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포도원 품군들/조나단 에드워드
마20장1-16절 포도원 품꾼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자까지 삯을 주라하니 제십일시에 온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자들이 와서 더 받을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것이 내 뜻이니라 내것을 가지고 내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자로서 먼저되고 먼저된자로서 나중되리라"(마20:1-16)
우리 가운데 예수 믿고 회심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고통들이 종식되고 다시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교훈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성경의 말씀을 이러한 만사형통의 치료제로 잘못사용하는 거짓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닌까닭은 우리에게는 원수 곧 우리 영혼의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 있는 옛성품이 원수와 서로 연합하여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들을 가져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 각자의 현실적인 고뇌의 삶에서 곧 바로 빠져나오게 하는 마술사의 호신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에게는 성경말씀을 바로 이해하는것이 우리의 급선무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 원수의 속임수와 간교함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성경말씀에는 사탄이 광야에서 우리 주님을 사십일 동안 시험하고 유혹했을때 마지막에 사탄이 잠깐 주님을 떠났을뿐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집요하게 주님을 떠나지 않고 다라다녔으며 다시 돌아와서 주님께 접근하고 또 접근해서 줄곧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까지 벌였던 사탄의 활동을 눈여겨 보십시오. 사탄은 복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여러분의 느슨함을 깨울것입니다. 우리가 할일은 성령의 견지에서 이 같은 일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미리 경고 받는 대로 미리 무장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정확하게 출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불행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회심했으며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으며 초보적인 난관에 대한 경고를 귀를 기울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똑같은 길로 계속해서 나가지 않거나 혹은 진로를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곧 다시 여려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 8장30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적절한 예증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날 오후에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들을수 있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때 우리 주님께서 저들을 쳐다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니라" 그들은 출발을 잘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참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했어야만 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살필수 있습니다. 진리를 기쁨으로 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하는 것의 중요성이 바로 생명적인 원리이며 또한 이 비유의 견지에서 우리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비유의 말씀이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릴스 있습니다. 그속에 오직 한가지의 중요한 일 곧 제 십일시 만을 붙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제 내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십일시에 들어갔던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할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도 아침 일찍 출발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찰스 라일은 죽어가는 도둑에게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죽음의 침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위의 한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렇게 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다른 위험성은 그 비유를 알레고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 교훈의 말씀 한부분 부분에 어떤 영적 진리를 부과하는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의 비유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또 비유란 일반적으로 어떤 한 진리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란 점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비유 역시 진리의 또 다른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비유 역시 하나의 큰진리를 교훈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분명히 "천국은" 이라는 단어에서 발견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각장절이 구분되어지는것으로 생각까지도 메여 버리는 경향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주제는 우리가 19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의 연속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건은 부자 청년 관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은 젊은이가 슬퍼하면서 멀리 가 버렸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베도로가 주님께 말씀한 바를 기억하실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바로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본 비유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질문합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모든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좇았습니다.. 우리가 모든것을 포기하였사오니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하나이까?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수 자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자로서 먼저 될자가 많으니라 "천국은" 마치 집주인과 같으니라 다시 말해서 이 비유의 전체적인 요점은 베드로가 물어보았던 그의 질문 때문에 언급되어졌습니다. 우리주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을 들으시고 그의 물음에 답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베드로의 질문 속에 매우 잘못되고 거짓된 언급이 있음을 간파하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책망하고 꾸짖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를 가장 엄하게 경고하시려는 의도로 우리 주님이 본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먼저 된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자로서 먼저 될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을 반복하는 방법으로 그 뜻을 분명하게 함축한 사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첫부분과 끝 부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집중시켜야만 될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지요 또한 교리이며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가르침에서 한가지 요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은혜의 대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들어왔던 그 사람들도 처음에 왔던 사람들과 똑같게 보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나이가 많이 든 후에 회심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낙심의 문제를 취급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 늦은 경우가 아님을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구원이란 젊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생의 후반부에 회심한 사람이 구원이 자기에게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이유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수년 동안이나 낭비했다는 이유가 바로 그 원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제 십일시에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다는 말씀이 매우 큰 위로가 될것입니다. 그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그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부분의 강조점은 차라리 처음에 들어왔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 비유의 주 목적이 저들에게 말씀하고 또 저들에게 가장 신중하고 엄한 경고가 발효되는데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에 관한 요점은 저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시작했다가 후에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그런 구절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떤 면에서 볼때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신서들이 바로 그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기록된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낙심하게 되었고 바로 그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출발을 정확하게 했다는 것으로 만족 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바른 길로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본 비유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대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무엇보다 먼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왜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왔던 이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괴로운 모습을 보였던것일까요? 여기에서 저들이 불만족하고 있으며 또 원망과 불평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었던가요? 저는 그들의 자신에 대한 태도와 일에 대한 자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첫번째 원리로 설정할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2절에 나오는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라는 표현 가운데 "약속하여" 라는 말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우리가 첫번째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 합의했다는 말만 들어도 그것이 합당한 거래였음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시겠지만 우리는 그가 제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고 듣습니다. 그가 저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런식으로 그 다음에 나오는 품꾼들에게 저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합의된 것이 없습니다.
그는 단순히 "너희도 가서 일하라 내가 상당하게 주리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매우 즐겁게 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품삯 때문에 불평했던 첫번째 사람들과는 저들이 요구하는 품삯에 대한 합의가 제시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들의 태도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구나 하고 첫눈에 느낄수 있습니다. 저들은 어떤 것을 요구하고 또 어떤 것들에 대한 약정을 위하여 거래를 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는 면에서는 결코 잘못되었다고 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면서 저들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바에 눈길을 돌린것 같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런 죄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증거자들이 복음을 전파할때 부닥치는 문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주목하는 한걸음 더 나가서 언제나 자신을 의식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봉사 영역에서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나타날수 있는 일입니다. 많은 경우에 저들은 언제나 연극을 하고 또 자신을 지켜보는데 이런일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도 나타나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한 모든 일에 매우 큰 관심을 보입니다. 본문에서 저들이 한말로 보아 저들은 줄곧 자신들을 응시해 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설명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들이 세웠던 조심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또 자신들이 얼마나 오랬동안 일했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수고와 더위를 견디며 노동했는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있으며 세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저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첫번째 언급입니다. 잠깐동안 거기에서 쉬고 그것을 우리 속에 깊이 가라앉히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은 그런 태도를 책망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운명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베드로의 진술 속에서 간파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좆았사온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거래하자는 제안과 요구 조건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태도가 잘못되고 또 영의 영역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정반대적임을 우리가 볼것입니다. 하지만 그런일이 분명히 있고 또 이 같은 잘못된 태도가 결국 우리를 어려움에 이르게 만듭니다. 그것이 이 사람들의 경우에 그랬던처럼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은혜롭게 복을 베푸시려는 바로 그 현장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만들다니 얼마나 가엾고 비극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이 비유를 그렇게 두렵게 만든것은 이 사람들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사로잡고 있던 무서운 영이 집주인께서 은혜를 베풀어 처음에 들어왔던 사람들과 똑같이 마지막에 들어왔던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 주려고 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체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것이 노출되었고 결국 고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의 본래 잘못된 태도와 저들이 은혜의 원리를 망각해 버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했었고 또 그것이 합당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들이 매우 논리적이었고 처지일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원리와 자신들의 태도를 시작했으니 그것이 논리적인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같은 방법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현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씀드릴스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수식어가 붙고 또 더 많은 것을 부여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리고 싶은 다른 것은 저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저들의 행복과 기쁨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들에게 여분의 그 무엇이 주어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이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묘사하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와 똑같은 죄를 범할수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자신도 자신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자신의 권리를 바르게 행사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당신이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느낄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에 대한 큰 강조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그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말씀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저들에게 하늘의 별들처럼 되어야 하며 모든 일을 원망과 다툼없이 해야 한다고 상기시킨바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새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4016)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하게 되고 원망이나 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대원칙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입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대원칙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일 소위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상당히 질투하는 경우를 초래하게 됩니다. 비유에 나오는 그 사람들은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탕자의 비유가운데 나오는 큰아들의 원리이며 또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그 실례를 찾아 볼수 있습니다. 이런 경향이 유입되면 충성된 증인이었던 성도들을 공격하고 또 가장 훌륭한 일을 해 왔던 이들을 공격합니다. 그것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유입되며 저들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받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큰 상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자주, 적은 것을 성취한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많은 것을 성취했다는 데 대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전체적인 태도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은 가장 진지하고 또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저들은 마음속으로 그 집주인이 잘못되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이른 이 사람이 자신들을 잘못 대우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저들이 철저하게 잘못했습니다. 그 같은 태도를 보여야만 하고 또 그렇게 느껴야만 될 기초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못하시다고 느끼도록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가 성도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그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 놓았는지 보라 . 그런데 얻은 것이 무엇인가? 다른 친구들을 보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을 보라". 그것이 바로 마귀가 속삭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더위와 온 종일 수고를 견딘 우리가 겨우 한 데나리온씩 받다니, 더군다나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받다니 어처구니 없구나." 그것이 바로 악령이 하나는 일이고 성도들을 매우 심각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조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불의에 대한 책임을 돌릴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당하지 못하시며 자기의 권리를 보장해 주시지도 않고 또 자신에게 합당한 보수도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란 얼마나 비참하고 못났으며 얼마나 지저분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어떤 형태나 모습이든 간에 우리 중에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접근할때 우리는 그를 듣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취급하심에 있어 정당하고 의로우신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자아란 있는 그대로 폭로될 필요가 있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가운데 자리집고 있는 죄도 가면을 벗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본 비유를 통하여 하셨던 대로 그 잘못된 영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영혼의 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참과 불행에로 인도하곤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그렇게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잘못되었으며 변호해 줄 일말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을 치유의 길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처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가 매우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세부적인 것을 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오직 한번만 그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가 말씀하신 바를 다른 말로 설명하겠습니다. 그 원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것이 실제적으로 다른 나라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당신이 전에 알고 있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새롭고 다른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만 될 첫번째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옛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깨달을 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달라진 새로운 영역 안에 머물게 됩니다. 전체적인 기초가 달라지고 옛생활의 원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이것을 좀더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새로운 원리에 밑줄을 긋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우리의 삶에 대한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달라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나는 옛날 사고대로 생각할수 없다. 옛날의 기분이나 사고의 개념은 이제 새로워져야만 한다." 우리는 구원을 오직 한 가지 말하자면 용서에만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원리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적용시키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것을 마음속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여기에서 자세한 것 중에 몇 가지를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래나 권리라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숙명적인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기 때문에 혹은 내가 저것을 했기 때문에 내가 그 무엇을 보상받을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목적을 위해 구하는것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얻을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부흥을 위해 밤새워 기도회를 가집니다. 그러면 부흥이 올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전체적인 원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기도이든 아니면 기타의 무엇이든 저는 그런 점에서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기 때문에 무엇을 얻어야 한다는 명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원리란 실천되어야만 진실하게 보일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도회가 열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부흥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감히 그렇게 되지 않은데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들을 자기 마음대로 명령하게 된다면 입장이 어떻게 될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이처럼 거래하려는 생각은 없애 버려야 합니다. 만일에 내가 이것을 한다면 어떤 일이 얼아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당신이 원할 때마다 부흥을 체험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일을 했다는 결과로 부흥이 있으리라는 것도 금물입니다.
성령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주권적인 주님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그리고 원하시는 방법대로 이 일을 행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전혀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혹자는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심판과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던가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그 같이 말씀하셨으며 또 우리 주님 자신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매를 맞을자와 적게 맞을 자에 관해서 친히 말씀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대답은 심지어 상급도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상을 주셔야만 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만일에 당신이 결정할수 있고 또 저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되기 때문입니다. 거래하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과에 따라 불평하는 것은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가 공의롭고 정당하지 않게 우리를 대우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관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식으로 출발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망치는 것으로 끝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저는 좋아합니다. 만일에 당신이 하나님과의 거래를 깬다면 당신은 그 거래만큼은 얻을 것이지만 그 이상은 얻을수 없을 것이 확실합니다. 처음에 왔던 이 사람들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집주인이 저들에게 말했습니다. "좋소" 한데나리온씩 주겠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왔을때는 저들에게 말했습니다. "들어가서 일하시오. 내가 상당하게 주리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왔던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았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왔던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 외에 아무것도 더 받지 못했습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과 더불어 장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일에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거래하는 만큼만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의 은혜에 모든것을 맡긴다면 당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더 많이 얻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저들은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저들은 이런 일들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것 바로 그것이 저들이 원하는 바였습니다. 저들은 그것만을 얻을것이며 더 이상 얻을 것은 얻을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또 다른 원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록을 보전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일을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록 보유자가 되기를 포기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는 그의 영광과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눈을 시계에 맞추지 말고 그분과 그분의 일에 맞추십시오. 그런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 그 외에 것에는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당신이 일을 하는데 몇 시간을 투자했는지 아니면 당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분으로 하여금 계산하도록 하십시오 그분이 말씀하도록 하고 당신은 듣기만 하십시오. 당신의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일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이 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공개적으로 갚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계산하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산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아는 것 중에 하나님의 계산법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없다고 찬사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놀라게 될 준비를 하십시오. 나중된자가 먼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물리적인 눈으로 볼때 완전한 역전 현상, 곧 나중된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자가 나중되며 모든것이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세계가 은혜로 뒤집히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사역에 있어 이런 일들은 저에게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주일에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저는 특별한 자유로움을 의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귀의 음성을 들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다음 주일가지 기다려봐. 놀라운 일이 있을 꺼야"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 틀림없어" 그래서 저는 그 다음 주일에 강단으로 올라갑니다. 겨우 소수만이 참석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도 제가 강단에 가서 서지만 부담스럽고 설교는 엉망이 되며 스스로 나약해지며 좌절감에 빠지게 될때 마귀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아무도 안올 꺼야"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다음 주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온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당신은 결코 모르실것입니다. 제가 힘없이 강단에 올라갔다가 능력있게 마칠때가 있습니다. 또 저는 자신감 있게 올라갔다가 바보 같은 느낌으로 내려올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그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가 하시려는 일을 결코 알수 없습니다. 그분의 장부 관리는 제가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것 중에 가장 낭만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또 다시 마태복음서 25장에 나오는 세번째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바 있씁니다. 당신은 세상 끝에 상받기를 기대 하고 왔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기억하실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에 저들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하였나이다. 우리가 어느때에 주의 주리신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국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얼마나 놀라운 일이 되겠습니까? 이런 삶이야말로 낭만으로 충만한 삶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시대를 초월하고 가치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집니다. 좋습니다. 이제 마지막 원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이 은혜로 되어짐을 깨달아야만 할뿐 아니라 또한 그것이 이렇게 되어진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비극입니다. 저들은 오직 한시간만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는것을 보았씁니다. 그것을 보고서 저들이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하며 그것은 불의한 일이고 또 자신들이 정당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사라고 느꼈습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비결은 모든 것이 은혜로 됨을 깨닫고 또 그를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의 할일을 다 한후에 말하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일을 했을 뿐이라" 이것이 그분이 보시는 관점이요 또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모든 비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 자신의 방법이 아닙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일을 돌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 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마음속에 있도록 해야만 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신도 알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생각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원한 영광의 흔적조차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전혀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말씀하셨씁니다.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밀쳐내 버리셨습니다. 그는 겸손하셨고 또한 자신을 기억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일하시고 인내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 남녀 백성들이 아버지께 나아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결입니다. 시계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기가 한일의 분량을 계산하지 아니하며 장부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지 않고 오직 하님의 영광을 제외한 모든 일은 잊어버리고 그분을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 받은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며 우리를 귀하게 여기사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처음에도 은혜요 마지막에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나 제가 죽음의 침대에 눕게 될때에 우리를 위로하고 도와주며 힘있게 할것은 처음부터 우리를 도와 주었던 바로 그 은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혹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지속하고 은혜로 끝납니다.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