리어 가뭇없다)-(가뭇:보이던 것이 전연 보이지 않아 찾을 곳이 감감하다) 깨어난 모습이 아니다. 여기에서 세상의 종교와 기독교가 분명히 구별된다. 예수를 믿고도 아직 자기를 주님 앞에 전부 드렸다는 정신과 자시를 갖기를 꺼리고 적당히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 그렇지 아니하면 좀더 지적인 것이나 좀더 앞선 어떤 것을 얻어 보려고 하는 자기의 이익에 대한 고려가 늘 앞서 나간다면 그것은 공리종교이지 참된 기독교는 아니다.
우리는 믿고 난 후에 주께서 건지지 아니하셨다면 다 죽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인간의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상황이 곧 죽음이다. 죽음에 있는 자의 상태란 빛이 세상에 임하여도 어두움, 죄, 허물, 들을 좋아하고 허물과 죄 속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행보를 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죽은 상태라고 말씀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1) 자연히 변화된 영혼의 기능을 통해서 나타난다 2) 전적 의지 심정을 갖게 된다. 3) 신자는 먼저 자기 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 앞에 다 드리고 나아가는 생활을 한다.
주께 전부 드림
예배를 드림에 있어 우리의 영혼이 찬양하는 심정으로 엎드려 절을 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를 바로 알아서 결례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 보고 달려와서 그 앞에 부복하고 엎드려 절하고 하는 태도를 취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속속들이 알 길이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 전체를 땅에 내던지고 엎드려 절해야 할 분이라는 사실은 분별해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적어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모셔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경의를 드리는데 필수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전부를 다 하나님께 드린 다는 것이 필수적이다. 나의 전부를 드리지 않고서 내가 무엇을 스스로 주장하고 나도 하나의 주체성 있는 자라고, 대등한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잘못된 태도인가 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전부를 드린다는 표현이 헌상이다. 구체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지금은 화폐를 가지고 대표해서 드리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방 사람과 우리와의 차이가 이방인들은 이것 잡수시고 새 덕을 많이 입혀 주소서 하는 태도로 하는 것이다. 교환조건, 아니면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다 주님께 속했다.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는 이지러뜨리고 더럽게 하고 잘못했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 그래도 이걸 드린다"하는 정신으로 드리는 것이다. 헌상할 때마다 하는 이야기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는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궁전에 나같이 남루한 것을 갖다 놓을 데가 있느냐 하면 놓을 데가 없는 것이다. 누더기 같은 우리를 드린다고 뭐 대단한 것으로 받아서 거추장스럽게 어디에 두시겠는가?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는 것이 중요한데 드렸다는 것은 우리의 관념에서 '자기'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떼라는 것이다. 구약의 소제는 자기가 늘 먹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갖다가 드리는 것인데 이것은 매일의 생활 행보까지라도 다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전체를 드리는 이 헌신이란 몸뚱이만 드린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는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기독교를 이용해서 기독교 안에서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것을 포기하고서 이제는 주님 앞에 다 드려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고 드리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길에 대한 새로운 자각
둘째로, 신자가 성장해 나갈 대 안 믿는 사람의 성장과 근본적으로 뚜렷하게 다른 모습은 1) 신자는 만사에 자기의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깨달아 안다는 점이다. 전적 무능력이란 처음에 아담이 범죄를 한 이래로 사람은 그 죄에서 돌아설 능력이 전적으로 상실됐다는 거룩한 교리이다. 전적인 부패에서 회복할 능력이 없는 까닭에 믿은 다음에는 2) 자기는 의지할 아무 근거도 없고 자기를 의지해서 이룰 것이 없는 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 신앙의 의지적인 요소가 생겨난다.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행보를 다스리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일으켜 주시기 위해서 거룩한 법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곧 성신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마음도 환기시키시고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한다 할 때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3) 인생에 대한 생각이 변하여서 과거와 같이 자기를 인정하는 어떤 것도 없어지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 안에서 비로소 자기는 새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옛사람은 나에게서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그래서 자기의 능력을 부인할 뿐 아니라 자기라는 본래의 가치까지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인생의 길을 갈 때에 어디로 갈 것인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죄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목적은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거룩히 정해 주신 목적과 길이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고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 생활의 저변에 근본적으로 늘 깔려 있는 중요한 사상이다.
하나님이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지 않으시고 아주 정밀하게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가장 효과 있게 만들어 놓으셨다. 에베소서 2:10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솜씨를 보일만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창조하셨다.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니까 새 피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창조라는 사실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간다는 것이 창조의 요소이다.
창세기 1장에 '창조'라는 말이 세 번 나오는데 흙으로 빚어 놓았다는 말이 창조를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생령이 되게 했다는 것이 창조한다는 말뜻이다. 그런데 여기 예베소서 2:10절에서도 새로 창조함을 받은 것이라고 해서 '새로운 피조물' 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합목적적으로 쓰시려고 새로 창조하셨다. 이렇게 선한 일을 위해서 새로 피조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예비하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다른 데로 비꾸러져서 제 마음대로 이상을 세우지 않고 새로 창조된 그 가운데서 반듯이 살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그 목적을 향하여 합목적적으로 피조된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도 자명하다. 목적이 있으므로 길이 거기에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다.
시편 1편을 보면 거기에 악인과 의인을 대립시켜 놓고 있다. 악인에게는 자기의 이론과 사상이 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자의 의논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그들에게 의논이 있고 사상이 있고 주장이 있고 인생론이 있다. 그 다음에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죄인들이 가는 길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길이란 이것이다 하고 다들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다. 어떤 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오만한 자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 참으로 도달해야 할 자리요 이것이 인생이 올라가야 할 목표지 이다"하고 확연히 결정하고 나갈 때는 그것이야말로 오만한 정신과 이론이 되는 것이다. 아직도 암중모색(어두움중 더듬어 찾음)을 한다면 그것은 방황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기다, 하고 단정하면 그 독단은 오만인 것이다.그런 오만한 자의 자리도 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의인에게 주시는 거룩한 빛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악인의 인생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주장에 대립하여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였고, 그 다음에 5절ㅇ르 보면 "의인의 회"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나중에는 교회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의인의 회'란 큰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 같이 호흡하고 나가는 그런 자리이다. 그리고 또 6절ㅇ르 보면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하여 하나님이 인정하는 길이 있고 망하는 악인의 길이 있다. 이렇게 시편 1편에서는 의인들 곧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들이 무엇을 흡수해서 자기의 영혼과 정신의 양식이 되게 하고 어떠한 길에 서 있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세계를 향해서 가며 어디에 안착하여 하나님을 공경할 것인가를 분명히 가르쳤다.
성신께서 주장하시는 생활
여호와의 법을 알아 가고 의인의 길에 서서 행하고 또 의인의 회중의 일원으로서 생활해 나가는 것은 확대해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생활인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힘 주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러가지 은혜를 우리에게 직접 내리시고 주장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분은 성신이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크신 작정하에서 거룩한 경륜을 베풀어 놓으셨고, 아드님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속죄의 일을 이루셨는데, 그 모든 것이 궁극적 우리에게 은혜로 적용되려고 할 때에는 성신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신께서 모든 필요한 은혜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우리는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들 자신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이나 도덕관이 근본적으로 변경된 위치에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의 완성이라는 과거의 윤리관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전체가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데에 책임을 지는 자가 되는 것이 첫째 임무이다. 따라서 절대로 개인이 도덕적으로 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무엇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 깊게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윤리관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어 그와 신비한 연합을 이룬다는 것이 저변에 깔려서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시민으로 직업에 종사하고 사는 생활은 단지 이 세상에서 육신이 살기 위한 방편으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그 사실 자체 즉 장사하는 일이면 장사하는 일 자체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증거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 물론 장사하는 것이 직접 교회의 일은 아니지만 어떤 한 신자가 구속을 받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성신을 의지하여 살면서 장사를 할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된다. 그러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장살르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된다. 먹고 기운을 얻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라는 말뿐 아니라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어야겠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신자 생활의 어떤 면이든지 율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다. 만약 생활과 종교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면 주일날만 기독교인이고 다른 날은 안 믿는 사람과 크게 차이 날 것이 없는 것이다. 모든 생활에서 현저한 기독교적인 사상과 원칙이 움직이는 일이 없이 살아간다면 예수 믿는다는 본의를 태반이나 상실하는 것이다. 신자생활의 요체는 매일매일 생활 전체에 있어서 그 사상이나 인생의 행보나 삶의 목적이나 무엇이든지 전부를 예수 믿는 도리가 지배하고 주장하여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이루심을 받는 것이 신자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이런 생활이 없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 기독교 종교를 만들어 낼는지는 몰라도 그로 말미암아서 허다히 많은 부분이 은폐되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신 거꾸로 그리스도를 은폐하는 일을 하기 쉽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려면 교인들이 나가서 매일매일 생활하는 데에서 하나님 나라적인 윤리관, 도덕관, 셰게관, 사관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을 떠나서 교회 안에서 열심히 종교적인 행사에만 치중한다면 교회는 바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신약교회 초기에는 모여서 무슨 행사를 어떻게 하는 데에 주력한 것이 아니라 시민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시민 생활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생활만이 아니라 저 영광의 목적지를 향해서 매일매일 전진해 나가는 우리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영화되어서 마침내 영원히 거룩한 교회로서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하고 성신님께서 주장하시는 생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심히 중요하다.
보혜사이신 성신
성신은 예수님의 영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신을 보혜사라고 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있을 때에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계실 때에 육신의 생활까지 어찌할 바를 늘 가르쳐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다 경험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분이 이제 떠나가실 것이라며 고유를 하시니까 걱정이 많았다. 그렇게 걱정이 많으니까 요 14장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고 근심하지 말 것을 차례차례 말씀해 나가시면서 16장에서 와서 보혜사를 주시듯이 그 은혜를 보호해 주실 분이시므로 보혜사라는 말로 번역한 것 같다. 이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예수님이 하실 일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시되 훨씬 광범위하게 훨씬 미묘한 데까지 하실 것이다. 육신을 입고 활동하시지 않고 온전히 신으로 하시니까 사람의 속에까지 다 미쳐서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보혜사"라는 말도 쓰셨다(요 14:16). 그 말은 예수님 당신이 은혜를 지키시는 분이지만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올 때에 그 많은 사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훨씬 능력있게 다 돌아보실 그 보혜사가 그들에게로 오실 것이요 그분은 모든 임무를 남김없이 행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떠나지 아니하고 계실 때에는 돌아보시는 일이 열두 사람 혹은 늘 근접해 있는 제자들에게만 국한되겠지만 떠나가신 다음에는 육신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무소불능의 크신 능력과 무소부재하신 그의 지혜를 가지고 필요한 때에 모든 필요를 충당해 주신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동안에 그 제자들의 은혜를 보호해 주신 것과 같이 성신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또 주장해 주시고 힘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육신으로 계신 그분이 간 곳을 가는 것이 따라가는 것이 되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주여,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한다면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력히 나팔 소리같이 잘 들리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예수님을 대신해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시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보호하시고 힘 주시는 분인 보혜사 성신께서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우리 안에 한번 와 계신 성신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한다고 해서 다시 떠나가시는 일이 없다. 이것이 은혜의 시대에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신 도리이다. 구약에서 다윗이 "주여 나에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시 51:11) 하고 기도했을 때에는 인격자이신 성신님의 내재의 문제를 논한 것이 아니다. "성신의 능력으로 감회되어 있는 사실을 나에게서 빼앗아 가시면 아주 무능하고 저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게 무슨 은사가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공경하고 이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나를 이 자리에 두신 이상 그 일을 할 수 있게 성신을 거두지 맙소서"하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함부로 신약에 붙여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신께서 한번 들어오신 다음에는 다시 떠나시는 법이 없고 오직 근심하시는 일이 있다. "성신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는 말씀대로 우리가 성신을 소멸하면 내주는 하실지라도 근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고 했다. 성신님께서 감화하시사 "자, 이리 가자"하고 유기적인 역사를 하실 때에는 강제로 밀고 나가는 법이 없다. 성신께서 나 자신의 의식 속에 불어넣어 주셔서 내가 가야 할 당위와 신성한 의무를 느끼면서도, 아니 아무래도 그렇게 되면 내가 굉장히 손해를 보고 내 일생의 꿈이 다 무너지겠는데, 하고서 안간다면 성신을 소멸하는 것이 된다. 성신께서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목표를 향해서 인도하시려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뿌리치고, 아니, 내게는 손해가 되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배우기로 하겠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