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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에 대한 사랑(1)/존맥아더

아침그림 2014. 11. 25. 17:14

 

 

행20장1-2절 교회에 대한 사랑(1)

 

 

1. 교회에 대한 사랑(1)

 

 

 

서론

 

 

사도행전 20장 1-17절을 읽으면서 나는 "주님, 이 말씀에서 제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에는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인 진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실생활에 적용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마침내 나는 이 구절들에서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하여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 본문을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제목을 붙였다. 이 본문, 이 적은 분량의 역사적인 단순한 설명에서 바울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는 동안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1.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열정

 

 

먼저,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자면,그는 "내가 너희의 유익을 위해 내 생명을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게 큰 기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주(主)께서 택하신 자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며,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그들이 성숙해 가는 것을 보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이와같은 열정은 모든 교회들에 대하여 충만하였다.

 

 

 

1) 로마 교회

그는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로마서)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라고 말했다.

 

 

 

2)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는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고 말하였다. 고린도전서에 쓴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죄악된 것들로 인하여 심히 염려하며 이렇게 간청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3)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라고 말했다. 그들 중에서 얼마가 잘못된 길에 빠진 것으로 인하여 그는 심히 근심하였다.

 

 

 

4) 에베소 교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성부(聖父)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너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기를 원하노라"(엡 3:14-21).

 

 

 

5) 골로새교회

골로새 교회에서 그는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主)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 라고 말하였다. 그의 일생의 소원은 성도들이 성숙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6)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밭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너희도 이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9-12).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기에 교회를 사랑했다. 이것이 발전되어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표명하는 바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원리가 세워졌다. 만일 내가 진정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데 문제가 있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데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현재 모든 신자(信者)들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한 봉사에 그 자신을 기꺼이 드리고자 하였다.

 

 

 

 

2. 교회를 위한 바울의 수고

 

 

교회를 위하여 바울은 무던히도 참고 견디었다.

 

 

 

1)사랑 안에서의 수고

 

 

(1) 성도들을 성숙케 하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을 보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인하여 당한 고난들을 우리의 무관심과 비교하게 된다.

 

 

 

수고

 

 

23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3-27절).

 

 

이 말씀에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바울이 이 모든 역경들을 믿는 자로서 완전히 의무가 아닌 은혜 가운데서 걸어나갔다는 점이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마치 자기 노력으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다. 정말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감당하였다.

 

 

 

 

마음의 수고

 

 

진실로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실은 28절에 나와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여 염려하였다. 이것은 누군가 그에게 부과한 의무가 아니었다. 단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바울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슬퍼했던 것은 매를 맞거나 배의 파선이나 돌로 맞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슬퍼한 것은 교회가 죄로 인하여 부패되는 것이었다.

 

 

- 고린도 교회 : 고린도 교회의 형편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교회의 형편으로 인하여 너무 괴로와서 에베소를 떠난 이후 디도가 올 때까지 드로아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말씀 전파하는 것을 중단하고 마게도냐에까지 가서 디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디도에게서 고린도 교화의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서야 겨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교회가 죄 가운데 있을 때 가장 큰 아픔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그의 교회를 염려했다.

 

 

-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은 대단히 격한 마음으로 갈라디아 교회에편지를 썼다. 갈라디아서의 헬라어 문법 구조를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고, 그의 사상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 데마 : 바울은 또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말했다(딤후 4:10).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바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 마가 요한 : 바울은 그의 첫 전도 여행에서 마가가 그를 버리고 떠남으로써 받은 충격으로부터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바나바가 그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을 때 이를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마음에 고통이 되어 있었다(행 15:37-41). 마가의 결점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고난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으면서도 교회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그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이 자라가고 성숙해 가는 모습 보기를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다.

 

 

 

(2) 성도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4장 11절에서부터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치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즉 내가 무릎을 꿇고 간청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1-16).

 

 

바울은 이 사람들을 제자삼으려는 의무로 자신을 완전히 불태웠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고난들을 당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에게 선생은 많지만 아비는 오직 하나뿐이다. 부탁하노니, 나를 저버리지 말아다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라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를 인하여 내가 주(主)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하여금 계속해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행하도록 확고히 하려 함이라"는 뜻이다. 당신은 "그럼, 그는 필경 모범적인 사람이겠군요?"라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또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도 말했다(고전 11:1). 내가 사도 바울의 고난당하는 내용들을 읽어 볼 때마다 그의 감정적인 반응은 항상 믿음과 기쁨이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는 찬송하였으며(행 16:25), 어려움에 처해 있던 또다른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2) 눈물로 가르침

 

 

"사도 바울도 운 적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그는 항상 울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는 항상 울었는가?"를 묻고 싶을 것이다.

 

 

 

 

(1) 사도행전 20장 19-31절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主)를 섬긴 것과..."(19절).

여기에서 그가 "... 많은 눈물이며..."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알기로, 유대인들로 인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러나 진실로 그 눈물은 어디서 기인한 것이었겠는가? 31절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나는 여기에서 절대로 어떤 배타적인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흘렸던 그 많은 눈물은 그의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흘린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르치는 데 대한 열망으로 인하여 흘린 것이었다. 그는 눈물로 가르쳤다.

 

 

 

 

(2) 골로새서 1장 28-29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교회를 완전하고 성숙된 교회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가르칠 수가 없었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를 떠난 다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그리고 나서 "내가 삼 년이나 눈물로 가르친 너희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덧붙이고 있다(행 20:31-32). 나는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은 그 사람이 주님께 속한 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0장은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해서 간파할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훌륭한 교회, 훌륭한 교사,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건전한 교훈과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건전한 교훈과 대단한 사랑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감화를 받기 때문에 그 사람의 교훈에서도 감화를 받는다.

 

 

사도행전 20장 1-2절의 "소요가 그치매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라는 이 간단한 말씀이 사도바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교회를 위하여 살다가 교회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있다. 이는 그가 이 교회를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그의 애착에서 그 사랑을 볼 수 있다.

 

 

 

 

그의 애정(1 상반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1. 소요가 그침

 

에베소에서의 소요는 하나의 폭동이었다(행 19:23-41).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때쯤 소아시아의 다른 여섯 교회가 세워졌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계 2:1-3:19). 그의 사역은 우상 숭배가 아주 쇠퇴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작은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상을 만들어 팔았던 은장색들의 돈벌이가 점점 줄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굉장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심각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하여 우상을 만들어 팔았던 은장색들은 한 군데 모여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의 하는 일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논의했다. 소요에 뒤이어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연극장에 모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쳐 댔다(행 19:34). 소요는 그 도시의 서기장에 의해 조용해졌지만(행19:35) 여전히 그곳에는 바울과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감이 조장되고 있었다.

 

 

"소요"란 참 흥미로운 단어이다. 바로 이 동일한 헬라어가 마태복음 27장 24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주(主)께서 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의 상황을 묘사한 "민란"이 바로 그 단어이다. 이것은 광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군중을 말하는 뜻이었다.

 

 

 

 

2. 제자들을 포옹함

소요가 그치자 바울은 제자들을 그에게로 불러서 그들을 포옹하였다(개역 한글성경에서는 "권하다"로 번역됨-역자 주). "포옹하다"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신에게 접근시키다, 잡고 자신에게로 접근시키다"이다. 이 말은 그와 같은 면에서 생각할 때 절친한 뜻을 담고 있다.

 

 

1) 풍습이

"포옹"이란 말은 동방 사람들의 관습적인 인사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창세기 48장 10절과 사무엘하 19장 39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껴안고 입맞추며 인사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오랜 관습이었다. 어떤 사람이 계속 여행을 하기 위해 한 장소를 떠날 때면 그곳 주인은 관습적으로 하루나 그 이상 자기의 손님과 여행에 동반해 준다. 그런 다음에 그들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대단히 시위적(示威的)인 것이었다.

 

 

 

 

 

2) 대조

 

 

 

(1) 우정어린 입맞춤

이런 종류의 포옹은 보통 서로 껴안고 뺨에 간단히 입맞추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의 헬라어 「필레마」(philema)는 "우정어린 입맞춤"을 뜻하며,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는 「필레오」(phileo)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친척이나 매우 친한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종류의 포옹이었다. 우리에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고 말한 곳이 신약성경에 다섯 군데가 있다(롬 16:16/ 고전16:20/ 고후13:12/ 살전 5:26/ 벧전 5:14).

 

 

 

(2) 열렬한 입맞춤

"포옹"이라는 말로 사도 바울의 그 애정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포옹이라는 말에는 바울이 의미한 다른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의(定義)

 

 

입맞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또 다른 헬라어가 있다. 「카타필레오」(kataphileo)라는 단어로서, 이 말은 "열렬한 그리고 애정깊은 입맞춤"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레마」(philema) 보다는 더 강렬한 말이다.

 

 

 

사용된 예(例)

 

 

- 유다 : 마태와 마가 둘 다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던 것을 묘사하는데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마26:49/ 막 14:45). 두 가지 이유에서 생각할 때 이것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하나는 그의 외식의 정도를 나타내 주고 있고 또 하나는 아마도 이것이 그가 평소에 주님을 대하던 방식이었을 것임을 보여 준다. 주님은 기꺼이, 그리고 관대히 유다의 그와 같은 자세를 용납하셨는데, 이는 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 탕자 : 이 말은 돌아오는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를 묘사하는 데 또한 사용되었다. 여기에 보면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하고 있다(눅 15:20). 그는 열렬하고도 애정깊게 그에게 입맞추었다. 그것은 진정한 육신적인 애정으로 축소되어 나타난 하나의 놀라운 사랑의 실연(實演)이었다.

 

- 창기 : 누가복음 7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식사하시기 위하여 한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그 다음 37절부터는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말하고 있다(37-38절).

 

 

위에 언급된 모든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 바리새인은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39하반절에서 그는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녀는 아마도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수 있으며 그녀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지닌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가지고 예수께로 와서 그것을 드려 부으며 그녀의 사랑과 애정을 열렬하게 나타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7장 40절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0-45절).

 

 

당신은 예수께서 이 여인의 이 같은 일을 칭찬하셨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초연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아마 당신은 "그러면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요 20:17)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헬라어 상으로 살펴볼 때, 그분은 "마리아야, 내게 매달리지 말아라, 나는 승천해야 한다. 난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다시 오기 위해서 나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께 매달려서, 가시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녀에게 자신을 전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어떻든 주님은 창기의 사랑을 받아들이셨다. 사실 주님은 입맞추지 아니함을 인하여 시몬을 점잖게 꾸짖으셨다. 영적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마치 어떤 위대한 신(神)이 벽이라도 둘러쳐서 자신들을 따로 분리해 놓은 것처럼 사람들에 대하여 거칠고 거만하게 처신하기가 쉽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로 그녀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나서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48절).

 

 

바울 : 「카타필레오」(kataphileo)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20장 37절에서 사도 바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20장 1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37절에서 다시 그가 그 지역(밀레도)에 돌아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포옹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볼 수가 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36-37절).

 

 

당신은 어쩌면 "이 말씀에서 당신이 좋다고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에서 좋아하는 것은,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 결과, 그들의 사랑을 사도 바울에게 나타낼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당신은 아마 어떤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는 그들에게 당신의 애정을 표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믿기로는, 포옹에 나타난 사도 바울에 대한 이 육신적인 애정의 표현이 이들 가운데서 전에도 가끔 있었으리라고 본다. 나는 사도 바울이 하나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로보트나 제품화된 성경주석, 상품화된 설교 테이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나는 그가 울 수 있고 포옹할 수 있고 입맞출 수도 있는, 살아서 숨쉬는 사람이라는 것이 기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사랑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그의 애정에서 보여 주듯이 교회를 사랑하였다. 그의 사랑은 구제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구제(1 하반절-2하반절)

 

 

"...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구제는 사랑을 측량할 수 있는 좋은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말하였다.

 

 

 

 

1. 바울의 구제에 대한 실행

 

바울은 로마를 향해 북쪽으로 여행한 다음 그곳에서 에게 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서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당신은 아마 "위의 말씀들은 구제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여행을 해야 했던 목적 때문에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1) 여행의 목적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를 모으러 마게도냐에 가고자 하였다. 그가 아직 에베소에 있을 때 사도행전 19장 21절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소요로 말미암아 바울은 이제 자신이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바울이 떠나는 목적은 구제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그는 고린도전서를 썼는데, 그 서신서에서 그는 그가 마게도냐에 가는 이유를 밝혔다. 고린도전서 16장 1절에서 그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 그는 미리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연보를 모아 두라고 한 것같이 너희도 모아 두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5상반절에서 그는 "...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라고 말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모은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연보를 거두기를 원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 보기에 자신이 한 말의 성실성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2) 필요를 인식함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은 가난했다. 사도행전 11장 28-3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글라디우스 때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만일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아디아베네의 헬레나(Helena)여왕이 말린 무화과와 포도를 들여와 그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거의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야고보서 2장 5절은 그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곳에는 많은 도움이 필요했고, 또한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특징적인 면이다. 그는 이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가 지중해 동편 연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연보를 모았던 이유가 바로 그의 사랑이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지역을 여행하고 다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이는 그의 목적이 오직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가는 곳마다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위험이 기다린다 해도 나는 예루살렘에 가겠다"(행 20:24)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알았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인 자질이며, 또한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내가 어떤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는 교회의 연합을 견고히 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만날 때는 항상 문제가 있었다(롬 10-11장).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 성도들로부터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도움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을 보고 그로 인하여 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기를 바랬다. 덧붙여 말하자면, 바울은 각 이방인 지역의 대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려 하였다.

 

 

바울은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고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했다.

"...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바울은 자신이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느냐 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표현인가 !

 

 

 

 

2) 여행에 대한 계획

 

 

 

(1) 연보를 미리 준비토록 함(고전 16:2)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그들에게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것은 주님 앞에서 그들의 마음에 작정한 대로 바치라는 뜻이었다. 바울이 "나는 내가 그곳에 갈 때에 너희들이 연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희가 미리 계획을 세워서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퍽 흥미롭다.

 

 

 

(2) 선물을 전달함(고전 16:3-4)

바울은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선물)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3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누구든지 너희가 나와 함께 갔기를 원하는자와 함께 너희의 동의하에 선물(즉, 연보)을 가지고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에서 보내는 천거서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나서 4절에서 바울은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거기서 모금한 돈이(자기도 그 운반을 도와야 될 정도로) 많지 않으면 구태여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3) 에베소에 거함(고전 16:5-9)

바울은 계속해서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5-7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너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만나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거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8절). 원래 그는 유월절까지 그곳에 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바꾸어 오순절까지 50일 더 그곳에 거하기로 작정했다. 당신은 "그가 왜 생각을 바꾸었을까?"라고 물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9절에서 바울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거하면서 이 편지를 써서 연보에 대하여 그들에게 지시했다. 사도행전 20장 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은 그의 여행 일정을 서둘러 마게도냐로 갔다.

 

 

 

 

3) 여행의 전도(前途)

바울은 에베소를 떠난 다음 북쪽 드로아로 갔으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갔으며, 그곳에서 고린도후서를 썼다. 이 서신에서 그는 그의 마음 문을 열고 있다. 그들에게 쓴 그의 첫 서신에서 그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했었다.

 

 

 

(1) 하나님께 의탁함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죽음을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그분의 부활의 능력)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야 했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선물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가 만일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강하게 믿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돕고자 하는 이 사람의 헌신의 마음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2) 심령의 부르짖음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의 삶에 대하여 낙심 가운데 빠졌다. 고린도후서 2장 12-13절에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主)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라고 말하고 있다. 디도는 고린도를 다녀와서 분명히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나야 했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바울의 첫 서신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며 모든 문제들이 잘 해결되었기를 바랬다. 바울은 그 뒤에 계속해서 "...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말했다.

 

 

 

(3) 디도로 인하여 위로를 받음

 

 

당신은 아마 "그가 마게도냐로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물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디도를 만났다. 또한 당신은 디도가 바울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는지도 궁금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7장 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서도 고린도 교회 문제로 인하여 두려움과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희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절)고 말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것을 믿었으며 회개했고 힘을 얻었다.

 

 

 

(4)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권고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고후 7:8)이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나도 그 편지가 좀 심한 편지였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와 같이 조금 심하게 편지를 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 말했다(8-9절). 바울은 그들의 삶에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마음이 고조되었다. 이 일 후에 그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보에 대하여 언급했다(고후 8:1-9:15).

 

 

 

 

2. 구제에 대한 바울의 원칙

 

 

[이 점은 다음 과(科)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음]

 

바울은 지치고 피곤하며 그의 교회들의 영적인 삶에 대해 근심으로 가득 차 있고, 억압과 위협을 받으며, 자신에게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몰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 있으면서도 자신에 대한 것은 하나도 구하지 않았다. 오직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돈을 모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움으로 교회가 하나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사랑의 수준이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그의 직업의 방편이 아니라 자기가 몸 바쳐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공동체였다.

 

세번째로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그의 가르침에서이다.

 

 

 

 

그의 가르침(2하반절)

 

 

"...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아가야)에 이르러."

 

나는 당신이 "(그가)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라는 이 짧은 말씀을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바울은 자기에 대한 적개심이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기의 이 지중해 동쪽 연안에 대한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는 이제 교회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장로들이 세워졌고, 복음이 이제 자리가 잡힌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로마와 스페인에 가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여러 말로 격려했다.

 

 

 

 

 

1. 풍성한 가르침

 

 

 

1) 바울의 줄기찬 인내

이 때는 바울이 그 억압들에 굴복해 일하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때였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성도들을 권했다(가르치고, 영향을 끼치고, 교제하고, 나누고, 말하고). 바울은 또한 글도 많이 썼다(이때 그는 고린도후서를 썼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여행은 고별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침에 몰두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시를 보게 된다. 그는 교회를 가르치는 데에 자신을 바쳤다. 바울은 바로 각 사람을 올바로 세우는 일을 위하여 산 사람이었다(골 1:28). 바울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엡 4:11-12)라고 말했다.

 

 

 

2) 교만에 대한 문제

슬픈 사실이지만 오늘날 많은 일꾼들이 교회를 자기 성취와 입신(立身)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교만과 더불어 싸우고 있다. 만일 일꾼이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노력은 곧 자기 중심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의 백성들을 더 사랑하게 하시며, 내가 죽을 때까지 성도들을 세우는 일을 할 수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바울에 대한 이 말씀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나의 사랑의 결핍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수없이 내가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을 준비할 때에 이 말씀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었다. 마음 속에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할까? 그들은 어쩌면 내가 설교를 참 잘한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말한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그것은 거룩한 생각이 아니다"라고 다짐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란다.

 

 

 

3) 다른 성도들을 돌아볼 책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 양심의 가책없이 교회를 오랫동안 참석하지 않는 경우를 볼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나는 교회를 섬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교회에서 가르치겠다. 나에게 은퇴란 끔찍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핍박자들이 그의 목을 자를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행 28:31).

 

 

당신은 교회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의 큰 소원은, 당신의 은사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피와 생명을 바쳐 교회를 사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도들 하나 하나를 귀한 보화처럼 돌보아 그들로 또 다른 모든 성도들을 돌보도록 부탁하셨다. 당신은 교회를 사랑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교회를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곳이나 환대받는 곳으로 생각지 않고, 전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곳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그리고 많은 교훈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그는 중단하거나 쉬지 않고 계속 가르쳤다. 사도행전 20장 6-12절에서, 바울이 드로아에 두번째 왔을 때 그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밤을 새워가며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헌신의 수준이다. 당신은 "바울은 아마 헬라에 도착했을 때 쉬었을 것이다"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고린도의 가이오 집에 있을 때에 로마서를 기록했다(롬16:23/ 행 18:7). 바울은 일하는 데 절대로 지치지 않았다.

 

 

어떤 목사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고,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여러분이 얼마나 원하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만일 내가내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나는 할 수 있는 한 당신이 영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욕구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 당신의 주님에 대한 사랑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확인 질문

 

 

1. 바울의 삶에 있어 큰 열정은 무엇인가?

 

2. 바울에게 있어 교회에 대한 사랑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무엇인가?

 

3.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4. 바울이 그의 삶에서 경험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그와 같은 슬픔을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5.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감정적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6. 사도행전 20장 19절은 바울이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사도 바울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는가?

 

7. 사람이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그 한 길은 무엇인가?

 

8. 교회와 교사와 그리스도인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 두 가지는 무엇인가?

 

9. 무엇이 에베소에서의 소요를 일으키게 했는가?

 

 

10. "포옹"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1. 어떤 한 사람이 여행을 떠날 때 그를 배웅나간 사람들의 관습은 어떠했는가?

 

12. 바울 당시에 성행했던 통상적 포옹에 대하여 설명해 보라.

 

13.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입맞춤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14. 무엇이 창기로 하여금 예수님의 발을 씻도록 했는가?

 

15. 에베소의 장로들이 바울과 열렬한 입맞춤을 한 것이 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

 

16. 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여행했는가?

 

17. 바울로 하여금 구제금을 모금하도록 고무한 세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그 세 가지가 각각 사도 바울에 대하여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18. 바울은 필요한 것은 돕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가야 했는가?

 

19.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이 교회를 연합시키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가?

 

20. 바울은 만일 그가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하기 전에 죽임을 당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는가?

 

 

21. 바울은 왜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속이 편치 않았는가? 디도가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22. 바울은 왜 에베소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권고를 했는가?

 

23.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동기로 봉사를 하는가?

 

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부탁을 하셨는가? 다른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25. 당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정도는 당신의 어떤 면으로써 알 수가 있는가?

 

 

 

 

정리

 

 

1. 다음의 성구들을 다시 읽어 보고, 교회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바울의 사랑을 비교해 보라(롬 1:11/ 고전 4:11-17/ 6:19-20/ 고후 7:1/ 11:23-28/ 갈 3:1,3/ 엡 3:14-21/ 빌 2:17/ 골 1:9-10, 28/ 살전2:9-12). 당신의 사랑이 바울의 사랑에 못미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취해야 할 과제들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시행하겠는가? 당신이 사도 바울처럼 성도들을 사랑하는 데 취해야 할 단계들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2. 바울의 가장 큰 슬픔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 당신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를 보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마태복음 18장 15-35절과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읽어보라. 죄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있는 죄를 바로 잡으려면 먼저 당신의 삶에 무엇이 선행(先行)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 선행(先行) 과제가 없다면 어떠한 위험이 따르는가? 타인의 죄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은 당신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3.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곤고함을 보게 될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떠한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당신의 반응은 사도 바울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요한일서 3장 16-18절을 읽어 보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모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의 여행들을 다 마치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라. 다른 형제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하여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하면 그 필요를 가장 잘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일 3:16 참조)

 

 

출처: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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