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3)/김홍전 목사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제3강 성신의 일반적인 역사와 특별한 역사
본문: 벧후 3:8-1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성신 하나님의 인격성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는 각각 분명한 특성이 있다. 신약에서는 구약에서보다 훨씬 더 성삼위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나 양상에 대하여 밝히 알 수 있도록 가르치셔서 우리가 그 경영하는 내용을 믿고 의지하게 하신다. 예를 들어 성자 예수님께서 특색 있게 하신 일은 구속의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구속에 필요한 일들을 완성하시고 구속이라는 은혜의 사실을 다 준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성부께서 현저하게 우리에게 보이신 일은 크신 작정하에 창조의 일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성신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성신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개개인이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령한 몸을 성화해 가는 일을 하신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이미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비치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여러 가지 은혜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주셔서 실제로 그런 은헤를 누리고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즉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성신님은 물론 독특한 한 인격, 품위를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아드님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성신님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 특색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성삼위의 도리는 물론 대단히 오묘한 도리이고 깊고 깊어서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고 다 깨달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런 신비한 사실 가운데 성삼위는 세 신이 아니고 한 하나님으로서 각각의 인격적인 활동을 하신다. 우리가 호칭을 할 때에도 각각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드님 되시는 하나님, 성신님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 개혁신학에서는 늘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신께 대해서 가장 먼저 주의해서 생각할 것은 한 세이라든지 한 능력의 작용이라든지, 능력 현상이라든지 어떤 감화라든지 하는 그런 것보다 제일 중요하게 앞서는 것은 한 인격으로서 엄연하게 존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인격적 존재이신 아드님이나 아버님의 현저하심과 가타이 성신님도 한 인격으로서 현저하시다는 것이다.
성신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인격신을 표시할 때는 육에 대립되는 영이라는 용어보다는 다 같이 인격이면서도 사람이라든지 천사와는 대립되는 신이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이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쓰던 예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말로 표시했든지 그 말은 그의 인격을 대표하는 말이지 그의 감화나 그의 능력이나 세력의 작용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신을 의지한다든지 성신님의 인도를 받는다든지 가르침을 받는다든지 심지어 성신을 받았다는 말을 쓸 때라도 그 말이 될 수 있는 대로 삼위 하나님의 한 위가 되시는 성신의 인격적인 존재 사실을 모호하게 하거나 인격적인 존재이신 성신에 배치되는 용법으로 쓰지 않아야 한다. 함부로 "성신 받았다"라는 말을 쓰는데, 만일 어떤 인격신을 받았다는 말로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주의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성신을 받았다는 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독특한 용법을 쓸 때는 그 독특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강조하느라고 쓴 것을 그냥 보편화하고 일반화해서, 성신 받았다 성신 받았다, 하게 되면 무슨 이상한 힘을 받았다든지 어떤 신통력을 얻었다는 정도의 의미로 오해하기 쉽다.
즉 성신님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시는 법이 없다. 은혜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보혜사로서 한번 중생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면서 그 시간에 믿는 자 안에 와 계시면 그 다음부터는 영구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새벽 기도회를 하면서 마치 성신 받지 못한 것과 같이 "성신 받게 하소서" "주의 성신이여, 강림하사" 하고 말하는 일들이 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많이 있던 폐단이다.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각 개인이 확신하고 있다면 계신 성신님께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또 그가 나를 어떻게 하시려고 나 같은은 사람의 속에 와서 계시는지에 대하여 주의해서 깨닫고 그 깨달음에 의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 계시지 않은 양으로, 와 계십소서 한다든지 성신 받아야겠다. 성신 줍소서 하고 이렇게 자꾸 성경의 말뜻을 모르고 원용해서 쓴다면 큰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성신의 일반적인 역사
성신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쌓아 놓으신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절대의 의를 완전히 충당하셔서 구원의 모든 복을 쌓아 놓으셨으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하늘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버린 것은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과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통해 주께 속한 자들을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그리고 쌓아 놓으신 그 공효를 그들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하늘에서 일하고 계신다. 주께서 이와 같은 공효를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일을 하실 때 스시는 거룩한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성신님 즉 다른 보혜사께서 오셔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보존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성신님의 사역을 통해서 오늘날도 우리 안에게 계속적으로 일을 하고 계신다.
성신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그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 즉 구원의 사실에 관한 모든 일에서 은혜를 우리에게 직접 내려주시고 받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고 발전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창조에서도 하나님의 성삼위의 일위로서 관여하셨고 또 이 세상에 있는 만유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 동안 잘 보존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그런 생애를 잘 보낼 수 있도록 이 천지에 있는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베풀어서 보존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진노의 저촉을 빨리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크신 법칙과 경륜하에서 유지하여 주시고 흑암 가운데서 파멸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신다. 이 큰 일이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이다.
이런 성신님의 일반적인 역사가 있으므로 당장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 없어지거나 하나님의 진노로 급격하게 다 불타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비록 악한 사람이 있고 불의가 거기에 창궐한 것 같을지라도 그 사회가 유지된다 말이다. 이렇게 유지하기 위해서 만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법대로, 하나님의 법에 조금치도 어긋남이 없이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막을 것을 막으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적그리스도가 지금 나타나려고 하지만 제때에만 나타나게 막으시는 일도 하시고 또 마귀가 준동(벌레 따위가 꿈적거린다는 뜻으로, 불순한 세력이나 보잘것없는 무리가 법석을 부림을 이르는 말)을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잡아서 휩쓸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일도 성신님께서 하신다. 이것이 이 세상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가 아니면 이 세상은 도저히 그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고로 이런 일반 은혜에 의한 성신의 역사를 가리켜 일반적인 역사라고 한다.하는
그러나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의 최종 목표는 이 세상을 무제한 유지하는 데에 있지 않다. 우리가 현저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곧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의 복리와 보존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성신께서 그 주위에 늘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회가 질서가 있고 또 사람들에게 정의 관념이 있어서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또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고 불쌍한 이를 보면 동정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이 그냥 한 사회를 형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항상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복리와 향상과 결실을 돕기 위해서 선용되고 있다는 것을 늘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이것을 각성한 사람이라면 그 사회에 자유와 복리를 위한 노력이 있고 사람들에게 아직 정의감이 살아 있어서 대부분이 공의를 지지하고 불의 대해서 차탄(탄식하고 한탄함)을 하고 나갈 때에는 성신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의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자꾸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큰 사회가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맹목 속에서 그냥 밀고 나가면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칙에 따라 그 사회를 폐쇄하시며 더는 살기 어렵고 더는 의를 행하기 어렵고 더 이상 하나님을 찬송하기 어려운 사회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나 적색 제국주의의 발굽 아래서 꽉 눌려 사는 사람들이 우리만큼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만큼 자유롭게 성신님의 특별한 은혜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가? 자유롭게 성경을 볼 수 있는가? 자유롭게 성경을 보고 그 뜻을 묵상하고 거기에 따라 생활을 해 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세계의 큰 부분에서 벌써 이와 같은 무서운 검은 구름 혹은 도도한 탁류가 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깨우치지 못하고 한 사회가 악으로만 자꾸 치닫고, 그리고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고 타락하여 불의한 곳으로 자꾸 가되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공리적이고 자기 종교적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동안에는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성신님께서 근심하시고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에 회개하라, 바로 서라" 할 때에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한다. 이 조그만 교회인 우리라도 정신을 차리고 확실히 서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원과 생활 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소돔,고무라가 의인 열 명이 없을 때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을 여러분은 보셨다. 의인 오십명, 사십오 명, 삽십 명, 심지어 나중에는 열 명만 있었다면 망하지 않을 뻔하였다. 사회는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들려서 공중으로 올라가게 되면 더 아낄 것이 없는 까닭에 오늘 말씀과 같이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벧후 3:12)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생활이 항상 경건하고 단정해야지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한없이 자기 공리적인 목적을 위해서 종교를 추구하고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신님의 일반적인 역사에 대하여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신의 특별한 역사
성신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전체 위에서 항상 역사하셔서 보존하시고 또한 지키실 뿐만 아니라 성화시키시고 향상시키시고 결실을 하도록 힘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역사를 하신다. 이것이 성신님의 적극적인 역사이다. 이런 역사는 그리스도의 일과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시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이렇게 성신님과 그리스도의 일이 혼연히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신의 관한 도리는 구약부터 살펴서 공부해 나가야 하겠지만 다만 한가지를 말씀드리자면 구약에 성신에 관한 것 중에 '하나님의 신'이라고 표현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반드시 다 어떤 인격자를 표시한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격자 아닌 다만 세력이나 감화나 그것만을 표현한 말도 아니다. 또 그 속에 어떤 인격자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 인격적인 요소가 들어 있을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제 삼위인 성신의 역사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데도 있다. 하나님의 신이라는 용어가 표상적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표시하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제일 긴밀하게 생명의 힘을 표시하려 할 때에 쓴다.
지금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는 지금 성신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가령 진리의 성신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도 이 세상에 대한 역사의 한 가지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이다. 이것이 일반 역사와 대립해서 특별한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반 역사가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 위에 역사하는 것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재창조된 새로운 생명체들 위에 역사하는 특별한 역사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 못지않게 성신의 일반 역사의 은택 가운데서 늘 살고 있지만 그 위에 더해서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은혜 아래서 늘 살고 있는 것이다.
딛 3:5-7에서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를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아닌 중생의 사실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신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 다음에 지난번에 고전 6:19-29에서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보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신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또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다. 성신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 몸의 움직임 자체로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증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즉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면 우리가 달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못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선하신 것과 아름아운 것들을 드러내게 된다. 교회가 예배의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찬송을 드리게 돼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정신 자체가 찬미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절하며 찬송을 할 때에는 다 아는 찬송이라고 해서 반사적으로 그냥 하고 마음은 딴 곳으로 움직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을 가사와 곡조에 집중시켜 우리 육체의 기능 작용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 물론 선행을 하는 것이나 교회의 일을 위해서 자기 시간을 내고 몸을 내어서 수고를 하는 것도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런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이와 같이 성신님께서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몸으로 친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감화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제 삼위이신 하나님 즉 성신께서 거하시는 것이다.
성신 충만
성신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여러 가지 역사를 하신다. 가령 "인치셨다' 해서 거룩한 교회의 형성에 있어서 확실하게 증거해 주시는 일을 하시고, 세례를 주신다는 사실도 있고, 또한 충만이라는 사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성신 충만과 성신 세례를 뒤섞어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다"(고전 13:13)고 말씀하실 때 그들이 다 성신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 하리라"(고전 3:1-2)고 책망을 하신다.
"성신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 5:18-19). 우리의 의사로 저해되는 일이 없이 성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안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하라는 것인데 이런 역사는 우리 의식을 박탈해 버리고 당신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입신한 사람같이 딴소리를 한든지 갑자기 기상천외한 생각을 한다든지 하는 양상으로 나타는 것이 아니다. 성신께서는 유기적인 역사를 하신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 즉 나의 지적인 작용이나 정의적인 작용에 성신이 함께 작용해서 나타난다. 결국 내가 노력하고 내가 찾고 내가 논리하고 내가 결론을 얻고 내가 행동하고 나아가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아주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성신 충만을 마치 사람의 의식을 박탈해 버리고 무슨 신통력이 들어와서 야단 내는 것같이 생각하고 무슨 입신한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신 충만이란 어떤 특수한 종교 귀족에게만 임하는 독특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성신께서 당신의 의사대로 어떤 사람에게 갑자기 어떤 특별한 능력, 소위 요즈음 말하는 카리스마를 주셔서 일을 하시려고 할 때에는 보통 사람 이상의 어떤 독특한 현상이 드러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충만이라 할 때에는 그런 카리스마가 먼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품성 즉 그의 도덕적인 성격이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이 먼저이다. 또한 성신 충만이란 무식하던 사람이 갑자기 유식해진다든지 모르던 것을 무불통치 한다든지 그렇게 금방 변해서 이상하게 된다는 말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그릇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충만이라는 말은 그릇에 물을 가득히 부었다는 말고 같은 뜻인데 우리의 그릇이 작으면 작은 대로 가득히 차는 것이지 작은 그릇이 갑자기 세 배 네 배를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혜의 분량이 있어서 그만큼 충만하게 되고 성신님의 감화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더욱 자라게 된다. 다섯 살 먹은 사람이 갑자기 한 25세나 된 청년과 같이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성의 연약한 만큼만 감당하는 것이다. 충만하다 해서 갑자기 신통력이 붙고 초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충만한 까닭에 같은 정상적으로 자꾸 먹고 자라나야 한다. 그래서 성신께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르치는 역사를 하신다. 그 다음에는 손을 잡고 인도하시는 역사를 하신다. 또 우리 속에 있는 영을 감화하셔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해 주시고 나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신다. 유기적인 역사인 까닭에 성신님이 간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성신의 간구와 더불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로서 참으로 능력있고 충분한 효과를 내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 안에 충만하시사 찬송을 하게 하고 감사를 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성신님의 역사이다.
성신의 역사를 판별하는 기준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서 배울 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성신의 여러 가지 역사를 어떻게 판별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성신님이 가르치신다고 할 때, 그것이 내 생각인가 성신님의 생각인가 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너희는 성신을 좇아 행하라" 했으니 참으로 성신을 좇아 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성신님이 가시는 자취를 볼 수 있어야 하겠고 성신께서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자, 하실 때에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마음 가운데 우연히, 이리로 가야겠다 저리로 가야겠다 한다든지 혹은 이 버스는 타야겠다. 저 버스는 안 타야겠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성신님의 인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혼자 망상하는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들이 흔히 발생할 수 있다. 성신의 도리에 대해 깊이 생각지 못하면 필연 그러한 이상한 생각으로 유도되기 쉽다. 그러면 과연 성신님의 가르침이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인하고 순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에를 들어서 내 안에서 처음 하시는 역사는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성신의 내주를 어떤 심리적 현상으로 생각해서 지금 당장에 내 안에서 하시는 어떤 이상한 작용 여부로 확인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내 안에 성신님께서 거하시는가의 여부를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신의 내주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들게만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확신하고 살지, 그것이 과연 그런가 하여 의심하고 물러서는 법이 없다. 성경은 성신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고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 선생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신의 전인줄 모르느냐" 하고 두 번이나 말씀했다(고전 3:16, 6:19).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약속이나 명확한 선언에 대해서 의심을 붙이지 않고 믿는 것이 구원받은 자가 가지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신앙이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믿고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실 때에 부활에 대해서 이의를 붙이거나 다른 괴상한 해석을 붙여 가지고서 부활의 사실을 상징화허가나 하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딱 믿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나가는 데는 물론 테두리가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명확하게 약속이라든지 선언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떤 것은 표상적인 표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해 공부해 갈 때 배우게 되겠지만, 교회의 권위와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흘러 내려와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큰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내가 믿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원래 그런 의도로 쓰지 않은 말씀을 오해해서 어디 한 군데 간단히 나왔다는 것을 가지고 성경에 쓰여 있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믿는다면 문제다 말이다. 여기는 "해라'하고 한편에서는 "하지 말라" 하는 식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오경에서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다 드리라고 하였는데 시편 40장에서는 "주께서 번제와 소제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뻐하셨더면 내가 더 드렸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편 여기저기서 우리가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사 1장에서도 댓바람(당장)에 다시는 그런 것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항상 성경의 말씀은 건실한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믿고 받는 것이 안전하다. 건실한 교리의 뒷받침이 없이, 이것이 성경에 쓰여 있는 말이다 하고 곧이곧대로 믿고 그대로 나간다면 종종 모순 가운데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되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적인 보증으로 마땅히 사람이 믿고 받아야 할 도리라고 확인해 놓은 것들을 믿고 나가야 한다. 성신님께서 그런 말씀의 해명을 우리에게 내려주셔서 많은 이설이 있어도 쭈그러짐이나 흠이 없이 전승해 내려왔으므로 그것에 의거해서 믿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홀로 성경 하나만 들고 믿을 것 믿고 안 믿을 것 안 믿겠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 한 사람의 지력이나 판단력은 아주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역사를 통해서 계승해서 나고 또 나서 연구하고 깨닫고 전해 준 것들, 말하자면 신약의 선지자들이 전해 준 말씀들은 고귀한 것들이다. 이 고귀한 유산을 가지고 그에 의해서 우리는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해명된 진리도 진리로 받고 나가야 한다. 어떤 한 개인이 해석한 것이 진리라는 말이 아니라 해명되었다면 그것이 교회의 확실한 도그마로 교회의 확실한 선언으로 교회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교리들은 역사적인 시험을 거쳐 풍우 상설에서도 끄떡 않고 금과 같이 빛나는 것들이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그런 교리들을 우리의 표준 문서라고 선언해 놓고 이 테두리 안에서 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무시하고 개인의 권위 즉 개인의 좁은 지혜와 지식과 판단력만을 제일로 여겨서 자기가 성경에 대해서 무불통지(교양을 두루 갖춤)여서 그 뜻을 정확하게 정당하게 오도됨이 없이 파악할 줄 안다고 공언한다면 그것은 굉장한 교만이다.
말씀의 명확한 선언을 믿음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한 것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한가, 연약하고 변하기 쉬우 사람의 이성과 판단에 의해서 실험한 결과를 쥐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가 할 때, 최종적으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명확한 선언 및 역사의 시련을 겪어서 금과 같이 빛나는 건실한 교리들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언을 해석하고 사실을 서술해 나가는 것이 신학이고 그것은 중요한 해명의 활동이 된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이 있다. 가령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조목 하나를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해 놓은 성경을 믿기보다 "예수님은 누구냐 할 때 예수님을 신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의 모든 사업이나 언어가 의미가 없으니 우선 신이라는 가정 가운데서 출발하여 생각하자 그는 신인 까닭에 영원히 죽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죽는다는 것은 신으로서 무엇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 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생명은 그에게 정상한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부활했다. 신은 죽을 수 없으니까 살았다"고 논한다면 어떤가? 그렇게 논한 신학자가 바로 칼 바르트요 이것이 그의 부활에 대한 논리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것이 신학이 되느냐 하면 그것은 신학이 안 되는것이다. 사라밍 가지고 있는 사고의 논리 형식에 의해서 결국 증명을 하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 논리를 수긍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선언했으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믿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태도이다. 이런 태도하에서 논리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자기가 나름대로 전제를 해 놓고서 제멋대로 논리해서 다행히 결론이 긍정적으로 나오자 그렇다고 수긍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믿는 것이 된다.
우리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광명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특별한 은혜의 사실들을 일반 계시가 아니라 특별 계시에 의해서 알게 핫니다. 이 특별한 계시 안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믿어야 할 것으로 선언하시고 그것이 교리의 대본(크고 요긴한 근본)이 되었으면 그것을 믿는 것이다. 성신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러한 대본의 하나이다. 성신님이 내주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전연 별다른 종교학을 하나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성으로 느낀다 못 느낀다 하는 문제는 상관이 없다. 내 속에 성신이 계셔서 찌르르한 것을 느꼈다든지 하는 것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이상한 현상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일이다.
먼저 그 말씀을 믿고 내주하시는 성신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 행하시는 여러 가지 사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 온 다음에는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우리 생얘 가운데서 때때로 아! 나를 붙드사 바로 가르쳐 주셔서 내가 곁길로 들어가서 저 사람들과 같이 방황하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한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맺은 열매로 봐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성신님께서 내주하셨다는 거룩한 말씀과 약속하에서 이루어진 일들은 궁극적으로 성신님의 내주라는 사실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내가 감성을 가지고 느끼는 게 아니라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인도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내 마음 가운데 찬송을 올렸고 성신께서 기도하신 그 기도에 내가 참여했고 증거하시는 것을 받았다면 성신님의 내주의 사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것이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