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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일 오후 11:07

아침그림 2015. 6. 2. 23:08

개혁주의 구원론(칼빈주의 5대 교리)

제 1 강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1.도입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곧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 그리고 보수신학을 칼빈주의의 신학적인 체계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장로교(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보수(保守)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칼빈주의란? 그렇다면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요? 칼빈주의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라고 이해할는지 모르지만 죤 칼빈(John Calvin)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손수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진리를 가장 바르게 깨달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교의(敎義)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바울, 어거스틴 등)의 사상을 후대에 가장 바르게 체계를 세워 전달한 사람입니다.물론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칼빈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개혁자들(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등)에 의해 전통적인 신학이 산발적으로 제시됐는데 칼빈이 이를 종합적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란 칼빈이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것이지 칼빈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이론을 뉴톤이 처음 발견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뉴톤의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창조 때부터 존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 기초가 수립됐으며,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이 되었고, 칼빈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칼빈을 추종하는 신학자들(벤자민 워필드, 챨스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에 의해 꽃이 피었으며, 현재 역사적 개혁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성경적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곧 성경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사상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란 성경에서 시작하여 칼빈이 체계를 세운 것을 후에 신학자들이 집을 지은 것으로 우리는 칼빈주의가 성경을 기초로 한 전통신학이요 보수신학의 기초라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사상(God Centered) 성경중심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기원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은 1610년 화란신학교 교수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기초로 다섯까지 주요 요점으로 공식화해서 내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때까지 화란 교회들은 유럽의 다른 주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의 신앙고백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이 고백들은 둘 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 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소위 예지(豫知)에 의한 예정(豫定)교리로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결국은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적으로 돌아가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을지언정 종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the human will) : 이는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役事) 하실 때 인간의지에 의해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자진해서 영생의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요지입니다. 은혜에서 떨어 짐(falling from grace) : 이 주장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항은 각각의 내용이 담고 있는 교리적 성격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하나님으로서 일체의 성경적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편에서의 교리는 다른 한편에서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성경의 자증(自證)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연합돼 있습니다. 삼위 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자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도르트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 129명이 모여 이 문제를 갖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이 회의는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마라톤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조항들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에서 매우 명백히 제시됐고, 프랑스 신학자인 죤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재확인 한 도르트 대회는 알미니안들의 체계에 대결하기 위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2.전개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 내용은 칼빈 개인의 주관적인 교리적 견해에서 나와진 독단적인 성경해석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과 주요 종교회의에 의해 정립된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의 차원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일단의 알미니안들의 교리적 항의를 일축하고 재확인하는 형식으로 나온 성경적 변증의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이들 내용은 '구원의 도리'에 집중해서 연관돼 있음이 특징입니다. 한편 이들 주요 조항들을 영문의 첫 글자를 중심으로 나열했을 때 'TULIP'이라는 글자로 표기되는 바 일명 '튤립교리'라고도 부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 교리인 '인간의 전적타락'에 관해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자유의지' 및 '인간의 능력' 교리의 반동(反動)으로 제시된 교리적 주제임을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파들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입니다. 우리는 본 강의를 통해 성경이 증언하는 바 인간의 전적타락과 관련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이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전적부패 또는 전적무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한결같이 몇 가지 동일하게 시사하는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는 상대적 명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인데 이는 사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절대적 관계에 근거해서 진단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정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처음 무죄자로 창조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죄자가 곧 완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자는 무죄할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도 않는 절대자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죄자이지만 불완전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신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선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험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사건입니다. 원죄의 기원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죄의 성립은 인간의 내적 욕심의 발로로 야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요16:9). 이후 아담의 범죄의 죄성(罪性)은 그의 후손들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전가(轉嫁)돼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고하는 근본원인을 제공합니다(창2:17, 3:5-6). 롬3:23과 5:12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지적이 바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행위와 이로 인한 후손에게로의 죄의 생득적 전가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후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롬3:10).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에서 단절돼 영원히 결별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영적 이산가족이 돼 버린 셈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사59:2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후 아담의 원죄는 그의 후손들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온갖 범죄행위의 원인 제공자로 활동하게 되는 바 곧 자범죄(自犯罪)의 근원이 됩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 만연돼 있는 갖가지 형태의 범죄는 바로 조상으로부터 생득적으로 전수된 원죄의 다양한 외적 표현일 뿐입니다. 설령 일생에 거쳐 행위에 근거한 범죄를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본성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소위 양심(良心)이 고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죄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현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유일의 천성적(天性的) 흔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양심마저도 화인(火印) 맞아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때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요8:1-11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의 얘기가 소개됩니다. 한 무리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이 얘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을 잡아 의도적으로 주님께 이끌어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했다고 하면서 주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의 요구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이 사건의 내막에 담긴 실상을 독자들에게 폭로합니다. 어찌했든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라도 답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만약에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하신다면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법을 위반해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법에 근거해 살려 주라고 하시면 이는 주님 또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통해 오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인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가지신 후에 살기등등(殺氣騰騰)하고 의기양양한 회중을 향해 일성(一聲)을 발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의 상황을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회중(會衆)은 간음한 여인과 비교해서 분명히 현행범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의의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드러난 죄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주님의 질문 섞인 답변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회중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저들을 여인과 동일한 범죄자로 고발하고 있음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감춰진 죄인'으로 말입니다. 요한은 이 상황을 해석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떠나게 됐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저들이 현행범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기 양심에 찔려 감히 자신들을 무죄자라고 주장하지 못한 사실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바로 주님의 질문 곧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 본성의 실질이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직고(直告)하는 고발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를 향해 저들의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 여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사실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드러난 죄인이나 감추어진 죄인이나를 막론하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 앞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은 죄인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 심성의 실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전(全) 영역에 걸쳐 '전인적(全人的) 부패'를 초래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스스로 취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死亡者)라고 정의한다는 지적입니다(롬3:10-12, 엡2:1). 다시 말해 인간의 지정의가 그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교통의 기능을 철저히 상실한 나머지 어떤 자의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롬1:21-23). 이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도의 영적 수준에서 자력으로는 회복불가능의 저급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돼 버렸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창2:17을 보십시오. 선악과 금령법에는 문맥상 조건부적으로 영생과 사망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하셔서 죽음이 즉각적으로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 구속의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종전 같은 막힘 없는 전인적 교제와 교통은 한 순간에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느 때와 같이 찾아 오셨지만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음으로서 인격적 교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됨을 봅니다(창3:8-10). 도리어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영적 죽음 곧 '전인적 관계의 단절'이라고 부릅니다. 이후로 아담의 범죄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체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原罪)로 기능하게 됩니다(사59:1-2). 롬3:23과 5:12을 보십시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하게 죄인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의 자범죄(自犯罪)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엡2:1을 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의 형편과 처지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로 판정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은 자나 방불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마땅한 영적 교제(전12:13)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일차적 판정임을 알게 됩니다. 마8:22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친의 장사(葬事)문제로 주님을 즉각적으로 좇기를 주저하는 한 제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8:22, 눅9:60). 여기서 실제로 죽은 자는 두 번째 죽은 자를 가리키며, 첫 번째 죽은 자들이란 비록 현재적으로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통해 주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불신자들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원수 된 자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전적부패한 자들로서 결국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간주됨이 성경의 관점입니다.그렇다면 갓난아이들이나 태아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邪惡)한 존재라고 정죄합니다.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51:5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실토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으로 당시의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 했음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음을 기록합니다(창6:5). 로마서 기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된 상태를 힐난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지금 저자는 인간 상호간의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선의 기준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91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원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규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목적)하는 것'을 동기유발로 삼아 행할 때 비로소 선행으로 성립된다고 가르칩니다.죄의 값은 사망입니다.전적타락의 두 번째 명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근원이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임을 증거합니다(롬6:23).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히9:27). 왜냐하면 죄는 법정적(法定的) 측면에서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하는 바 죽음은 죄 값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며 동시에 형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노령으로 죽는 자연사(自然死)나 각종 병사(病死) 그리고 사고사(事故死)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의 방식(方式)일 뿐 죽음의 근본 원인(原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롬6:23). 역사이래 한 번 태어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지속적으로 유효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인류를 죽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적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는 성경의 증언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이며 선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안고 있는 명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으로 모든 지상의 삶이 마감되는 줄 압니다. 더 이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영생(하나님 나라)과 영벌(불못 곧 지옥)의 실질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때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경유해야 할 것임을 경계시킵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온 인류 앞에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이는 한 번 태어난 생명의 가치는 영생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하사된(창2:7) 탁월한 성격상 영원불멸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원리입니다. 아울러 종말론적 생명의 최후적 거처는 영생과 영벌의 장소로 나뉘어 질 것임을 성경은 지적합니다(계20:15, 21:1, 4). 본문(요5:28-29)은 하나님의 최후적 심판대에 서기 위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사실 부활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그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사건의 경우를 통해 분명한 실제적 사건으로 소개합니다(롬8:11, 고전15:20-24).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전15: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보증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속해져서 성도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2-44, 살전4:16-17)). 이미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체의 영광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토록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남김없이 만족시킨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양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5:3-4).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이 부활 후 심판(계20:11-14)에서 제외됨으로 지옥의 다른 설명인 불못의 종말론적 형벌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사면(赦免)됐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요5:24). 이 말은 역(逆)으로 현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아직 죽음과 그 후의 부활과 심판을 현실로 경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취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요3:18).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 필연적 심판(영벌)에서 제외되며 동시에 영생하는 생명에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요5:24). 이런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는 위에서 본대로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로 존재하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他者)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를 수납하게 하신다는 얘깁니다.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정상적인 영적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계승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당신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진행해 가십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에 대해 원보혜사가 되시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통해 성령님을 자신의 대리적 파송자로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의 성격은 오직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통해 부단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시며 이를 가능케 하는 일에 집중돼 있습니다(요14:16, 26).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까지도 성령님은 성도들의 심령에 관계하셔서 여전히 영생하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요14:16).3.결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무능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반응할 수 있는 일체의 지정의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을 일컬어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선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없으며 한결같이 치우쳐 무익하게 됐음을 선포합니다(롬3:11-12). 나아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조차 싫어한다고 지적합니다(롬1:28).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심성이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인해 마땅히 섬길 자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상실된 상태를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시종일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영적 상태를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영적 파산자로 선고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거듭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지적합니다(고전2;14). 그렇습니다. 이제 외부적 타자(他者)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전무할 뿐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의 머리됨으로 인해 온 인류를 부패와 타락으로 몰아가 죄인 되게 함으로서 영적 사망과 육체적 죽음과 최후적 심판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지정의를 발동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일말의 능력조차도 앗아감으로 인류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교리적 내용들을 일컬어 전적타락, 전적부패 혹은 전적무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객관적인 진리입니다.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적 무능자로 타락한 인생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타자'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당위(當爲)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 강론에서는 자연히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택정(擇定)함 말입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칼빈주의 5대 교리)제 2 강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1.도입절대적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 방식은 죄로 인해 전적타락과 부패와 무능에 빠진 인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며 자비며 긍휼의 일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인간의 영적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 곧 영적 사망으로 인한 일체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된 파산자(破産者)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무능한 범죄자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외부적 절대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에로의 선택교리를 요청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요구이며 증언이지 상황전개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나와진 즉흥적(卽興的) 요구만은 아닙니다.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소위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에 대한 반증으로 나온 성경적 대응이며 해명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능력이 범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자의적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의 허구성(虛構性)은 이미 지난번 전적타락 교리에 의한 성경의 자체 증언을 통해 충분히 밝힌바 있습니다. 결코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추호라도 용납하지 않음을 살펴봤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그 신적 기원에 따른 본질적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복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절대성과 충족성을 이렇게 변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3:21).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사람편의 의지적 행위는 절대불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율법을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불의함과 죄악뿐임을 증거합니다(창6:5, 사64:6, 렘17:9). 인간의 본성과 전인격이 죄로 오염되고 부패됐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절대 타자(他者)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관련해서 흔히 사용되는 몇 몇 용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할 줄 압니다.먼저 작정(作定)이라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조성과 만사의 진행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총괄적 계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할 때 이는 창세 전에 미리 작정하신 계획대로 피조세계 속에서 만물과 만사를 그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보존, 관리,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해서 나온 변증(辨證)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경영된다고 할 때 세상에 우연의 산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배후에 존재하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계시적 사실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의 교리적 정립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작정이란 전 우주적 역사를 그 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해 가시는 포괄적(包括的)인 계획을 가리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다음으로 예정(豫定)이란 용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정은 작정의 일부입니다. 작정이 우주만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편적(普遍的)인 사전계획이라면 예정은 우주만물 중 특별히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과 결부된 교리에 특별히 국한시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작정이 내용상 포괄적이고 광의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예정은 지엽적이고 협의적이며 특별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구원과 관련된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을 얘기할 때 주로 사용되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얼마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선택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정(定)한 사실을 가리켜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정 속에는 선택교리와 함께 자연히 유기(遺棄)교리까지도 포함되게 됩니다. 다수 중에 일부가 선택됐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버려진 바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공평할 수 없음은 인간은 본성상 죄값으로 심판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진 자들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전적타락과 부패).그러나 내용이 담고 있는 범위와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정은 보다 큰 범위의 작정 안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로 인해 때로는 예정을 작정으로 대체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작정의 의미는 항상 예정의 내용과 성격인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해서 고전적(古典的) 성경 본문인 엡1:4-5입니다. 여기서 선택과 예정은 분명히 사람의 구원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행13;48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누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작정이란 다름 아닌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정과 작정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리키는 바 구원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2.전개무조건적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시된 성경적 교리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자의적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자정(自淨)능력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남은 의지적 선택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성에 의해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내다보시고(예지) 구원에로 선택하셨다(예정)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르트 회의에 의해 그 부당성이 이미 지적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로 이미 무효화된 구시대적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범죄는 인간을 전인적(지정의)으로 부패케 만듦으로 하나님을 향한 지정의의 기능을 근원적으로 상실한 나머지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도, 더듬어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가 됐다고 선고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기회란 전적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게 돼 버린 셈입니다. 예지-예정론의 허구성오늘날 예지-예정론에 근거한 선택교리는 비단 알미니안적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교단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일부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이를 수용해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지-예정론이란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성경적 논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당신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창세 전에 예지(豫知)하시고 이에 근거해 그 사람을 구원에로 예정(豫定)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2000년 8월25일에 어느 한 사람이 서울의 모교회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발휘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내다보시고(예지) 그를 선택해 구원하시기로 예정했기에 그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됐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리적 논리 하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복음을 자의지적으로 받아들인 그 사람 곧 인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복음을 자원해서 의지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조건적으로 그를 구원하셨다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란 주장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선한 능력이 남아 있기에 얼마든지 그 남은 선(善)을 발동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력으로 취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이런 조건적 선택교리 곧 예지-예정론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이 교리를 정당화시키는 증거본문으로 대부분 롬8:29을 제시합니다. 29절 한 절만을 보면 틀림없이 '미리 아신(예지)자'와 '미리 정하셨다'(예정)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예지-예정의 단계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롬8장 전체를 문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주관에 빠진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며 따라서 허구(虛構)인지를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롬8:1-2에서는 성도들의 죄로부터의 해방이, 곧 성도의 구원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한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더욱 3절에서는 육신이 죄성으로 인해 연약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들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음을 변증합니다. 나아가 7절에서는 옛 사람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굴복할 수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아울러 고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과 이 사실에 대한 확증은 오직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뿐입니다(16절).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옛사람의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자의지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자각(自覺)도 불가능합니다(26절).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판정 받았기에 말입니다(엡2:1).이렇게 롬8장 자체 문맥만을 검토하더라도 29절의 예지란 인간의 자력(自力)적 선택을 미리 보아 알고 계시다는 의미의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예지-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역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구원시킬 자를 예정하셨기에 그들이 누구이며 또한 누가 복음을 수용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예지)라는 사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예정-예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관련 주제를 다룬 다른 본문에서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합니다. 요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본(本)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를 선택한 주체가 제자들 스스로가 아닌 주님 자신임을 분명히 천명(闡明)합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봤던 행13:48에서도 주님을 믿는 주체가 사람이기 이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들'로 제한돼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함'임을 분명히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행16:14을 보십시오. 여기서도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됐을 때 그녀가 복음을 청종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주체가 루디아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주님으로 분명히 소개됩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님께서 루디아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어버린 바 된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지적입니다. 요3:3입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우리는 이상의 일련의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거나 믿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설령 성경 어느 한 구절의 내용 속에서 선택과 믿음의 주체가 사람으로 설명된다 할지라도 앞 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면 결코 사람에 의해 임의대로 선택과 구원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1:12에서는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특권이 인간의 자의적 선택과 신앙적 고백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 같이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자녀 된 근본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고백의 대가와 보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창세 전 선(先)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음임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의지로 말미암았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되는 구원교리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선택적 구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영적 사망자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자로 선고됐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원죄의 생득적 전가로 말입니다(롬3:23, 5:12). 따라서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택적 구원을 임의(任意)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이러 이유로 해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과 관련해 예지-예정론의 논리적 허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그렇다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미 전(前) 강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실존의 비참함을 살펴봤습니다. 영적 사망자와 파산자로서 인간의 전인격적 기관은 하나님을 향해 이미 그 총체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인 사실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마8:21-22).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구원이란 자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뿐입니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외부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또한 불가합니다. 그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아야 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절대 외부적 타자(他者)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됩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당사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사1:18, 44:22, 시103:12, 행4:12).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에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곧 창조주와 절대자로서의 그 분의 절대 주권 안에서 말입니다. 롬9:10-13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이들의 나중 형편을 선택적으로 예정하셨습니다. '큰 자(에서)가 작은 자(야곱)를 섬길 것'을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사전결정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은 이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서 찾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자적 절대 주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좀 더 원색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마음대로'란 의미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과 이의(異意)제기를 예감하고 얘기를 계속 전개시킵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변론합니다.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과 권능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할 말을 잊게 될 뿐이며 그 분의 행하시는 처사는 어느 것 하나도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있을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상 말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저자는 노파심(老婆心)을 발동시킨 나머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기장이와 한 덩어리의 진흙의 비유를 들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을 시도합니다(롬9:20-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창조자의 권능과 주권으로 택자를 임의선택 할 수 있다는 논리적 변증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이상 구원을 위해 선택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항의할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찌했든지 아담 안에서 범죄한 불의한 죄인들로 이미 정죄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롬1:29-31)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定)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지금 저자는 본문들을 통해 철저히 부패하여 타락한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 중에 일부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을 좇아서 구원에로 선택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 속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성경적 은혜의 실질과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 호리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개입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退色)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역할과 기능은 전무할 뿐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무상으로 베푸실 수 있는 전폭적인 사랑의 호의이기에 말입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사역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떠나서는 진정한 은혜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은혜의 성격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 근거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행하시는 예정에 의한 것임을 에베소 기자는 선포합니다(엡1:5). 여기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창조자적 주권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 '오게 하시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6:37, 39, 44, 65). 이는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설명일 뿐입니다. 내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시종일관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다수 중에 일부를 주권적으로 임의(任意) 선택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근거해서 선택적 구원동기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실 때 필요한 자들을 선택적으로 부르셔서 계시의 도구로 선용(善用)하십니다. 이 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원하심을 따라 되는 창조자적 주권에 따라서 소명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 오직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성취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황에 따른 임시조처라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필요에 따라 임시변통(臨時變通)적으로 선택하는 즉흥적 발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임의적 결정같이 보일지라도 창세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先) 주권적 선택에 따른 후(後) 성취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자적 주권이 한낱 창조자의 횡포와 전횡(專橫)으로 오해될 소지(素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무분별하고 소견에 좋을 대로 사사로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민23:19). 창세 전에 세우신 작정과 계획에 근거해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일점 일획의 착오와 차질 없이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으로 경영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신앙과 생명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음이 이런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신앙과 삶의 오직 유일한 최고의 규범으로 작용합니다. 기독교를 계시 의존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기독교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정작 신앙의 내면을 살펴보면 단지 교회적 전통이나 타락한 인간의 종교심을 부추기는데서 나와진 왜곡된 열심을 가지고 그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를 영적 안목으로 예리하게 통찰하는 가운데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의 허구성을 고발합니다. 우리의 기독교적 열심이 과연 성경에 입각한 계시 의존적인지의 여부를 늘 상고하며 확인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빛도 이름도 없는 우리인가요. 왜 막강한 열국 중에 작고 미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민족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가운데서 택자(擇者)를 부르시는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의 동기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發露)에서 찾으십니다. 신7:7-8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본문에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선택의 배경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열국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도구로 사용하시는 데는 이스라엘의 외부적인 열악한 여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배려'가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둘째로 이 사랑의 선택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열조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한 성취를 위해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과 공과가 인정되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선택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열국에 비해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이 동기가 돼서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하사(下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요3:16과 엡1:4, 2:8, 롬5:8과 요일4:10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속죄와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과임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 대속적 죽음을 자원해서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죄악 중에 구원해 주셨을까요. 성경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선포합니다(고전1:29, 엡2:9, 1:6, 눅1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성경은 성도의 신앙적 본분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이라고 강력히 피력(披瀝)합니다(전12:13, 고전10:31, 롬14:8, 엡5:10). 그렇다면 이런 신앙적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롬12:2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모든 지상적 삶의 성격과 방향성을 집중시켜 나가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왜 삽니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결국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이러한 명제들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답변과 이를 추구하는 실제적 삶이야말로 구원받은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의 실질입니다. 우리는 본 강의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택자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선택적 은혜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 와 택자들의 행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히 배제된 선택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살펴 볼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근거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전(前) 강의(전적타락)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의 영적 상태가 스스로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영적 기능과 능력을 본질적으로 상실했기에 독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신앙적 반응을 전혀 보일 수 없는 영적 파산자(破産者)임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앙자는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나 방불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마8:22).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 찾아지는 바(전12:13) 피조자로서 창조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는 무관한자로서 곧 영적 사망자란 지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의 구원은 외부의 절대적 타자(他者)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이런 영적 사망자(불신자)에 의해 시도되는 어떤 행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죄인 됨의 전제하에서는 결코 선(善)과 의(義)로 평가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일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역설적으로 선포합니다(롬1:28-32). 인간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상대적(相對的) 선은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선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극한 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한낱 더러운 누더기 옷과 다를 바 없음이 성경이 보는 해석적 관점입니다(사64:6). 그러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성경은 전 인류를 향해 감히 선포하는 것입니다(롬3:11-12).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느 사람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만 인간의 죄는 사면될 수 있습니다(행4:12).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원수 된 죄(원죄, 자범죄, 불신죄 등)의 빚을 깨끗이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성격은 자연히 인간의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킨 하나님의 독자적인 주권과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를 통해서 베푸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선택에 일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는 그 본연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公義)적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롬9:11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한 구약의 사건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자녀인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에 따라서 야곱을 택하여 아비 이삭의 뒤를 이을 언약의 계승자로 택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난 이후의 에서나 야곱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만한 특별한 사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지극히 육신적이었으며 무책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소극적이지만 이기적이었으며 교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졌다면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독차지 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선악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그를 에서보다 사랑하여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하신 사실을 성경은 소상하게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사역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무용지물입니다. 무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배제됩니다. 만일에 호리만큼이라도 인간의 행위와 공적이 참작(參酌)된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타락교리를 성경스스로가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은 자연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성격이 오직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택이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 과연 몇이나 될는지요. 우리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일는지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이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상의 은혜로 덮어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행2:11).3.결론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의 방편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의 비밀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강퍅(剛愎)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십니다(롬9:18, 11:32). 만일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이 되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택정 함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감당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불사르게 만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선택을 입은 자의 생애를 계속해서 섭리적으로 간섭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일에 선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바 섭리 의존적 신앙관을 확립시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관을 촉발시킵니다. 이런 신앙관의 확립은 흑암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늘 승리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 중에 천지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행복한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이 늘 풍성히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베푸신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개개인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개혁주의 구원론 (칼빈주의 5대 교리)제 3 강제한속죄(Limited Atonement)1.도입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 외부적 절대타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편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에 올라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고 화목과 교통과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도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바 창세 전 선택이란 창세 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사전표식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사전단계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속죄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신다는 속량(贖良)내지는 대속(代贖) 또는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모두 중 일부에게 만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속죄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면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될 때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바 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정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막16:15-16). 이런 결과를 볼 때 비록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소위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속죄의 실상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서 언제나 제한속죄 교리를 성경의 바른 증언으로 신앙고백을 해 왔습니다.2.전개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으나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제한속죄 교리는 앞에서 언급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내용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제한속죄는 차별적으로 일부에게만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속죄의 필요성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을 좇아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죄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의 예비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속죄(贖罪)가 필요한 것일까요. 속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적 구원사역을 일컫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는 어떤 선행과 공로의 대가로도 죄의 문제를 탕감 받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의기준과 가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사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구체적 시행에 있어서 그 정당한 실효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택이 미래적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전표식인 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함과 동시에(무죄선언)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인됨(칭의)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호 관련 속에서 선택은 필연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즉 죄의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택교리 후에 바로 속죄교리가 뒤따르는 당위성이 이런 이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만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는 얘깁니다. 속죄의 성격과 방식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절대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인간의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적 선과 의의 소유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적(代贖的) 속죄'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 타자가 대신 죄의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절대타자에 의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영적 파산자입니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죄인이 아닌 절대적 타자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됩니다. 죄와 불의와 허물이 전혀 없는 절대 타자(他者) 말입니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이제 인간의 속죄는 절대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죄 값은 사망 곧 죽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23). 구약의 율법의 제사제도하에서 요구되어진 일체의 희생제사 행위는 바로 이런 속죄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입니다(레1-7장, 히9:13). 이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레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에서 나와진 실천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히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 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표현합니다(막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희생양으로 오신 분(요1:29)임을 언급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절대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절대 선과 의로우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빌2:5).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말입니다(요1:14, 18). 그러기에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육화(肉化)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시고(히4:15), 죄를 모르시며(고후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2:22)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신(神)-인(人)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심으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눅1:26-35). 곧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비밀의 경륜 속에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전 생애가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하신 바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치시고 이루시는 일에 집중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요17: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막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대속적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감히 선포합니다(롬8:1). 다시 말해 그 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다시 살아나심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아가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롬3:24) 그 결과로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성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거듭나셨는지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셨는지요. 구원 받으셨는지요. 그래서 지금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분명한 목적과 가치관의 전환 속에서 살아가시는지요. 물론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우리의 연약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때마다 상한 심령으로 자백하는 일과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일에 진보가 있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8-10).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이제 우리는 본 교리의 핵심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를 성경적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습니다.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결국은 창세 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제 2 강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속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은 그 가치면에서 그처럼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합니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실체를 향한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이렇게 해명합니다. 히9:13-14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신 바 그 가치의 우월성과 속성상 영원성으로 인해 단번에 드리신 바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린 셈이라고 설명합니다(히10:12-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이제는 추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더 이상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 '영 단번'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전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공효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는 온 인류의 죄를 넉넉히 담당하시기에 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이루셨다"(요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승리의 일성(一聲)입니다. 비록 죽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서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계시적 발언인 것입니다(히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 (히10:20) 생명의 길이 열려진 셈입니다.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도말 되기에 족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속죄의 공효적 능력의 측면에서 말입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속죄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해야만 하셨느냐의 관한 내용 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적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요. 바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남은자'(사10:20-22, 롬11:4-5)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사실을 다양한 표현과 방식으로 설명합니다.먼저 마1:21입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인용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역적 측면을 확인하게 되는 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을 지적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온 인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조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만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죄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저들의 대속물로 오셨다는 사실의 증언입니다. 눅19:10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구일까요. 온 세상 만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킵니다. 요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온다는 지적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습니다(요10:1-6). 모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만이 나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얘깁니다. 요5:40을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께 오기를 원치 않는 일단의 무리 또한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양무리가 아닌 연고입니다.막16:15-16에서 마가는 복음증거와 이에 따른 결과를 얘기하면서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음을 동일하게 지적합니다.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같은 복음의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제한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실질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가 그들 중 일부에게만 선별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제 4 강의를 통해 재차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주신 자들만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에로 이끄십니다(요6:39). 여기서 구원에로 이끄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이 결국 잃어버린 자들만을 위해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속죄사역의 효력은 무한하기에 온 인류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속죄사역의 적용의 범위와 대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바 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곧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이고 양보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행13:18입니다. 본 절에서 누가는 이방인들 중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있는 사실을 바울의 전도내용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기쁘신 뜻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자들입니다. 선택과 구원은 약속과 성취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선(先)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후(後) 성취의 내용이 있을 수 없듯이, 선(先) 선택이 있기에 후(後) 구원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행18:10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으로 심히 두려워했으나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하시면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로 고린도 전도에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내 백성' 곧 주님의 백성이 따로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적용의 측면에서 결과론적으로 접근할 때 결국은 일부의 택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제한적 죽음이란 신학적 명제를 유발시킵니다. 따라서 제한속죄란 성경의 여러 말씀을 종합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규명해 본 결과에서 얻어진 당연한 귀결입니다. 단지 견해와 입장이 다른 반대편의 무리를 거부하고 성토하기 위해 취해진 억지발언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일부 성경 구절을 통해 '모든 사람(고후5:14-15)' 이나 '세상(요3:16)'을 위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으며 또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신 것으로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본(本) 절에만 제한시켜서 지엽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얼마든지 보편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될 명제는 언제나 주어진 본문을 문맥과, 한 장 전체와,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 곧 구속사적 경륜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나름대로 코끼리의 모양이 넓은 벽 같다느니, 굵은 통나무 같다느니, 아니면 큰 부채와도 같다는 식의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가 될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가 마치 통나무 같이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마치 통나무 같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한다면 틀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으신 대속적 죽음이며 세상을 위한 죽음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다른 본문을 통해 그리고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총체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히 해명해 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보다 확실한 내용을 통해 불확실한 부분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3.결론 우리는 제 2 강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부의 특정한 사람들에만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라면 저들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 또한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논리의 귀결입니다. 더욱이 보다 많은 성경의 본문이 이를 실제로 뒷받침 해주고 있음을 위에서 확인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는 능력면에서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히9:14). 그러나 적용의 대상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결코 온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이 성경의 솔직한 증언인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기 위해 속죄 양으로 오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공효가 미치는 대상을 볼진대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들 곧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그 분께 주신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코 성경은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증거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 매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합니다(마25:41).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유황 불못에 처해지는 광경을 봅니다(계20:11-15). 이들은 결국 유기된 자들 곧 버려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속죄사역의 공효가 이들에게 미치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심판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영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의 속죄의 공효는 제한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을 선별해서 유효하게 적용시키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를 덧입은 자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으로 변환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사람(엡2:15), 하나님의 권속(엡2:19), 천국시민(빌3:20)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에 함께 지체로 연합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느 칭함보다도 영광스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피로 친히 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된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와 방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유기체란 말입니다. 몸입니다. 공동체입니다. 이 몸으로서의 교회공동체의 개념을 잃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성도의 구원을 보증해 주는 유일한 천상의 기관입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보증의 권한의 열쇠를 오직 교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소위 천국열쇠 말입니다(마16:19). 따라서 복음적 삶을 살아감이 교회를 세워나가는 첩경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하는 삶의 실질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경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주님은 바로 세상 속에 남은자들을 위해서만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만 성도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정당한 발휘로 정의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품성으로 닮아 가는 삶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칼빈주의 5대 교리)제 4 강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1.도입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전제하는 바 죄를 없이해 주시는 속죄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아울러 선택이 다수 중에 일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택정하시는 주권적 사역으로 인해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또한 전 인류가 아닌 바로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제한적(制限的)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공효의 능력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것이지만 공효의 범위와 대상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해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차별적이고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효력이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미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일컬어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을 구원에로 부르실 때 사람 편에서 의지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성령의 사역은 훼방을 받아 목적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 나와진 내용이며 동시에 철저히 성경에 기초를 둔 교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으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며 이 과정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항력적'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괴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강요해서 인간의 뜻을 거스려 역사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불가항력적 은혜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단어의 올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택자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면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령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죽어주신 모든 자들로 틀림없이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게 하신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오늘 강의에서는 유효한 부르심으로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도리에 대해서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효력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실제적 구원에로 부르시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구원은 실로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2.전개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이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효과적으로 불러내셔서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때 성령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외적 부르심(outward calling)외적소명을 일명 외소(外召)라고 부릅니다. 이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이나 전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의 복음이 불특정 다수나 개인을 향해 전해지는 것을 가리켜 부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고합니다(딤후4:2).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막16:15).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십니다(마28:19).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행1:8). 이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복음을 들을 수 없으며 듣지 못하면 믿을 수도 없는(롬10:14) 구원의 기본도리에 근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한결같은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누구도 이 직무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알지도 못하는 고로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통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고전1:21).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과정에서도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열 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눅9:1). 이들은 각 촌에 두루 다니며 처처(處處)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후에 따로 칠십인을 세우셔서 둘씩 앞서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전파하라고 이르셨습니다(눅10:1). 이들은 각 동네를 찾아다니며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병든자를 고쳤습니다. 제자들의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는 항상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거절하는 자들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어느 동네를 무론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가리켜 외적 부르심(소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방식은 변하지 않고 사용됩니다.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과 방법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통해 오지(奧地)의 땅에서 그리고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불모지에서 복음은 끊임없이 증거됩니다.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생명을 불사하고 전도자들의 활약은 중단 없이 진행됩니다. 주님 안에서 먼저 된 자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영적 충동이 우리를 자극해 지속적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효과를 전파하게 됩니다. 이 일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복음 증거를 신학적으로 외적 부르심이라고 일컫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에는 다수의 청중을 향해 대중전도를 하는 경우와 그룹 내지는 개인을 향해 전파하는 개인전도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사도 바울의 복음증거에서 외적 부르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13-14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이차 전도 여행 시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광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배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강가에 앉아 있는 일단의 여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접근해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누가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절에서 우리가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이 자주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말은 루디아라는 여자만 홀로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보면 강가에는 얼마간의 여인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울은 일행과 함께 기도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가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기도처를 찾고 있었기에 기도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 일차적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내친 김에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내적 충동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공개적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입장과 상황으로 보건대 얼마든지 가능한 추리입니다. 아니 상황의 전개상 이들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도처의 위치를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분위기로 전환된 사실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과 그의 일행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루디아라는 여인 뿐 아니라 그곳에 함께 모여 있었던 일단의 여자들이 동시에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저들이 들은 사실을 일컬어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앞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개인 전도를 통해서, 교회 차원의 전도집회를 통해서, 또는 의도된 대중전도집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일컬어 한결같이 외적 부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부르심 그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외적으로 전해지면 여기에는 크게 두 부류의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반응이 그것입니다(막16:15-16, 눅9:4-5, 10:5-11). 때문에 외적 부르심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계적으로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을 요구하는 바 내적 부르심을 통해서만이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내적 부르심에 접촉되지 못하면 결코 자의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내적 부르심에 접촉이 되면 자의적으로 구원을 기피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위한 예정을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창세 전부터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유효한 부르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법입니다.내적 부르심(inward calling)내적 부르심을 내적 소명 또는 내소(內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부르심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이 사람을 도구로 해서 주님의 복음을 불특정 다수나 소수 또는 개인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내적 부르심이란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 중에 일부를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속죄와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다수 중의 일부가 복음에 반응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들이 바로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으로 저들의 죄를 속량해 주신 자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당신의 백성을 부르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에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십니다. 행16:14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문은 세 가지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다'는 사실과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었다는 사건과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을 루디아가 듣게 된 사건이 곧 '외적 부르심'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소위 전도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먼저 복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빚진 자들로서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전도)에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자들입니다(딤후4:2).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인 전도자의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한결같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만이 반응합니다. 이들만이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수납합니다. 여기서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청종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내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루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 문맥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루디아만이 여럿 중에서 유독 홀로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뭐가 특별한 면이 있어서일까요? 본문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된 성경적 믿음에서 나와진 신앙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성경적 믿음은 한 사람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루디아의 하나님을 향한 공경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는 접촉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특히 누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란 표현을 유대교에 접촉된 경건한 이방인들을 향해 사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행10:1-2).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청종할 수 있게 된 것은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녀가 이미 하나님의 택자로 존재해 나오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6:65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따라서 그녀의 하나님 공경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선행적으로 그녀에게 작용해 오다가 때가 차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게 하시고 이런 사건을 계기로 그녀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이 간섭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先) 선택의 역사가 선행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특정인에게 선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와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한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일관성을 띤 채 동일한 사람에게 유효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본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수 중에 일부를 부르셔서 구원에 접촉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일컬어 내적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다수 중 일부가 반응하게 되는 경위를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택자들을 향한 유효한 부르심우리는 여기서 내적(유효적) 부르심의 범위와 대상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내적 부르심의 주체는 성령님이란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행16:14에서는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청종하게 하신 당사자가 주님이심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으로서의 성령님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롬8:9).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계획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사역적 측면에서 구원사역을 분담하고 계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엡1:4-14). 이때 성령님의 사역은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인치심의 역할을 담당하십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적 구속사역을 유효하게 적용시킴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기업의 후사로 삼으시는 역사를 수행하고 계심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엡1:13-14, 고후1:22). 그렇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의 주체가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제한적이지만 유효적으로 적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십니다. 여기서 유효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구원에로 부르실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령의 내적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는 것을 통해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을 남김 없이 불러모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적 부르심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때에 택자들의 응답은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신적 감동과 감화의 역사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영혼에게 그의 인격을 통해 유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해 섭리적으로 간섭되고 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고 당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절대로 타의에 의해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요구를 받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의 실제적 배경이 이렇습니다. 요6:37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본 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예정자들을 가리킵니다(엡1:4, 요15:16). 그런데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은 절대 안전이 보장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그 장중에 붙들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계1:18). 만유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0:28-29). 요10:4과 27절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보면 목자는 자기의 양을 알고 양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부르면 따라오게 돼 있음을 우리에 들지 않은 일단의 다른 양들(26절)과의 비교를 통해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아 죄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눅19:10, 마1:21)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 가운데 구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복음의 말씀으로 당신의 양무리를 부르십니다. 찾으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말입니다. 이때 주님의 양들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 알고 기꺼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때문에 이때의 부르심은 강요에 의한 억지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본능적으로 알아서 기쁨으로 찾아가듯이 그렇게 동일한 원리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택자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얘깁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일컬어 신학적으로 유효적 부르심 또는 불가향력적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주님의 생명에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한 몸 곧 보편의 우주적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고전12:12-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말론적 가정공동체 말입니다(엡2:14-16, 19). 이 보편의 교회가 지상에 가시적으로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지역교회는 늘 천상의 보편의 교회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가는 일에서 교회적 존재이유와 본질적 가치를 부단히 창출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존재양식으로서 말입니다. 이를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말씀에 대한 풍성한 이해와 이에 따른 순종력의 발휘입니다. 지식을 좇아 행하는 신앙적 삶 말입니다(롬10:2-3).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적 권세가 충만히 발휘될 뿐 아니라 그 통치를 원활하게 받고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현존성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형편은 교회의 천상적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지고 부족할 뿐임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가 무엇인지 조차 성경적으로 바르게 해명해 내지 못함으로 해서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임의대로 적용시키는 나머지 인간의 종교심만을 한껏 부추기는 가운데 급기야 우상숭배의 이교도적 집단으로 변질돼 가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짖기는 하는데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일신상의 일락(逸樂)과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성격을 성경은 우상숭배 내지는 자의적 숭배신앙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골2:23, 3:5).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혐오하실 뿐 아니라 결코 방관치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만홀(漫忽)이 여기는 처사이며 동시에 망령된 행실이 되기 때문입니다(출20:3-7). 이와 관련해서 계시록의 일 곱 교회를 통해 주께서 책망하시고 권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교회적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줄 압니다(계2-3장).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고 심지어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교회와 사단의 교회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귀기울여야 될 줄 압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는 오늘도 여전히 현존하는 모든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준엄하신 경고와 경계의 말씀입니다. 3.결론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는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지각과 감정과 능력을 근원적으로 상실했기에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기회란 전무한 것이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무능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에 호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공효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와 필연을 유발하게 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의 교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하나님의 신비스런 사역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들은 다수 중 얼마를 복음에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선물의 의미로 수납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대가(代價)없이 말입니다. 이때 이 사역을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담당하시는 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택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을 저항 없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지적입니다(행13:48). 이런 사실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택자들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이 관념이 아닌 실질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령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가 이런 신비한 구원사역을 현실로 절감하게 만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칼빈주의 5대 교리제 5 강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1.도입이제 본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주제 하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계획'에 관해 연속적으로 공부해 왔습니다. 처음 강의에서 밝힌 바 있듯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어디까지나 소위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인본주의적 구원관에 대한 오류와 부당성을 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에서 접근해 그 내용의 허구성을 성경적 변호와 반론을 통해 지적하여 성경의 본래적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의 어떠함을 체계화시킨 교리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성도의 견인교리는 달리 '성도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eternal security)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성도가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기에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결코 중도에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저들의 구원의 정체성을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기에 구원받은 인간이 남은 생애의 기간동안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날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지의 발동 여부에 따라서 구원의 향배(向背)가 좌우될 수 있다고 보기에 이런 견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이와 같은 저들의 주장의 반증(反證)으로 나와진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적 증언입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속성과 지속성 말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성도의 견인교리 또한 독립적인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앞에서 전개시켜 나온 제반 교리적 내용인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에 의한 주권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제한적 속죄사역과 이에 대한 구체적 적용인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불가항력적 은혜)과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 성격과 시작이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주권)으로 말미암는 신적기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엡1:4-6). 따라서 성도의 구원이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 구원교리의 뒷받침(오직 믿음)과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실제적 경험(변화된 행위)을 동반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이상 성경적 구원은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결코 취소되거나 방해를 받거나 상실될 수 없음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해서 구원은 믿음과 행함의 이중적 요건의 충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호리라도 행함이 개입될 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개념은 사라지고 선물의 의미는 상실되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검증과 진단의 필요성으로 제기되는 '변화된 경험적 행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 편에서의 일말의 선행이나 공적이 개입되거나 참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경적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이기에 말입니다(롬3:28, 엡2:8-9, 딤후1:9). 따라서 이 표현은 은혜의 선물로 대가없이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의 새생명적 새인격의 활동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됨으로 한 사람의 불가시적 구원의 실질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롬6:11-14, 12:1-2, 갈2:20, 엡4:1-3, 22-24, 골3:1-3). 야고보 사도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지적은 이상의 구원과 행함의 함수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적 배경 속에서 나와진 결론입니다(약2:17, 26). 그렇습니다. 성도의 구원의 실상은 변화된 새인격의 구체적 활동으로 확인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성격을 옛자아의 사망선고와 더불어 새생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적 활동의 전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고후5:17, 갈2:20, 엡4:22-24).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처음부터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통해 영생하는 구원의 새생명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의 에덴의 삶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을 삶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영생의 실질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창2:16-17). 오늘 강의는 오직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수여되는 구원의 영원성과 영속성이라는 차원에서 흔히들 표현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교리인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전개성도의 견인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중도에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결코 취소되거나 중단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도의 견인은 성도들이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음을 포함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지속적으로 믿음 안에서 보존, 보호,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간섭과 능력으로 말입니다. 이런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총체적 구원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얻게 하십니다. 다른 한편 성도의 견인이 '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을 가리킨다고 할 때, 이 말은 단순히 죄책(罪責)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나머지 지옥의 형벌을 피하게 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일체의 죄책에서 사면될 뿐 아니라 이후 남은 생애의 기간을 살아갈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함을 받게 될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둘 다를 내포합니다. 사람이 죄책에서는 구원을 받고 죄의 권세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곧 성령의 내주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넉넉히 죄를 굴복시킬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생명의 능력을 성령을 좇아서 발휘시켜 나갈 때 육체의 욕심을 넉넉히 제어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롬6:11-14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따라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발휘하는 바 중도에서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는 있을 망정 근본적으로 구원을 잃거나 믿음에서 아주 떠날 수는 없습니다.창세전 은혜로 선택하신 구원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구원하심은 철저히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호리라도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편의 선의적(善意的) 호의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아직 세상 가운데 태어나거나 어떤 선악간의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당신 편에서 일방적으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창세전이란 말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조건적 보상이 아닌 하나님편의 호의적 선물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아울러 여기서 구원이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 선물의 개념으로 설명됨은 구원의 성격이 철저히 하나님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무조건적 사역임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 여부와 무관하게 주어진 선물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구원 이후의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취소되거나 파기될 수 없는 독특한 성격적 특징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롬9:10-13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얘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근거가 인간편의 선행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사실 출생 이후의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성격면에서나 행동면에서 결코 형 에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점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내성적이면서도 약삭빠르고 매사에 계산적이며 일면 교활한 면까지 갖고 있어서 번번이 형 에서의 비위를 건드리기가 일쑤였습니다. 한 번은 형 에서가 허기져 들어온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팥 죽 한 그릇으로 차지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 기력과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아비 이삭을 속여 형 에서로 가장한 채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에서를 피해 어미 리브가의 본향인 하란의 라반 삼촌에게로 피신해 살면서도 그의 상업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해서 끊임없이 삼촌과의 첨예한 재산상의 갈등과 대립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그의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야곱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먼저 택하셨습니다.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과 예정에 기초해서 말입니다. 이 선택은 사람의 행위와 무관한 것으로 인해 그의 출생 이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사랑의 징계는 가해질 망정(히12:5-6) 이로 인해 아주 버리시거나 구원을 다시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의 구원은 그 근본이 신적 기원에서 찾아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번 하시고자 한 바는 결코 중도에서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음이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절대 주권자의 속성이며 성품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속죄 효력의 영원성 성도의 견인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 효력의 무한성과 영원성, 그리고 영속성에서도 찾아집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구약의 짐승제사는 제물 자체의 열등함과 제사계시의 모형론적 성격으로 인해 처음부터 대속물의 실체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全)구속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주신 예표적 제사제도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구약 제사제도의 계시적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제사의 희생제물은 새언약 안에서 자기 몸을 한 마리 어린양 같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히9:11-14, 요1:29). 한편 구약제사에 드려진 제물은 그 가치의 열등함으로 인해 그리고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예표론적 성격으로 인해 불완전 할 뿐 아니라 한시적으로만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인해 해마다 다른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히10: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제사의 경우는 다릅니다. 구약제사의 참 형상이며 동시에 실체적 계시사건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효력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며 영속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9:12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해마다 드리는 반복적인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시기에 가치적 측면에서 무한하시고 제사의 계시적 성격상 구약제사의 실체로 오신 분이기에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확증하면서 '영원하신 성령'(히9:14)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히10장에서는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언급합니다. 12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절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7-18절입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제사가 갖는 효력이 영원하고 지속적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더 이상 사라졌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영단번(once for all)에 드려진 제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무한하셔서 그 효력이 미치는 범위와 시간이 무한정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의해 한번 죄사함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결코 그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을 결코 잃거나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롬8:1)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3:23-24, 4:25).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사면령(赦免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선포는 교리적이고 원리적 측면에서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 주신다는 내용이지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부터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적 죄성은 여전히 우리를 옛사람이 종노릇했던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짓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갈등과 대립과 긴장을 설명함이 이런 배경에 근거를 두고 기술한 내용입니다(갈5:16). 그도 역시 롬7:21-25에서 보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이 상호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음을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넘어가면 로마서 기자가 새롭게 발견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를 해방시켜 준 사실로 인해 죄책의 면제 뿐 아니라 죄의 권세까지도 이길 수 있는 영적 힘을 공급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까지도 넉넉히 이루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수행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기계적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거듭난 새인격의 새생명의 능력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발휘해 나가는 것을 통해 가능해 집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갈5:16). 거듭난 새생명적 활동이 발휘되기에 이런 사건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통해 죄의 권세를 넉넉히 제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삶 말입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이런 성화의 삶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빌2:12). 우리 안에서 능력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넉넉히 죄를 굴복시키는 것을 통해 보다 진전된 성화의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게 됨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 가실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빌1:6, 4: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功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승리할 수 있는 은혜의 왕노릇 하는 권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롬5:21). 성도의 견인교리의 보장이 이런 구원의 원리와 실제적 적용을 통해 나옵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잃어지거나 취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효력 또한 영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것을 통해 우리의 구원 또한 영원하고 지속적이어서 어떤 경우라도 절대 안전함을 보장해 줍니다.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약속성도의 견인이 구원의 영원한 안전과 지속적인 보장을 의미한다 함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과 예정에 근거함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는 시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인간편의 행위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하나님편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창세전 예정은 구원에로의 현재적 소명과 칭의로 연결돼 종말론적 영화의 단계까지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중도에서 취소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일관된 내용임을 파악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택자들을 세상 가운데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해서 그 최종적 완성인 영화의 단계까지 인도하실 것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6:39). 그렇습니다. 성도의 견인교리인 '한 번 구원의 영원성과 영속성'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속에 이미 처음부터 보장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연히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의한 대속적 구속사역의 효력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무한한 것임을 증거합니다(히9:14). 다시 죄에 대해 제사드릴 여지가 없는 영(永)단번의 일회적이고 영구적인 속죄사역이었음을 피력합니다(히10:12-18). 때문에 이런 주님의 속죄사역의 실제적 적용대상인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죄의 문제가 영원토록 도말 됐기에 다시 죄에 대해 추가적으로 드릴 대속적 희생제사의 필요성이 전무(全無)하게 됩니다(히10:18). 구원 이후 성도들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범할 수 있는 죄의 문제는 상한 심령의 자백을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아울러 밝히고 있습니다(요일1:8-9). 따라서 구원 이후에 성도들이 계속해서 지을 수 있는 범죄(갈5:16-21, 골3:5-10)는 구원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과 성격이 영 단번(once for all)으로 마감된 것이기에 말입니다. 다시 죄에 대해 추가적으로 드려야 되는 제사의 필요성이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목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는 바 지속적인 인격적 교통과 사귐을 위해 철저한 자백을 통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 뒤따라야 될 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6-7). 성도의 견인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완벽하게 적용시키시는 성령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해 다시 한번 보증됩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령님을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 소개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인치시는 작업을 통해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를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셔서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십니다(엡1:13, 고후1:11).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자들인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면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요14:16-17, 고전3:16, 6:19). 이후 지속적으로 성도들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성화의 삶을 부단히 추구해 가는 일에 유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갈5:16). 이때 죄를 책망하시며(요16:8) 주님의 뜻을 더욱 밝히 나타내 보이시는 사역을 담당하시는 것을 통해(요14:26, 16:13)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는 사역을 충실히 수행하십니다(딤후3:16-17). 성도가 신앙의 중도에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믿음에서 떠날 수 없음이 이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적극적인 구원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들을 다시 정죄 하거나 송사 할 수 없습니다. 사단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가당치 않습니다(롬8:33-39).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며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창조자이시고 주권자이시기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성경은 엄히 증거합니다(요10: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성도의 구원은 절대 안전합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보증하시고 보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결론성도의 견인교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결론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내용인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예수님의 제한속죄, 성령님의 유효적 부르심(불가항력적 은혜)의 결과로 성도의 견인교리의 성립이 가능해 집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구원과 믿음의 영원성과 영속성을 보증하는 바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중도에서 결코 구원을 상실하거나 아주 믿음에서 떠날 개연성(蓋然性)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그가 처음부터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구원에 접촉된 것이 아니거나 일시적인 실족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성격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의한 신적기원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인간 편에서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 의해 결코 영향을 받을 수도 받지도 않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혹자(或者)는 이를 두고 성도의 삶을 방종으로 유도하는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반증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고후5:17).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갈2:20). 따라서 옛 사람적 육체의 소욕을 좇던 삶에서 새 사람적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삶에로 방향전환이 일어납니다. 천상의 본질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지상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무익한 가치관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라고 설명합니다. 천상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치관을 부단히 추구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기독교적 신앙의 관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만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적 관점이 총체적인 방향에서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 지향적이며 현실적인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제아무리 신앙적 열심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그런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바른 신앙관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의 정체성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인 바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으로 판정됩니다(마7:21-23).성경적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로 나갈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때문에 자아와 자존과 자만과 자긍의 요소들은 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과 밀접하게 연루되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항상 사단의 유혹에 노출돼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마16:22-24).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궁극적 관심으로 삼는 것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과 진리성이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에 이르는 지식에 근거한 신앙이 아닐 때,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모습과 모양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기며 구름같이 몰려든다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거기에 참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온전한 성경적 순종은 발견되지 않습니다(롬10:2-3). 대신 인간의 부패한 종교심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적 무속신앙일 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이교도적 제사행위이며 가나안의 종교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그 내용과 성격의 특징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이에 신실히 접촉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것에서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과 진리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코 방종과 이기적 욕심에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성도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