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체험 중심의 감정/조나단 에드워드
고후11장4-14절 체험 중심의 감정
마음속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난 감정이 아닐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감정을 비난한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능력 있게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실 때 그들은 비웃는다. 성령은 항상 침묵 가운데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고 그들은 말한다. 성령은 오로지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그리고 기도와 같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고 그들은 고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론짓기를,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생각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성경 공부나 기도를 무시할 경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기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로 성령은 침묵 가운데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그렇다 하더라도, 구원의 체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왜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일까? 구원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우리 마음의 자연스러운 노력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경 공부라든지 기도 그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전능하신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구원을 주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 속에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만약 우리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성령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심을 느꼈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들을 보고 착각했을 것이라고 말한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착각이라 말하는 것은 "당신은 그 체험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것은 당신의 체험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경은 개인의 구원을 신생으로(요3:3),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로(엡2:5),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고후5:17)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묘사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인의 신생, 영적 부활,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죄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구원받은 사람은 분명히 깨닫지 않는가? 필시 이런 이유에서 성경이 구원을 신생, 부활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이 모든 단어들을 보면 구원의 원천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구원은 분명히 인간의 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치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그 백성을 구원하셨을 때는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 출애굽을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냈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먼저 자신들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으로 그들을 구해 주셨으며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묘사된 거의 모든 회심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들을 볼 수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침묵 가운데 은밀하게, 서서히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아니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대개 영광스러운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그들을 변화시키셨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보고 분명히 무엇인가 기만적인 착각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단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힘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감정을 진정한 영적 감정이라고 단정지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이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입증하려고 한다. "이 경험들은 제가 애써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일어난 일입니다. 또다시 똑같은 체험을 재현하라고 하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주장은 논거가 희박하다.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경험이 아니라면 거짓 영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거짓 영들이 많기 때문이다(고후11:14). 그 거짓 영들은 아주 교묘하게 하나님의 영을 흉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탄도 우리 속에서 역사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과 사탄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탄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불경스럽고 사악한 생각들로 가득 채운다. 이런 사람들은 그런 사탄적인 불경스러움과 생각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똑같이 우리 마음을 기만적인 편안함과 기쁨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능력도 사탄은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편안함과 기쁨의 원천이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는 입증하지 못한다. 종교적 광신의 신들린 상태나 황홀함은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는 체험이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거나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입증하지 못하는 체험들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4-5절) 사람들 중에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6-8절)
또한 종교적인 체험은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의 영향력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나 노력 없이도 이상한 감정을 느끼거나 감동을 받게 된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상관없이 꿈을 꾸지 않는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뛰어난 사람들은 깨어 있을 때도 꿈을 꾸듯이 종교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