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2)/김홍전 목사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제2강 성신의 내주
본문 갈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중생의 증거인 그리스도적 품성
중생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서 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될 때에 그는 그리스도적 품성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적 사명을 각성하고 사는 생활을 지행하고 나간다. 그 결과 인간의 여러 가지 불완전과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그의 인격이 차츰차츰 고귀하게 변화해 간다. 이런 점이 믿지 않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만약 그가 매일매일 변화하고 성장해서 더 나은 인간성이 발휘되는 모습을 보이지 아니한다면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아무 증거도 없는 것이다. 기도하고 찬송부르고 예배당에 다니는 이런 종교적인 행사로는 자기를 증명할 수 없다. 그를 비기독교인이라고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새 생명이 정상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증명할 도리가 없다. 증명을 하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예수 믿었느니라 할 때에는 스스로 속은 일 많은데 이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다. 일부러 나를 봐 달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자기 스스로는 증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항상 일정한 표준을 세워서 생활을 단속하라고 가르쳐 왔는데 그 첫째 큰 원칙은 자연스러워서 거짓으로 꾸미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유스럽게 하지 율법이 강제하는 그 강제 아래 구속을 받아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에 대한 자유는 아니다. 그러나 법을 무시하는 것은 무법이요 짓밟는 것은 범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항상 신령하라고 하였다.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하게 가르친 것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얘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끄집어내어 이렇디 저렇게 하고 취모멱자(털을 입으로 불어가며 털 속에 있는 작은 흉터를 찾아 낸다는 뜻:남의 약점을 악착같이 찾아 내려는 야박하고 가혹한 행동) 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널리 펴져 있는 큰 폐단인데 교회가 교회로서 거룩한 자태를 가지려면 두세 사람이 모이면 항상 어린아이와 같이 남의 흉을 보는 폐단에서 먼저 탈피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비천한 행습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우리 교회가 생활이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뭔가 다른 면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으면서 특별하게 예수를 믿겠다 한다면 뭐가 특별한가" 하는 말씀을 때때로 드린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중생한 사람의 생활이라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 멀리 있는 굉장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주변의 생활 습관에서 드러나는 시시하고 너절하고 비천한 인간성부터 고쳐 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것은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왔다갔다 한다고 저절로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처럼 자기가 각고면려(몸과 마음을 괴롭게 해서 힘씀)하고 노력해서 수신을 하라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다. 스스로 반성을 해서 의식적으로 여기에 나의 큰 잘못이 있구나 하고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성신을 의지해서 그가 이끄시는 대로 자꾸 따라가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드러내개 되는 것이다.
성신의 열매
아상(잘못 깨닫는 것에 집착하여 참다운 나라고 생각하는일)이라는 문제는 각각 자기의 문제이다. 가장 심오한 자기의 문제이다. 예컨대 무엇을 잘 해 보려고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내가 드러나는가? 나는 다른 사람 보기에 못된 인간성을 툭하니 발휘하는 사람은 아닌가? 혹은 나는 얼마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이런 것들을 돌아봐야 한다. 비록 어떤 이가 기독교 교리에 관한 것을 도도히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의 성장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깨달을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말씀을 배우는 것이 다른 과학을 하는 것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다른 과학은 인간성은 못됐을지라도 지적 기능이 우수하면 잘 기억하고 외워서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거룩한 도리를 깨달으려면 그 사람이 성신님의 조명을 받아야 하고 성신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의 품성에서 자연히 성신의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갈 5:22-23절을 보면 "오직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해서 "성신의 열매"라는 말로 아홉 가지 속성을 표시했다. 성신의 열매라는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한 성신의 열매에는 이런 아홉 가지의 속성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있으되 희락이 없다 하는 법은 없다. 마치 사과라는 과일에 어떤 성분은 있는데 어떤 성분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과가 반드시 구유해야 할 성분이라면 그것이 있어야 사과이다. 이와같이 그 사람이 성신의 주장하는 바가 되면 우선적으로 그의 품성에 그 사실이 나타나게 된다. 품성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성격이라는 말인데 거기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즉 신령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늘 기도만 하고 신비한 세계에서 사는 생활이 신령한 생활이 아니라 성신께서 우리 마음을 자연스럽게 주장하심으로 먼저 우리 인간성이 조화 있게 그리스도적인 덕으로 바뀌어 나가는 생활이 신령한 생활이다.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은 춘원 이광수의 책에서 말한 '사랑하기 공부'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을 하려면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꾹 참고 될 수 있는 대로 그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하면서 자기 할 일을 한다는 것인데 인도주의자라면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생각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신께서 열매를 내게 하실 때에 사랑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희락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시며 또 화평이라는 열매는 그 다음날 맺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조화 있게 하나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신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는 말씀을 보면 이런 열매를 한꺼번에 언급하고 있다. 의란 바른 것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 즉 자기의 당위를 뜻한다. 그 의가 있고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했다. 먼저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 다음에 인내, 자비, 양선과 같은 대외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먼저 성신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어야 그것이 대외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래 참는 것은 그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고 일을 맡았으면 오래 참아 가면서 버티어 나가는 것도 포함된다. 양선이란 인간 관계에서 남 보기에 거세고 따지기만 하고 억세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부드럽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친절이라는 말과 대단히 가까운 말이다. 그 다음에 온유란, 사람이 부드럽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줏대도 없이 흐물흐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특별히 하나님이 무슨 명령을 하실 때 그 명령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고 잘 따라간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 대한 덕도 있고 사람에 대한 덕도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께만 대한 것이다 저것은 사람에게만 대한 것이다. 또 어느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하고 엄격하게 나누기 어렵다. 그렇지만 어떤 덕은 대외적으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그러려면 그러한 덕이 먼저 자기 안에 확연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 즉 인간의 도덕적 성격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도덕적인 성격은 사람을 대해서든지 하나님께 대해서든지 자기 자신이 홀로 고요히 생각하든지 이모저모로 드러나는 것이다. 가령 처음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덕도 반드시 자기 혼자만의 얘기는 아니다. 대상이 있는 것이고 그 대상의 첫째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희락이라는 것도 주님 앞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마음에 기쁨을 얻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덮어놓고 히죽히죽 웃으라는 것이 아니다. 화평은 히브리 말로 살롬이다. 그것은 헬라어의 평안이라는 말뜻과는 다르다. 하나님 앞에서 평안이란 끝없이 자꾸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번영이라는 말로도 쓴다. 즉 하나님 앞에서 향상해 나아갈 때에 가지는 안정을 의미한다. 샬롬이란 충만한 가운데 목표를 향해서 자꾸 나아갈 때 얻는 그런 평안이다.
그리고 자비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바른 동정, 불쌍한 사람의 불쌍한 정형을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같이 생각하고 적어도 자기와 관계 있는 일과 같이 생각할 때 갖게 되는 측은한 심정이다. 또 거기에 대해서 나도 무엇을 좀 해야겠다는 긍휼이라는 것이 있다. 산상보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도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고 가르치셨는데 그 긍휼이 거기에 있다. 양선은 친절이라고 했고 충성이란 하나님 앞에 맡은 것을 끝까지 잘 봉사해 나가는 것이며, 온유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제는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좋은 일이라면 덮어놓고 돌아다니면서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하되 절제 있게 하라는 것이다. 자기 에너지나 자기의 모든 기능 즉 시간과 정력과 자기 생활을 항상 잘 저축해 두고 보존해 두었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에 적응하게 쓰도록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절제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특별히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여 거의 독점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된 곳에서는 자본의 위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얼마든지 부릴 때,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노동을 대가로 하고 취직을 해서 일을 하느라고 그만큼 많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일주일의 제일 좋은 시간은 거기서 보내게 되고 자기가 좀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쓸 수가 없다. 이런 일종의 필요악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해야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절제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절제라는 것을 생각해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나아가 고귀한 인간성을 품고 산다는 것이 메마른 사회에서 그냥 사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생활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이다. 그런 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러한 덕을 쓴다면 고귀한 일이다.
여러분의 생활을 전부 주님께 다 바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의미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사람이 가게에 앉아서 장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일이 되려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는 의미를 자기가 깨닫고 거기에 맞춰서 그렇게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면에 하나님의 통치대권이 늘 행사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러한 성신의 열매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것인데 그 열매를 우리가 맺고 살아가려면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히 역사하셔야 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큰 사실이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리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도 있다. 가게에 앉아서 장사를 하든지 혹은 사무실에 앉아서 사무를 보든지 혹은 밭에 나가서 땅을 파고 논갈이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가게에 앉아서 장사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길이 있고 내가 기차를 타고 갈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갈 길이 있다. 길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 아무 방법도 없고 어찌할 바도 모르른데 그렇게 하라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세속의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은 내가 것이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일은 성신께서 내 안에서 하셔야 하는 일이라고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고 먼저 가르쳤다. 어떤 소원을 내가 품지만 하나님이 그 소원을 품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쁨을 거두시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행하게 하신다'는 말은 그에게 능력을 공급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요새 흔히 쓰는 에너지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에네르게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 '행하신다'는 말이 꼭 그 말이다. 에너지를 공급하셔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네 맘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그 뜻을 비춰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갖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로 행하게 하셨다 하는 말뜻이다.
반면에 안 믿는 사람,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완고하게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 속에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가 있다고 엡 2:2에 가르쳤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신이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역사한다'는 말도 똑같이 에네르게오라는 말을 썼다. 에너지를 공급해서 그 불순종의 자식들 속에서 일을 하게 한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에너지를 주시고 하나님이 기쁘신 뜻을 보여 주시고 소원을 갖게 하셔서 가는 것이므로 그 점에서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제 길을 가는 사람들과 대조된다.
그렇다고 순종치 않는 사람이 꼭 안 믿는 사람만을 의미하는지는 의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가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소위 자기의 이상을 좇는 사람이 많이 있다. 특별히 청년 시기에 무엇이든지 장래 할 만한 것이 있음직한 그 때에 자기를 내세워서 자기의 행복 추구를 위해서 즉 자기 이상의 만족을 위해서, 그것이 정신적인 가치이든 물질적인 가치든지 추구하고 나아가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지금 에너지를 공급하여 자꾸 그 일을 하도록 밀고 나가는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머리 되는 자이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시고 소원을 주시고 그리고 그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신다는 이 도리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불순종의 아들인지 순종의 아들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깨우쳐 주시고 그와 같이 살게 하시려고 돌아보아 주셨다. 그리고 땅에서 떠나가신 다음에는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요 16:7-8)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경영하셨고 준비하셔서 다 만들어 놓으신 그 은혜를 우리 것이 되게 하시려고 성신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도리를 잘 알아야 한다.
성신의 내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믿는 사람다운 생활을 해 나가려면 성신께서 그 안에 계셔서 그를 주장하셔야만 한다. 그러지 아니할 때는 옛 사람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신의 내주, 성신의 가르치심, 성신의 인도, 성신의 증거 혹은 성신 충만의 여러 가지 역사를 절대로 기이한 종교 현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가장 정상적인 신자 생활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신의 문제에 대해서 무슨 제2의 은혜, 제3의 은혜 하면서 딴소리를 자꾸 하는데 이런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비치하시고 받게 하시는 은혜를 제 맘대로 나누어 가지고서 차별을 만드는 잘못된 짓이다.
우리는 먼저 성신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다 하는 사실을 늘 주의해야 한다. 와 계신 성신은 얼마 동안 계시다가 나가시는 법이 없다. 요즈음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그에게서 성신 떠났다"하는 소리를 많이 하고 다녔다. 어떤 사람이 성신의 은혜가 충만해 가지고 성신을 받아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했다 하면서 이상한 종교 현상 이야기를 자꾸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해서 죄를 지으니까 성신이 떠났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성신께 대하여 한번도 공부해 보지도 않고 이렇게 중대하고 중요한 도리를 제 마음대로 그릇 가르치고 무시하고 심지어, 믿는 것은 내 힘으로 믿고 성신님은 특별한 종교의 귀족 계급에만 임한다고 하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과 또 신자에게 어떠한 역사를 하시고 특별히 충만하셨을 때의 역사는 어떠하다는 것과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역사를 하시는가에 대해서 잘 보여 준다. 우리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내가 있는 동안은 내가 돌아보지만 내가 간 다음에는 성신님 즉 보혜사가 오셔서 너희를 다 돌아보시고 세상에 대해서도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하실 것이라"고 하셔서 일반 은총의 역사와 특별한 은혜의 역사를 하신다고 가르쳐 주셨다.
먼저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자. 바울 선생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할 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 하리라"(고전 3:1)고 하셨다. 그들을 신령한 자들을 대하듯 할 수가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하듯 한다고 하였다. 즉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한다. "너희에게 성신님이 역사하셔서 충만하게 주장하시는 사실이 있느냐"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2:14에서는 성신과 상관없는 사람, 소위 육의 생명에 속한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말씀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신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보아도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 다음 15절에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도 저를 판단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령하다는 것은 결국은 진리에 의해 바른 표준(크라이테리어)이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도리인지 아닌지 바른길인지 아닌지 잘 분별해 가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살아서 역사해 가는 사람이 신령한 자이다. 그리고 고전 3장에 들어와서 "너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성신이 없다든지 성신이 한번은 들어갔다가 떠났다든지 하는 말을 하시지 않는다. 다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신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다. "성신님이 너히라는 이 거룩한 교회를 성전으로 삼고 계신다"고 했다. 그리고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또한 멸시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고 말씀하신다. 교회가 거룩하니 개인도 그런 의미에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장에 가면 신자가 생활 행동을 어떻게 단정하고 거룩하게 구별되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안 믿는 사람과 같이 방탕하게 마음대로 자기를 주장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절에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신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시면서 이제는 교회 전체보다 그 몸 하나하나를 얘기하신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돌리라는 말이 여기 나온다. 몸으로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 되기도 하고 오욕을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성신을 거르스지 말라
성신님께서 한번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면 다시 떠나시는 일이 없이 영원히 계신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을 대상으로 이러한 거룩한 도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물길으러 온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끊임없이 솟아 나온 물에 대하여 얘기하셨는데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요 7:37-39에서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 보면 예수님이 주실 물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물은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흐른다고 하셨다. 성신께서 사람의 속에 들어가서 마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늘 거기서 신선한 역사를 하실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신이 아직 저희에게 게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신을 한량없이 주셨다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려고 약속하신 성신을 지금 주시려고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보다가 오해해서 "예수님께서는 성신이 없었다" 이렇게 한마디로 단언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부활하시사 승천하신 다음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저희에게 보내시겠다고 몇 번이나 그 보혜사에 관해 약속을 하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몰랐던 까닭에 이 말을 거기다가 써붙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 또 하나의 도리는 우리가 얼마든지 성신을 저항할 수가 있다. 자기 이름으로, 선의 의욕으로, 자기 이상으로 그렇게 하는 일이 많다. 물론 잘못해서 정욕 때문에 죄를 짓고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감화하시고 유기적으로 사역하시는 성신의 감화와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을 집중해서, 이것이 성신께서 나에게 비추시는 도리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당연한 도리이다 하고 깨달아 가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런 가르침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대하고 오히려 종교적인 열정에 휩싸여서 자기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자꾸 밀어 대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망므이 온유하여 언제든지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언제든지 자기의 주장 하나가 마음속에 있다. "아니 종교는 이래야 한다.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열심히 무엇을 해야 한다" 이렇게 무엇이 자꾸 붙어 있다. 그 무엇이 붙어 있고 그것이 종교라는 미명하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성신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자꾸 저해한다. 그래서 "성신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고 하신 것이다.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할 때에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신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고 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크리스챤들도 수다한 사람들이 성신을 거스르고 살아간다. 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종교로 밀고 나간다면 성신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도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육신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상일 수도 있고 좋은 욕망일 수도 있다. 바울 선생이 "내가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하고 말할 때도 에피두미아라는 말을 썼다. 그러니까 이 말이 반드시 나쁜 욕망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위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옛사람에게서 나온 이상 성신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성신께서 중간에서 타협하고 영입해 주는 법은 없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성신의 뜻 같고 하나님의 뜻 같지만 내가 성신님의 조명과 인도를 받아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신을 거스르는 일을 하기에 꼭 적당하다는 것이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