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교회에 대한 사랑(2)/존맥아더
행20장1-7절 교회에 대한 사랑(2)
2. 교회에 대한 사랑(2)
서론
사도행전 20장 1-17절 말씀을 "교회에 대한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담고 있다. 「교회」라 함은 어떤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말한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또한 사도 바울의 간증이 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치셨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바쳤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구속(救贖)하는 일로 죽으셨고, 바울은 교회를 섬기는 일로 죽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헌신의 정도가 예수님의 헌신과 병행하며, 목적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희생하는 데 있어서는 주님과 병행한다.
1. 사역에 대한 안내
바울은 교회가 장성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에 대한 기본적인 이유는 그에게 있어 주님의 뜻이 곧 자기의 뜻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에게서 난 자이면 그리스도에게서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5:1). 달리 말해서,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주님께서 낳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삶의 목표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하는 데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그 자신의 뜻을 포기하였다. 나 자신의 뜻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 영적 성숙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 참다운 영적 성숙이다. 우리 중에 거의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뜻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을 배우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는 영적 성숙도에까지는 자라지 못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고, 또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쳤다. 그는 교회를 위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았다.
1) 능력이 함께하는 목적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너희가 능력있게, 극적으로, 정력적으로 움직여 너희의 가능성(잠재력)을 이루라"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에게) 교회 안에서 ... 영광이 대대로"(엡 3:21)있게 하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교회가 그 잠재력이 강화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열망이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인하여 살고,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을 신뢰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아실 것이다.
2) 지불해야 하는 대가
그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데에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가 자원해서 그 대가를 지불했다.
(1) 골로새서 1장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하반절). 만일 교회가 성숙하고 연합하는 데 그 대가가 필요하고, 교회가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데 어떤 아픔이 있다면 그는 자원해서 그 값을 치렀다. 바울은 계속해서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하반절)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리스도대신 고난을 당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세상의 핍박을 달게 받겠다"고 말한 것이다.
(2) 빌립보서 1장 12-14절
바울은 "복음의 진보로 인하여 나는 죄수가 되었다. 나는 내가 죄수됨을 인하여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더욱 담대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 값을 치렀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그 자신의 희생으로 정의(定義)할 수 있다.
2. 사역의 목표
1) 추구됨
바울은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 목표를 좇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성도들을 성숙케 하는 것, 그들을 완전히 성숙케 해서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돌리게 함으로써 주님과 자신이 만족함을 얻는 것이었다. 그의 사역의 모든 기초적인 동기가 교회에 대한 사랑이었다.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릇됨
만일 사역의 목표가 교회에 대한 사랑과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이 되도록 성숙케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목표는 잘못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어진 사역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보고서, 즉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그 일을 추구한다면 그의 사역은 그릇된 것이다. 사역에 대한 합당한 이유는 오직 교회에 대한 사랑밖에 없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에 대한 사랑, 즉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다.
3. 사역의 은사들
사역의 핵심은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당신은 아마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에게도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다. 당신은 "나는 설교하는 것으로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당신이 말씀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그와는 다른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받은 은사의 사역에 대한 효과나 강도에 대한 척도는 성도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성도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하도록 돕고 싶어할 것이다. 사역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내 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교인(敎人)들을 위한 것이다. 나의 가르침과 설교의 은사는 바로 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내 은사는 오직 그것이 교인들에게 베풀어졌을 때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나의 사역에 있어 큰 동기 중의 하나는 교인들을 자라도록 돌보는 것이며, 성숙해져서 자신들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도 이와 같은 사역의 목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당신은 "내 은사는 돕는 은사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심히 사랑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을 성숙케 하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죽기까지 충성 봉사하고자 했다.
복습
사도행전 20장 1-17절은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는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아시아, 마게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까지 그의 여행을 마치고 있었다. 그는 위의 모든 지역에 교회들의 기초를 놓았다. 복음은 널리 퍼졌다.
그의 이 3차 여행 중에 그는 에베소에 3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다. 이제 그가 그곳을 떠날 때가 거의 가까왔을 때에 그곳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났다. 사도행전 20장 1절은"소요가 그치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기 위하여 에베소를 떠났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로마와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다(롬 15:28). 그래서 바울은 그 지역이 이제 자신이 다시는 올 수없는 마지막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믿음을 같이하는 어떤 사랑하는 아들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는 것과 같은 그의 최후적인 작별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딤후 4:20)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다시 밀레도에 왔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본문에 나와 있는 여행에서는 드로비모가 병들어 밀레도에 남겨두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이 일은 그 후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로마에서 두 번 투옥되었으며, 첫번째 감금과 두번째 감금 사이에 그는 아시아 지역을 다시 방문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어떻든 이 본문에서 당신은 마지막 여행임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이별의 인사, 그것도 마지막 고별의 인사를 할 때에는 다른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그곳에 있으며, 진실로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아마 이 경우도 그러한 경우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바울에게 몇 번의 이와 같은 작별의 인사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0장 1-17절은 서로 다른 여섯 가지 면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랑을 담고 있다. 그의 애정, 구제, 가르침, 인내, 관훈성(寬厚性) 그리고 그의 관심, 모든 것들이 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다.
그의 애정(1상반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전한 후에 작별하고..."
1. 소요가 그침
2. 제자들을 포옹함
간단히 말해 바울을 그들을 껴안았다.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당겼다"이다. 당시의 관습은 껴안고 상대의 뺨에다 입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사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접촉에 대해 그 어떤 것을 보기 시작했다. 지난 번 우리는 여기까지 공부했었는데, 여기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 20:37)라는 말씀을 덧붙여 생각했었다. 여기에 열렬함, 애정 깊은, 격렬함 그리고 여러 차례의 되풀이된 입맞춤을 의미하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당신도 다른 성도들로부터 이러한 반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을 받을 만한 그 어떤 것이 있었다. 그들은 자애롭게 그를 만지고, 포옹하고, 껴안고, 입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세상 역사에 끼친 바울의 영향을 생각하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이 위대한 사람,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인물, 능력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중대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바울을 육적(肉的)인 면에서도 사랑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계급 제도나 영적인 성직 계급 제도로부터 구원해 주시길 바란다 !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와 같은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육적(肉的)인 애정의 표현
만일 사랑이 정당한 것이라면 육적(肉的)으로 그 사랑을 집약해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이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다. 오늘날의 심리학은 사로의 접촉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은 서로 접촉하고 느끼고자 하는 무리들을 급증시켰다. 그리고 그 감수성을 훈련시켰다. 나는 그저 모두가 풀장(pool)에 앉은 채 서로 접촉하는 모임에 초청받은 적도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사람들은 육적(肉的)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는 많은 시도를 한다.
당신의 가정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야 할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아내가 입맞추는 것을 당신의 자녀들이 보는 것은 건전한 것이다. 당신은 애정을 가지고 당신의 자녀들을 안고 입맞추어야 할 것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들이 없거나 애정이 메마른 가정에서 육적(肉的)인 애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인격이 비뚤어진 가운데서 자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육적(肉的)인 사랑의 접촉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한 부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사랑을 이렇게 육적(內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육적(肉的)인 면에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겠다.
1) 로마서 16장 16상반절 -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서로 문안하라"(입맞춤 : 「필레로마」 - 우정의 입맞춤).
2) 고린도전서 16장 20하반절 -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3) 고린도후서 13장 11절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4) 데살로니가전서 5장 26절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5) 베드로전서 5장 14상반절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신약성경에서 보면 다섯 번이나 육적(肉的)으로 애정을 표현하라고 교회에 명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냉담하거나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친절하며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사랑이 허다한 장벽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랑은 「육적(肉的)인 애정」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구제」에도 나타나 있다.
그의 구제(1하반절-2상반절)
"...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1. 바울의 구제에 대한 실행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거두러 마게도냐에 갔다(고전 16:1-9). 그가 이 구제의 일을 마치는 데는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사람이 하는 희생을 볼 때 그 사람의 사랑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바울은 그의 대부분의 사역을 가죽으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조달하면서 감당했다.
그는 가끔 "내가 너희들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려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후 11:9/살전 2:9/살후 3:8). 사람들이 그에게 사랑의 교제를 할 때에 그는 그것에 대해 감사했다(고후 8:1-6/ 빌 4:15-19).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일에는 바빴다. 그는 이기심이 없고 주기를 기뻐하는 후한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말했다. 에스겔서 33장 31절은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利慾)을 좇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하지만 탐욕을 품는 자들은 주는 것이 아니라 취하고자 한다.
2. 구제에 대한 바울의 원칙
1) 사랑의 본질
요한일서 3장 16절은 사랑과 연관된 말로서 구재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사랑은 최고의 희생(제사)이란 말로 정의(定義)되었다. 이 말을 생각할 때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쓴 한 청년에 대하여 나의 아버지께서 해 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청년은 그의 여자 친구에게 "나는 당신 곁에 가기 위해서라면 가장 높은 산이라도 오르며, 불타는 사막이라도 건너며, 대양(大洋)이라도 헤엄쳐 건널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가 오지만 않는다면 오늘 밤에라도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라고 썼다.
이와 같이 말만 번드레하게 하는 사람은 별로 사람을 사로잡지 못하며, 진실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희생으로 측정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표준을 세워 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표준에 의하여 우리의 사랑을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사랑의 발휘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의무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하반절). 우리들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가장 좋은 척도는 우리들의 삶을 자원해서 성도들을 위하여 버리려고 하는 태도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간이나 돈을 바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들의 영적 은사를 발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당신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으려고 한다.
(1) 인류를 사랑함
우리 모두가 목숨을 내어놓도록 부름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대단히 일반적인(포괄적인) 말이다. 이것은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세상에는 인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사람들 개개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루이스(C. S. Lewi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라고 하는 이 거창한 타이틀을 열렬히 사랑하기가 쉽다. 일반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떠한 사람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2) 인간 개인을 사랑함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7절에서 사랑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보고 자원해서 그 형제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그 어려운 형제를 도울 책임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만 가지고는 충분하지가 않다. 하나님은 동정심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원하신다.
18절은 계속해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하고 있다. 구제(주는 것)는 사랑과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원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17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주의해서 생각해 보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것은 분명히 물질적인 필요를 의미한다. 당신은 자원해서 당신의 물질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진실로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3) 사랑에 대한 요약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사랑에 대한 표준을 세우고 있다.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 앞의 8하반절에서 바울은 "...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고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처럼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단돈 몇백 원 주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을 한 마디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다른 사람을 부하게 하기 위하여 내 자신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
세번째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그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2하반절)
"...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1. 풍부한 가르침
교회를 가르치면서 보낸 바울의 그 많은 노력이 그가 교회를 사랑했다는 것을 확연히 증명해 주고 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교회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애정을 보여 준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돌아보았다는 것이며, 이것들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그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이다.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자랄 수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만일 당신이당신의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가르칠 것이다. 나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훈련되지 않은 반항적인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부모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셈이다.
만일 사랑한다면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칙들로 그들을 가르쳐야 했을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가르칠 것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사역자의 표시가 여기에 있다. 양들을 사랑하는 사역자는 자신의 욕망이나, 생각 또는 주장에 따라 가르치지 않고 양들의 영적인 양식의 필요에 따라 꾸준히 또한 이타적(利他的)으로 가르친다.
2. 빈약한 가르침
이 주제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성경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한다. 나는 많은 신학교들과 교파들에서 설교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는 것을 본다.
1) 가르침의 중심성
설교는 초대 교회의 중심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의 선포는 여전히 최우선 순위에 있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에서 젊은 설교자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편지했다. 해야 될 일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적용하고,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강해 설교이다.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등한시하지 말고 계속 가르치라. 내가 네가 말한 것을 묵상하며 네 사역에 전념하라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라. 그리고 그것에 착념하라"고 말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디모데에게 다시 써 보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리고 그는 또한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받지 아니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딤후 4:3). 나는 우리가 이미 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2) 거짓된 가르침
나는 오늘날의 교회는 사도 시대에 전파되었던 십자가에 대한 전파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전파에 비해 약화되었으며,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더 이상 밖에 나가 전도하기 위하여 교육하고 먹여 주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설교가 빈약한 데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미국에 있는 신학교들 중에서 오직 서너 곳의 신학교에서만이 설교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능력있는 강단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교파들이 많다. 그들에게 있어 능력있는 설교는 이제는 진부한 주제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1)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의 상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외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어떤 의견이나 관점에 대한 토론이나 강의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무오성(無誤性)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설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무런 신념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직업적인 강단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나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 설교의 사양(斜陽)길에 일조(一助)를 했다고 생각한다. 근본주의의 지난 50-100년을 살펴보면, 강단에서 군림하며 교인(敎人)들의 머리를 난타하는 단(壇)으로 악용한 설교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단은 그들이 앉아서 호령하는 하나의 보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학문적으로 흐른 자들과 예민하고 논리적이고 분별있는 사람들은 설교 전반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설교자들이 하는 일은 천편일율적이다. 그러니 설교는 없어도 좋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설교자상은 사람들의 감정에 야합하는 직업적인 쇼맨(Showmen)이다. 그들은 내용이 없는 말들을 난발하며 의미없는 소리들을 외쳐 댄다. 나는 이와 같은 가르침이 설교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파괴시켰으며 말씀의 권위에 소멸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3) 대중 매체, 시청각 자료, 음악, 간증의 범람
당신은 아마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물을 것이다. 전에는 보통 교회가 함께 모일 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단히 창의적이어서, 말씀을 듣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지겨워서 그것을 대체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고안해 내었다. 여기에는 영화, 뮤지칼, 비데오, 새로운 시청각 자료, 대중 행사들이 있다. 이중에 어떤 것들은 아주 우수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지역 교회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와 우리 교회 장로들을 이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에 두신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교회를 가르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다른 어떤 것들에게도 그와 같은 나의 책임을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일날 저녁에는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항상 주일날 저녁을 영화나 또는 음악회나 또는 잘 알려진 사람들로 간증하게 했다. 그는 그의 교회를 온통 이와 같은 외부적인 수단들에 맡겼다. 간증자들은 아주 놀라운 사람들이며, 그영화들이나 음악들도 아주 놀라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또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는 전혀 감지(感知)하지 못한다.
지역 교회에서의 설교의 순수성의 문제는 사람들의 태도에 달려있다. 불행하게도 설교는 한쪽 구석으로 제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설교가 노력과 연구와 끈기를 요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렇게 많은 수고를 요하지 않는 훨씬 쉬운 것, 그리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좋게 보일지는 모르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설교와 가르침을 듣기 위해 함께 모이지만 "예배"(service)를 드린다고 한다. 무엇이 예배인가? 무엇이 예배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일 낮 집회를 "경배의 교제"(fellowship of worship)라 부르고, 주일 밤 집회를 "가족 성경 시간"(family Bible hour)이라 부른다(이것은 미국 교회의 실정임-역자 주). "설교가 쇠퇴해 가는 곳에는 예배의 형식적인 요소들이 증가하며, 교인들의 헌금을 받아내는 방법도 정교해지고, 목사와 성가대가 가끔 교회당 회중석 중앙으로 행렬을 지어 입장을 하기도 한다. 아직도 영화 필름을 사용하거나 음악을 더 사용하는 것과 같은 여흥의 요소들이 공예배에서 더 증가되고 있다.
그리고 간증에 호소하는 일도 급증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어떤 제독이나 장군이나 어떤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야구 스타나 영화 배우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교회에서 간증을 하도록 한다. 이것이 설교보다는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절대로 진정한 문제점은 파악하지 못한다. 진정한 문제점은 그곳에 참석한 어리석은 청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양 실조에 있다.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의 영적인 종기에 대하여 「영적인 환각제」를 복용시키고 있다. 그들은 파열된 맹장염에 대하여 진통제 주사를 맞고 있다.
(4) 목사가 상담자나 사회사업가로 더 강조됨
사람들은 "설교를 통하여는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원리들을 배우고자 한다면 전파되는 말씀을 잘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원리들을 배울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원리들이 당신의 영적 . 정신적 건강에 관건이 되지 못한다면 무엇이 당신의 영혼과 정신의 건강에 있어 관건이 될는지 나는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사회적인 일에 관여해야 한다. 목사는 사회사업을 앞장 서서 하는 표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 헬라파 과부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히브리파 과부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았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공평치 못한 처리를 함으로써 이것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사도들에게 고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많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말했다.
(5) 교회가 가르침의 중심지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됨
교회가 오늘날엔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오직 교회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만 국한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목사님, 목사님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우리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기에 너무 크다면 너무 큰 교회임이 분명하다.
당신은 아마 우리 교회 교인 숫자가 많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더 작아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교회들은 대교회로, 어떤 교회들은 중간 크기, 또 어떤 교회들은 작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정당하게 가르치고 있다면, 교회의 크기가 어떠하든지간에 올바르게 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이 다섯 가지 것들이 교회에서의 설교를 빈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위대한 사람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최근에 나는 사람들의 강단에 대한 관심이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네번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내」에서 그의 사랑을 본다.
그의 인내(3-6절)
바울은 오래 참는 사람이었다. 사랑 또한 오래 참는 특성이 있다. 사랑은 중단하지 않고 어떤 대상을 향해 매진한다. 나는 사도 바울의 이 같은 점을 좋아한다.
1. 음모의 심각성(3절)
"거기 석달을 있다가...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함으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헬라의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3개월을 거하면서 로마서를 썼다. 그곳에서 3개월을 거한 후에 그는 매 유월절 시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수송하는 여객선을 타고자 하였다. 이 배들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을 태우기 위하여 여러 곳을 들렀다. 그는 고린도 옆에 있는 조그만 항구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를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자신이 여행할 때마다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 그는 "오직 성령이 각 성(城)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모든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오래 참고 담대하게 나아갔다.
2. 계획의 변경(3-6절)
바울이 그 음모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여행 행로만 바꾸었다.
1) 마게도냐를 통해 우회함(3하반절)
"...마게도냐를 다녀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바울은 "만일 그들이 나를 그곳에서 없애려고 한다면 나는 마게도냐로 가서 다른 배를 타겠다"고 말하였다. 마게도냐로 가면서 그는 그를 쫓아보낸 모든 도시들을 다시 지나야 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기필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자 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이러한 글을 썼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롬 15:30-31절).
달리 말하자면, "나는 내 앞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 대한 적대심이 있을 것인데 특별히 유대에서 더할 것이다. 부디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하는 모든 일에 낙망, 직접적인 핍박과 같은 모든 종류의 공격들을 받게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사랑한다면 어떠한 공격도 당신을 단념시키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줄기차게 밀고 나간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 모든 길을 돌아서 마게도냐를 지나가기로 긴 여행을 작정했다. 그는 피곤했고, 기진맥진했으며, 지쳐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믿을 때 결코 그의 목적을 바꾸지 않았다.
2) 교회 연합을 나타냄(4-5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누가(사도행전 기자)가 바울과 함께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이전에 빌립보에서 누가와 헤어졌었다. 바울이 다시 빌립보를 지나오면서 누가를 데리고 왔다. 여기(6절)에서부터 이야기가 누가의 직접적인 목격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더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바울은 4절에서 모든 이방인 교회들을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언급하였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들이 교회의 연합을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방인들과 그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에 가져옴으로 교회가 하나로 연합될 수 있었다.
소바더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는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가이오와 디모데는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아시아 지역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고린도후서 8장 16-19절은 디도와 또 다른 형제 하나가 아가야 지역 교회를 대표해 바울과 함께 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지역 교회들이 대표자들을 파송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사랑의 표로 그들의 헌금을전달했다.
3) 빌립보를 떠남(6상반절)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바울은 처음엔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유월절 전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음모가 알려지고 나서 그는 그의 계획을 바꾸어 유월절이 지난 오십 일 후에 있는 오순절에나 참석할수 있기를 원했다. "무교절"은 유월절 후에 일 주일 동안 지켜지는 절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보냈다.
4) 드로아에서의 지연(6하반절)
"...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처음에 여행했을 때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행 16:11)이 닷새나 걸린 것을 보아 그 여행은 힘든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드로아에 도착해서 그들이 원한 배를 타기 위해서 칠일 동안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전진했다.
그의 관후성(7-13절)
1. 바울의 관후성(寬厚性)의 배경(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은 다음 날 그 길고 긴 여행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밤중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잠시 쉬고 나서 11절은 그가 계속해서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답했으며, 복음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관후성(寬厚性)에 대한 적은 암시에 불과하다. 13절은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배를 타고 48 km를 항해하는 동안 바울은 걸어서 앗소로 갔다.
1) 교회가 모이는 때(7상반절)
"안식 후 첫날에" 라는 말이 교회의 모이는 때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인 진술이다. 안식 후 첫날은 태양신(太陽神)으로부터 온 일요일이나, 우리는 이 날을 주(主)의 날(주일)이라고 불러야 한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은 "주(主)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말하였다. 요한이 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일요일을 주(主)의 날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바울은 "매 주일(主日) 첫날에 너희 각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라고 말했다. 매 주일 첫날에 모이는 것이 초대 교회에 하나의 규례적인 방식이 되어 있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 교회가 맨 처음 모인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첫날이었으며,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닫힌 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주일 첫날의 모임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모임이었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를 창시하는 데 한몫을 담당한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는 "안식일은 참 이스라엘인인 우리들에게 영구(永久)한 약속으로 주신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겐 이 안식일을 하나님이 그들을 그분의 선택된 백성들로 아신다고 하는 하나의 표다"라고 썼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했지만 안식일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표적이나 인침이 제 7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다... 짐승의 표는 주일의 준수이다"라고 썼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주(主)의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너희가 아직도 유대인들의 안식일들에 매여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1)고 말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면 그들은 그 옛 언약인 안식일 규례를 벗어나야 했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차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림자이다. 이러한 것들로 아무도 당신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실체가 올 때에는 그림자는 필요없다. 안식일날 모여야 한다고 하는 데는 아무런 합당한 증거가 없다. 초대교회들은 주(主)의 날에 모였다. 우리가 매일 모일지라도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주(主)의 날에 모이고 있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그의 애정과 그의 구제, 그의 가르침, 그의 인내, 그리고 그가 완전히 기진맥진했을 때에도 가르치는 그의 관후성(寬厚性)에서 볼 수 있다. 성도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이 우리 자신들을 희생하는 것을 통하여 측량되기를 바란다.
확인 질문
1. 예수님과 바울은 무슨 목적을 위하여 자신들을 교회에 바쳤는가?
2. 무엇이 바울로 그렇게 교회의 장성을 바라도록 동기를 불어 넣었는가?
3. 우리의 의지(뜻)를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인가?
4.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치렀던 대가는 무엇인가?
5. 목사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이 그 목표를 그릇되게 하는가?
6. 왜 당신의 영적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7. 사람들이 바울에게 육적(肉的)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었는데 무엇이 바울로 그같이 사랑받는 자가 되게 했는가?
8. 육적(肉的)인 애정의 표현이 왜 중요한가?
9. 요한일서 3장 16절에 의하면 사랑이 어떻게 측량되었는가?
10. 사랑과 연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의무를 지고 있는가? 이 의무는 누구에게 이행되어져야 하는가? 이 의무는 어떻게 이행되어져야 하는가?
11.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12. 교회에 대한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가? 자녀들에 대한 그 부모들의 사랑같아야 하는가?
13.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14. 오늘날 교회에 설교를 빈약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보자.
15.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를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
16. 교회 안에서 설교 대신 대중매체, 영화, 음악, 그리고 간증들이 차지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17. 무엇이 바울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금 모금 여행행로를 바꾸게 만들었는가? 유대인들의 음모를 들었을 때 그는 왜 포기하지 않았는가?
18. 바울은 왜 사도행전 20장 4절에 언급된 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갔는가?
19. 사도행전 20장 7절은 왜 교회의 모임을 특별한 말로 언급하고 있는가?
20. 왜 안식일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야 하는가?
정리
1.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기꺼이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바울이 자원해서 치르려고 하는 대가였다. 다음의 성구(聖句)들을 찾아 보라(롬 8:17-26/고전 4:12/고후1:7/빌 1:29/3:10/살후1:4-5/약5:10/벧전 4:13-14/5:10).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위의 말씀들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우리의 고난으로 인하며 우리가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 하나 유익한 고난은 무엇인가?(벧전 4:14) 참된 고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여기에 근거해서, 당신의 고난들은 정당한 이유에서 받았는가 아니면 정욕으로 인하여 받았는가? 지금 바로 당신을 위해 자인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4장 1절을 묵상하라.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성도들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가?
2. 요한일서 3장 16-18절이 구제에 대한 원리를 예증하고 있다. 17절을 주의해서 읽어 보라. 당신은 도와 주어야 할 경우를 목격했으면서도 어떤 이유 때문에 돕지 못한 때가 있는가? 당신 자신에게 솔직한 태도를 견지한 다음에 당신이 돕지 못한 진정한 이유를 말해 보라. 누가복음 10장 30-37절을 읽어 보라. 무엇이 사마리아인으로 하여금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채워 주도록 했는가? 무엇이 당신의 동기가 되어야 하겠는가? 그가 받은 보상은 무엇인가? 당신도 그와 같은 사람(강도 만난 자)을 만나기를 바라는가? 다음의 주님의 말씀을 꼭 순종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3. 바울은 인내의 사람이었다. 당신도 그러한가? 당신은 큰 환란중에서도 당신의 목표를 붙잡는가 아니면 포기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아마 주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는가? 다음의 성구들을 찾아 보라(고전 15:58/갈 6:9/엡 6:18/빌 1:27/딤후 2:1, 3). 어떤 면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인내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인내해야 하는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분을 사랑하는 자의 행함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시간에 당신을 힘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을 가지라(딤후2:1). 그 힘을 사용할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분께 감사하라(약1:5/ 요일 5:15).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