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부활에 대한 증거(1)/ 존맥아더
고전15장1-4절 부활에 대한 증거(1)
서론
1. 기독교의 초석
심장이 생명을 주는 피를 온 몸에 밀어 보내는 것과 같이, 부활은 바로 복음의 심장으로서 진리의 전 영역에 생명을 공급해 준다. 부활은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전체가 회전하고 있는 추축(樞軸)이다. 부활을 빼내어 버린다면 기독교는 희망적인 사상, 아니면 또 하나의 무익한 인간 철학이 되고 만다.
여러 시대를 통해 내려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나셔서 죽음을 이기셨으며 또한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과 삶과 소망을 의지해 왔다. 십자가에 못박힌 스승을 따라다녔던, 비탄에 잠긴 자들을 초대 교회의용감한 순교자들로 변화시긴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었다. 성도의 교제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부활이었으며, 그들이 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당시, 그들은 옥에 갇히고 형벌을 받고 매 맞고 욕설을 듣고 심지어 죽음을 당했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실재를 부인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기독교 신앙의 초석은 항상 있어 왔으며, 또한 항상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그리스도의 신성도, 영생도, 그리고 죽음의 중요성도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은 항상 공격을 받고 있다.
2. 고린도인의 부인(否認)
1) 구원의 필요 조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다. 구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고백이 없다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이다.
2)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목적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이 부인한 것은 성도의 육체적 부활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문자 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들 역시 문자 그대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하고 입증해 보이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5장이 기록되었다. 이 장(章)의 내용은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에 관한 것이다.
3) 고린도인의 신학에 있어서의 문제점
고린도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는 성도들이 문자 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활을 부인할 때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15장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살펴보자. 고린도인들은 그 당시의 신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이 살던 사회의 모든 철학에 사로잡혀 그 죄가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과 혼합하게 된 것이다.
1)헬라 철학의 영향
헬라인들 사이에서는 육체적인 부활과 같은 것이 부인되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물질적인 부활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헬라 철학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즉, 그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들은 일어나기로 예정된 유일한 부활은 이미 일어났다고 말한 디모데후서 2장 17-18절에 나오는 후메내오나 빌레도와 같았다 !
헬라 철학이 신봉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실례를 보려면, 사도행전 17장 18-32절을 보라. 이곳을 보면 바울은 헬라 세계의 철학의 중심, 그 중에서도 핵심인 아덴 시에 있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무덤으로부터의 육체적인 부활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헬라인들에게 뚜렷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들은 바울을 "말장이",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새 교(敎)"를 소개하는 사람, 그리고 "이상한 것"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더우기 32절에는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희롱도 하고"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철학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아덴에서 전한 멧세지를 확실히 믿을 수 없었다. 고린도가 아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덴에 본거지를 둔 헬라 철학이 고린도에 끼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적 이원론
철학적 이원론(二元論)이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철학의 창시자는 플라톤(Plate)으로서 헬라 사상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악한 육체는 벗겨져 버리고 선한 영혼은 불멸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그들은 육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는 사람이 죽을 때 탈출하는 감옥이라고 플라톤은 가르쳤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이란 두번째 지옥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 헬라인들에게는 "육체는 무덤이고, 나는 시체에 속박된 가련한 영혼이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헬라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 스토아 철학
사도행전 17장 18절에 언급되어 있는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비슷한 아주 흥미로운 철학적 집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불타는 영(靈)이신데,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자신의 불에서 작은 조각을 보내 사람의 육체 안에 살게 하신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육체 안에 있는 신성(神性)의 작은 조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신성(神性)의 작은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육체가 죽으면 무덤 속으로 들어가 유골(遺骨)로 해체되고 티끌로 돌아가며, 작은 불 조각은 돌아가 큰 불(하나님)과 재결합한다고 했다.
이러한 문화와 철학, 그리고 종교에 길들여진 헬라인들이 육체의 부활을 용납하거나 심지어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조롱하지 않을 수없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이상한 멧세지였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으면서도(그들은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다시 말해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또한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이미 인정하였다면, 너희도 역시 다시 살아날 것임을 왜 믿을 수 없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야기된 데에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2)사두개인들의 영향
그 당시에는 샤두개인으로 알려진 유대인들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부활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소망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기대하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없었다. 사도행전 23장 8절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아마 고린도인들은 이들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3) 회의론자들의 영향
"썩고 부패하고 악취가 나는 것이 땅에서 나와 불멸의, 신적인 영혼의 거처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라고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농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그렇게 보았다. 주후 220년 경에 셀수스(Celsus)라는 사람이 이러한 말로써 기독교의 육체적 부활 사상을 공격했다.
"이것은 벌레의 소망이다! 무엇 때문에 사람의 영혼이 썩어버린 육체를 더 원하겠는가?"
바울은 15장의 상당한 부분에 걸쳐 부활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고 따라서 육체는 썩는다고 광신하는 많은 회의론자들은 더 이상 부활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지 못했을 것이다.
유의사항 : 고린도전서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맨 먼저 기록된 책이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서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기록되었다.
3. 일반적인 기초의 확립
1-11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12절에 가서야 비로소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그가 먼저 일반적인 기초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기초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기초를 세운 다음, 바울은 15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 자신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고 있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1-11절을 중심으로 부활의 타당성에 대한 다섯 가지 증거에 대하여 알아 보겠다.
교회의 증거(1-2절)
1. 복음의 재확인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기초를 기억하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재진술한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을 기억하게 하며, 또한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1) 그들이 부활의 진리를 받았다는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한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였다(요 1:12 참조).
2) 그들은 부활의 진리 위에 서 있다는 사실
"그 가운데 선 것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있어서 완료 시제이다. 이것은 그들이 과거에 복음 위에 서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그 위에서 있다고 하는 뜻이다.
3) 그들이 부활의 진리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재확인시키고 있으며, 또한 이것을 그가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말하게 될 내용의 기초로 삼고 있다.
2. 복음에 대한 책임
1) 문제
2절 끝에 가서, 바울은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흥미로운 주(註)를 덧붙이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복음을 굳게 붙들고 있다면 그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그들이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구원을 잃는다는 뜻인가? 바울은 믿는 자들이 영원히 안전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는가? "헛되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2하반절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해 보겠다.
2) 관점
신약성경에 보면 보증과 가정(ptesumption) 사이에는 항상 균형이 잡혀 있다. 즉,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행하시는 것과 믿는 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보존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 사이에는 균형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관점은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이고, 또 하나의 관점은 사람 편에서 보는 것이다.
(1) 하나님의 관점
참된 신자는 보호되며 또한 안전하다. 고린도전서 15장 2절을 기록한 바울이 똑같이 다음 구절도 기록하였음을 기억하라.
- 로마서 8장 29-30절
이 구절들 가운데서 바울은 믿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정죄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그를 분리시킬 수 없다.
- 로마서 5장 9-10절
여기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심으로 우리가 더욱 확실히 구원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다. 그는 믿는 자들이 안전하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물을 안전히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2) 사람의 관점
참된 신자는 그가 믿음에 거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알아볼 수있다.
- 무익한 믿음
만일 어떤 사람이 얼마 동안 믿다가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결코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헛되이 믿은" 것이다. 그의 믿음은 무익하고, 쓸모 없는,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믿음이다. 사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많다. 왜 그런가? 자신을 맡기지 않는 믿음은 무익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 야고보서 2장 17-20절 / "너희는 나에게 너희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증거를 보이라. 단지 너희가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귀신들조차도 믿는다 !"라고 야고보는 말했다.
- 누가복음 8장 13절 / 복음에 응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합당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네 종류의 땅에다 씨를 뿌린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네 종류의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참으로 중생했는가? 한 사람뿐이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사랑으로서 이것은 감정주의를나타낸다. 그들은 잠시 동안 믿지만, 뿌리가 없기 때문에 시험을 받을 때에는 넘어지고 만다. 그들의 믿음은 공허하고 헛되며 무익하고 아무 효과가 없다. 즉, 이 믿음은 참으로 맡기지 않는 믿음이다.
그런데 고린도에서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그곳에는 놀라운 복음 전도 운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고 교회는 성장하였으며, 굉장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모든 감정에만 이끌려 인기있는 쪽에 붙었다. 그러한 그들의 믿음은 무익하였고, 효과가 없었으며 또한 공허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을 맡기는 믿음이 아니었다.
- 요한복음 2장 23-25절 / 많은 사람이 애수께 대하여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하였다. "굉장한데! 그것은 큰 부흥이야!"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 몸을 그들에게 의탁치 아니하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피상적이고 무익한 믿음임을 아셨다.
- 요한복음 8장 30-31절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라고 30절에 말씀하였다. 이것 역시 복음 전파의 대단한 수확처럼 들린다. 그러나, 다음 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인기있는 쪽에 붙는다.
- 요한복음 6장 66절 /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잠시 동안 피상적으로 믿은 제자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대로 일들이 되어가지 않았을 때는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고 하였다.
- 구원얻는 믿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신자는 보호를 받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에 거하는 자가 참된 신자이다. 믿음에서 떠나는 것은 그가 참으로 구원받은 것이 결코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 히브리서 10장 38-39절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 그의 믿음은 우발적인 순간 동안만 믿거나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으로 생활한다. 의인은 계속적인 믿음으로써 살 것이다. 계속하여 38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당신은 누가 거짓된 그리스도인인지 말할 수 있다. 그는 공허하고 헛된 믿음을 가진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파멸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 야고보서 1장 22-25절 /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듣고서 "오, 이 말씀은 아주 놀랍다 !"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믿음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 된 증거이다!
- 골로새서 1장 21-23절 / 21절과 22절에서 바울은 구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 다음 23절에서 "...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가진 복음의 소망이 흔들린다면, 그 소망이 참으로 당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당신은 헛되이 믿은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공허하고 무익하고 쓸데 없는 믿음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주권에 자신을 맡기지 아니한 믿음이었다.
- 요한일서 2장 19절 / 요한은 말하기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당신은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바를 알겠는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나 믿음에 거하지 않을 사람은 결코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 고린도후서 13장 5절 /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이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공허하고 효과없는, 그리고 쓸모없고 무익한 믿음이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3. 복음의 실제성
부활에 대한 최대의 주관적인 증거는 바로 교회의 존재이다. 고린도인들이 부활을 받아들였으며, 그 위에 섰으며, 또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더러운 자들이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살아계신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가 이 강도, 도적, 동성연애자, 음란한 자, 거짓말하는 자, 그리고 간음하는 자(고전 6:9-10)를 모두 변화시켜 구속받은 자의 공동체 안으로 들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어떠한 윤리 체계가 18개월의 기간 동안에(행 18:11 참조) 고린도의 전 주민들을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임에 틀림없다 ! 그리스도는 살아계심에 틀림없다 !
그리고 이곳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부활을 믿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서 있으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고 있으며, 그것을 붙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덧붙인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부활을 믿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최대의 주관적인 증거는 우리라고 믿는다. 이 2,000년 동안 우리는 부활의 신앙 가운데 거해 왔고, 세상의 무신론자들은 부활에 대하여 논박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왔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사실 우리가 더욱 오래 살면 살수록, 부활의 증거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거(3-4절)
3절과 4절의 "성경대로..."라는 말에 주목하라. 다시 말해서, 부활의 복음은 뒤늦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이미 다 예언되어진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실 것과 또한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25-26절에 보면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영광을 얻기 위하여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이 말한 것을 너희가 알았을 것이다"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26장 22-23절을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와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까지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언됨
- 시편 22편
- 이사야53장
- 창세기 22장 4-14절(히 11:19 참조)
- 구약의 모든 제물은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다(요 1:29/ 행 8:32/ 벧전 1:13).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예언됨
1) 레위기 23장9-14절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부활의 모형(模型)이다.
2) 시편 16편 10-11절
시편 기자는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서, 그는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거룩한 자는 장사지낸 바 될 것이지만, 그분의 육체는 썩지 않을 것이며, 다시 무덤에서 나와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행 2:25-32 / 13:34-37 참조).
3) 요나 1장 17절, 마태복음 12장 40절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4) 이사야 53장 10-12절
이사야 53장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끝에 가서 보면 그분은 자신의 나라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5) 호세아 6장 2절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본 절에서 "제 삼일에 그분이 자기 자신의 부활 안에서 자기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시리라"고 이스라엘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일으킴을 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이다.
이렇게 구약성경이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한 살아 있는 교회가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활에 자신을 맡기지 않겠는가?
출처: 지명교회 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