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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

아침그림 2015. 10. 5. 06:50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


이상헌 교수

목차

감사의 글
약어표

1. 서론: 경향성의 개념과 실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 비젼

2. 경향성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적 전통
에드워즈의 배경 속에서의 경향성에 대한 개념
경향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개념

3. 경향성으로서의 존재
에드워즈의 성향적 존재론
창조된 세계의 영속성으로서의 경향성과 법칙

4. 관계적이며 역동적인 것으로서의 존재
존재의 구조로서의 경향성과 법칙
존재의 역동적 원리로서의 경향성과 법칙

5장 정신의 경향성으로서의 상상력
로크와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정신의 경향성이 가지는 상상력

6장 미적인 감각으로서의 상상력
정신의 경향성과 아름다움의 감각
상상력의 존재론적인 기능

7장 하나님의 증대하는 충만성
성향과 현실태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충만성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확대

8장 하나님과 세계의 생성
자신을 확대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성과 역사의 의미와 운명
세계의 생성의 리듬
감사의 글

필자는 이 연구과제를 완성함에 있어 많은 개인들과 기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 바,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말하게 되어 기쁘다. 필자는 논문의 지도교수였으며 친구였던 하바드 대학교의 리차드 라인홀드 니버(Richard Reinhold Niebuhr) 교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분은 먼저 필자의 신학교 시절 필자에게 에드워즈의 저작들을 소개하셨고, 그 후 에드워즈의 경향성의 개념에 대한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하셨으며, 또한 이 책을 쓰는 여러 해 동안 필자에게 끊임없는 지원과 열정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분은 필자의 이같은 연구를 위해 계속되는 특별한 읽을 거리들을 안내하였는 바, 그것은 필자의 이 연구계획의 모든 단계에 아주 중요한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필자는 그분에게 지성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빚진 바를 다 갚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필자는 이 연구계획을 강하게 지원하여 주시고 여러 해 동안 유용한 안내를 하여 주신 하바드의 알렌 하이머트(Alan Heimert) 교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에드워즈 저작들의 예일판을 정리한 대표적인 편집자인 예일 대학교의 존 스미스(John E. Smith) 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분은 여러가지 일을 통하여 필자를 충고하고 격려함으로써 많은 유익을 주었다. 에드워즈 사상을 연구하는 다른 많은 연구자들처럼, 필자는 맥코믹 신학교의 토마스 쉐퍼(Thomas A. Schafer) 교수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는 예일 대학교의 바이네키 도서관(Beinecke Library)에 있는 에드워즈의 "문집"(Miscellanies)에 대한 그의 필사본을 필자가 볼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에드워즈에 대한 폭넓은 학문적 지식을 필자와 나누었다. 또한 다른 많은 학자들과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에드워즈에 대한 해석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다. 특별히 고인이 되신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월러스 앤더슨(Wallace E. Anderson) 교수, 미네소타 대학교의 롤란드 델라트르(Roland Delattre) 교수, 프린스톤에 있는 신학연구소의 폴 램지(Paul Ramsey) 교수, 브릿지포드 대학교의 윌슨 킴나(Wilson H. Kimnach) 교수 등에게 감사드린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토마스 길레스피(Thomas W. Gilleppie) 학장에게 특별한 감사의 말을 드린다. 그는 에드워즈에 관한 이 연구계획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수들의 연구에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여러 해에 걸쳐 필자를 격려하였던 프린스톤 신학교의 직전 학장이었던 제임스 맥코드(James I. McCord)에게 빚진 바가 크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필자의 동료인 데이빗 윌리스(David Willis) 교수는 필자의 원고의 일부를 읽어주었으며, 도움되는 논평을 아끼지 않았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다니엘 밀리오리(Daniel L. Migliore) 교수 또한 필자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작업하는 동안 필자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프린스톤 대학교의 존 윌슨(John F. Wilson) 교수를 위시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과 다른 분야의 동료들과 에드워즈의 전반적인 신학 및 철학에 대해서 대화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있다. 필자가 그들에게 배운 바에 의해서, 이 책의 내용은 이전보다 확실히 좋아졌다. 필자의 학생이었으며, 지금은 베델 대학의 교수인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다. 그는 필자의 첫 번째 원고를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읽은 후, 스타일과 내용에 대한 도움되는 제안을 해주었다. 그의 도움은 최종적인 원고를 쓰는데 있어서 필수적이었다. 프린스톤 신학교 공동체의 여타의 수많은 분들의 우정과 격려가 이 연구계획을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첫 번째 원고의 여러 부분들이 안식년 기간(1975-1976) 동안 쓰여졌었다. 그 기간 동안 ACLS(the American Council of Learned Soceities)는 필자에게 연구원으로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3년의 여름 학기 동안 연구 휴가를 가질 수 있게 배려해준 프린스톤 신학교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1970년과 80년 어간에 그곳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하였고 또한 많은 교수 연구비를 지원한 미시간 주에 있는 홀랜드 시의 호프 대학교에 감사드린다. 호프 대학에 있는 필자의 옛 동료 교수들이 본인에게 보여주었던 호의와 격려를 잊을 수 없다.

이 책의 출판을 준비하는 동안, 필자는 프린스톤 대학교 출판국의 훌륭한 직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별히 다이앤 글로브먼(Diane Grobman)과 재닛 스턴(Janet Stern)의 편집에 감사드린다. 필자의 이 연구계획에 관심을 갖고 수년에 걸쳐 필자를 격려한 편집책임자인 샌포드 쌔쳐(Sanford G. Thatcher)에게 특별한 빚을 지고 있다. 그는 높은 기대수준으로써 필자의 마지막 원고 준비를 도왔으며, 또한 계속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바드 대학교의 앤도버-하바드 도서관과 와이드너 도서관, 프린스톤 신학교의 스피어 도서관, 프린스톤 대학교의 화이어스톤 도서관의 직원들로부터 받은 호의에 감사드린다. 필자는 이 연구를 위해 BRBMLY(the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Library of Yale)를 여러 해에 걸쳐 자주 방문하였는 바, 그곳의 직원들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감사한다. 그들은 에드워즈의 미간행 원고로부터 많은 항목을 각주로 사용하는 일을 필자에게 허락해 주었다. 또한 필자의 원고를 타자해 주었을 뿐 아니라, 스타일에 있어서 여러 면들을 지적하여 준 린 코사노비치(Lynn H. Kosanovich)에게 감사한다. 책의 색인부분을 타자하여 준 최병진에게도 감사한다.

이 책을 쓰는 일은 많은 부분에 있어 온 가족의 일이었다. 필자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깊은 은혜와 감사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필자의 아내 이인숙은 이 책을 쓰는 여러 해 동안 필자에 대한 믿음과 이 연구에 대한 끊임없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동지애와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아들 서형과 세상에서 짧지만 훌륭한 삶을 보여준 필자의 딸 미형은 이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 가운데, "에드워즈에 관해 연구하는 중이지요?" 라는 인사를 자주 하면서 필자를 격려하였다. 필자의 부모되시는 작고하신 이원우 목사님과 어머니 차영옥 씨는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미국으로 필자를 유학보냈는 바, 그들은 필자가 이 책을 완성하는 전 과정 중에 계속되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약어표

FAJ Jonathan Edwards: Representative Selections, ed. Clarence H. Faust and Thomas H. Johnson (New York: Hill and Wang, 1962)

HGT The Philosophy of Jonathan Edwards from His Private Notebooks, ed. Harvey G. Townsend (Eugene: University of Oregon Press, 1955)

PH Treatise on Grace and Other Posthumous Writings Including Observations on the Trinity, by Jonathan Edwards, ed. Paul Helm (Greenwood, S.C.: Artic Press, 1971)

THA Exercises Commemorating the Two-Hundred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Jonathan Edwards (Andover, Mass.: Andover Press, 1904)

WC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4 vols .(New York: Robert Carter and Brothers, 1868)

WEA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ed. Wallace E. Anderson, vol. 6 of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ed. John E. Smith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WG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4 vols. (New York: G. and C. and H. Carvill, 1830)

WL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4 vols. (New York: Leavitt and Allen, 1852)

WS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10 vols. (New York: S. Converse, 1829-1830)

YALE MSS Yale Collection of Edwards' Manuscripts,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Library, Yale University




제 1장 서론: 경향성의 개념과 실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 비전

최근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데에 대한 많은 책임이 있는 밀러(Perry Miller)는 그 청교도적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에드워즈가 "그 당시 지성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통찰들 중 어떤 것은 그의 시대를 아주 앞서 갔기 때문에 우리 시대가 그를 따라 잡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고 주장하였다. 밀러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다양한 철학적 발전에 대한 에드워즈의 창의적인 적응에 근거하여 이러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시대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신학적인 전통을 재진술하였으며, 특별히 로크의 경험론과 뉴톤의 과학을 채용하였었다.

이 책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에드워즈는 밀러가 인식하였던 것보다 실제에 있어 더욱 "현대적"이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 중에서 성취한 것은 하나의 철저한 형이상학적인 재구성으로서, 그것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재개념화였다. 에드워즈의 사상 속에는, 사물의 본성들을 밝히는 용어들의 사용에 있어 범주들의 변경이 나타난다. 에드워즈는 실체과 형상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서구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이탈하여, 그것을 성향적 힘이나 경향성들과 같은 하나의 역동적인 조직체로서의 실재라는 아주 현대적인 개념으로 대체하였다. 능동적이며 존재론적인 원리로서 생각되는 성향들과 경향성들은 이제 실체와 형상이 하곤 하였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성향적 존재론은 에드워즈의 사상에 하나의 일체성을 주는 기초되는 논리 및 독창적 비젼을 위한 해석적인 실마리가 될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의 현대성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 전망에 있어 가장 혁신적인 요소는 성향이라는 개념이다. 아래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성향들과 경향성들은 존재와 생성을 중재하며 영속성과 과정을 중재한다. 그와 같은 에드워즈 존재론의 조정적 위치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용어를 가지고, 철저히 현대적인 철학의 틀 내에서 그의 신학적인 전통을 재진술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그의 철학적 신학에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즈는 지나간 역사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20세기의 철학적 신학적 과제를 위해서도 계속되는 통찰의 자료들을 제공한다.

에드워즈의 사상은 현대의 철학적 신학 논의에 공헌하고 있는데, 그것의 가장 주요한 예로는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을 그가 성향적으로 재개념화한 것이 있다. 소위 고전적 유신론이라고 불리는 전통적 서구 하나님 교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현실태와 자족성을 하나님의 절대 불변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곧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과의 관계에 의해서 영향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 신학에 의해 심각하게 도전받아 왔다. 철저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그 속에 잠재성의 어떤 요소가 없다면 어떻게 창조적이고 목적있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비평가들은 질문하였다. 만약에 하나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세상과의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시간과 역사에의 참여가 어떻게 진정된 의미를 갖겠는가? 고전적 유신론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역동적으로 보는 이러한 요구는 두 면에서 고무되어져 왔는 바, 그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서적 진술의 빛에서 그것 자체를 재시험하는 기독교 신학의 고유하며 계속되는 과제로부터 야기하는 것에 대한 고려이며, 둘째는 일반적인 현대 사상에 있어 존재의 역동적인 본성에 대한 점증하는 강조가 그것이다.

고전적 유신론의 가장 극단적인 대안이 과정신학으로부터 나왔다. 물론 그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철학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양극적이며 양면적인 본성을 가진 것으로 봄으로써, 그 하나님의 존재가 일면으로는 완전하고 영원하며 다른 면에서는 변화하는 생성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과정적인 전망에 따르면, 하나님의 귀결적이며 구체적인 본성은 하나의 계속되는 생성의 과정인 반면, 하나님의 원초적이며 개념적인 측면은 변화하지 않는 완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의 일시적인 현실화인 하나님의 구체적인 현실태는 세계의 창조적인 진전을 통하여 더욱 완전하게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실재를 본래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과정철학의 개념을 채용하였다. 그리하여 과정신학은 하나님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실재를 생성하는 일반적인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정의한다.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자족성을 너무 강조하였던 반면, 과정신학은 변화하는 세계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우선적인 현실태와 초월성을 타협시키고 있다. 과정신학에 있어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창조적인 과정이 그에게 궁극적으로 의존하는 완전한 현실태이기보다는, 생성의 과정 중에 있는 분이다.

이백 년 전에 이미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존재와 생성에 관한 현대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우선적인 현실태를 손상함이 없이 하나님 존재 안에 역동성을 도입하는 아주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에드워즈에 있어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현실태일 뿐만 아니라, 현실태 이상의 것을 수행함을 통하여 그 현실태를 재현하는 성향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향은 내적인 삼위일체적 관계를 통하여 완전히 행사된다. 다른 말로 하여, 삼위의 제 2격과 3격은 제 1격의 원초적인 현실태를 완전히 재현한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완전히 현실화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현실화되어 오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의 성향으로 남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내에서 그 성향을 외적으로 실천한다. 곧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우선적인 현실태의 시공간적 재현을 의미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영속되는 자기확대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신성의 전통적인 개념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므로써, 하나님의 존재의 중심에 역동적인 운동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원초적이며 충분하게 자기현실화된 분으로 보는 현대 과정신학의 오류를 피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신론에 있어 존재와 생성의 균형을 맞추는 단서는 존재론적으로 생산력을 가지는 하나님의 성향의 개념이다. 즉 그 하나님의 성향은 이미 현실화된 것을 그 이상의 실천을 통하여 재현하는 능력이다. 그러함에 하나님은 충분히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음과 동시, 자기확장의 과정에 계신 분이시기도 하다. 이같은 방법으로 에드워즈는 과정신학에 대한 명료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안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의 중심되는 교리를 손상함이 없이 전통적 신학의 많은 결점들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의 재개념화를 강조하는 에드워즈의 성향적 존재론은 전체적으로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의 독창성과 통일성을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 이 책의 목적은 그가 말하는 성향이라는 말의 범주를 해석적인 단서로 보고, 에드워즈의 사상의 중심적인 양태들의 역동적인 성격을 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서론으로서 앞으로의 장들에서 주장될 것들에 대한 간단한 윤곽을 제공하려 한다.

문제의 요점은 유명론에 반대되는 에드워즈의 실재론적이며 관계적인 "경향성"(habit)에 대한 정의에 있다. 경향성이란 단어를 스콜라주의자들은 habitus라고 불렀으며, 또한 "성향"(disposition)이나 "경향"(tendency)이라는 말로도 더 잘 쓰이고 있다. 에드워즈에 있어 경향성이나 성향은 단지 어떤 사건의 관습이나 규칙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향성이란 능동적이며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지는 힘으로, 심지어 그것이 실천되지 않을 때에라도 실재성의 양태를 견지한다. 또한 에드워즈에게 있어 그 경향성이란 현실적인 행동과 사건들의 방법과 성격을 지배하는 하나의 일반된 규칙이다.

만약에 존재의 본질이 경향성이나 성향이라면, 현실재(entity)란 하나의 경향성과 성향으로서의 실재로서, 그것은 그 경향성이나 성향의 실천을 통하여 충분한 현실태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할 때, 행동과 사건과 관계들은 단지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나 현실재의 존재의 성질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없는 바, 오히려 그것과 내적으로 연관되어져 있는 어떤 것이 된다. 행동과 관계함을 통하여 하나의 현실재의 현실태는 그것의 성향적 실질적 실재성(virtual real-ness)으로부터 그것의 충분한 현실태로 움직이게 된다. 더나아가 하나의 현실재의 본질은 하나의 경향성이 되기를 계속하기때문에, 하나의 현실재의 존재는 그 이상의 성향적 본질의 실천 내에서 및 그것을 통하여 증가되어질 수 있다. 요약하여 존재는 본래적으로 역동적인 것이며 관계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경향성이 정신(mind)을 지각하는 성향일 때, 그것은 앎의 원리로서의 기능을 한다. 곧 그것은 실재의 관계적 구조를 정신이 파지할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종합하는 행위로서의 지향적(propensive)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향성이란 그 속에서 한 종류의 행위가 기계적으로 수행되는, 지각을 배제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정신의 경향성은 합리성과 도덕적 행동의 가능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그러므로 경향성은 존재와 생성의 원리임과 동시 앎의 원리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통하여 앎은 존재와 생성에 연결된다.

에드워즈는 이같은 존재와 앎을 성향으로서 재개념화한 틀 속에서, 기독교 사상을 재구성함으로써 다음의 결과를 야기시켰다. 곧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새롭고 역동적인 전망이다. 하나님이 모든 실존과 창조물의 절대적 주권과 영원한 완전성의 근거라는 것은 에드워즈에게는 하나의 공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제 하나님 존재의 본질은 충분한 현실태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성향으로서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본래 그의 성향적인 본질의 계속되는 실천을 통하여 그의 원초적인 현실태를 확대하고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즈에 있어 현실적이며 주권적인 하나님의 계속되는 목적있고 창조적인 행동을 설명하는 논리는, 이따금 제시되는 바의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기확대의 성향적인 존재론이다.

창조된 세계란 하나의 경향성들과 성향들의 조직체이다. (또는 소위 말하는 자연의 법칙들이다.) 그것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시간과 공간 중에서 재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향적 힘들의 체계로서의 세계는, 상대적이지만 영속하는 그것 자신의 실재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성향의 참된 행사(exercise) 또는 창조된 세계의 참된 현실태의 획득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우선하는 현실태를 재현하는 하나님의 성향적 실천을 직접적으로 포함할 것을 요청한다. 다른 말로 하여 역사와 자연은 본래 역동적이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동적인 삶은, 오로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시공 안에의 삶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와, 또한 그것의 매개로서 능동적 기능을 할 때에만 현실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 자신의 시간적인 자기확대(self-enlargement)와 역사와 자연 중의 삶이 하나가 되며, 그것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창조에 있어 촛점이 되는 것은, 신적으로 변혁된 인간 정신과 마음의 상상력있는 행위이다. 상상력의 구성하며 확장하는 힘은, 정신이 경험하는 바를 궁극적으로 연관된 맥락 속에서, 의미있는 전체로서 알며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유한한 정신은 세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일시적인 재현을 가능하게 한다. 상상력의 행위는, 지각있는 인간 자아의 행사이기 때문에, 인간 자아 자신의 성향적인 존재가 현실화되는 것은 인식과정 중에 있는 상상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나아가 이와 같은 인간의 상상력의 행위는, 인간의 성향 안에와 그것 전반에 하나님 자신의 성향이 즉각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성화된 상상력의 행동을 통하여, 지각하는 자아와 지각된 세계는 그들의 현실태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그들의 현실태의 획득이란, 시공 중에서 그의 내적인 존재를 재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그들이 참여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상상력을 통해 역사와 자연이 생기있게 되며, 또한 하나님과 그들의 하나됨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창조된 실존은 영원한 것의 재현이며 목표를 향한 목적있는 운동이다. 역사는 이미 현실적으로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재현하는 것이며, 시간 중에서 하나님의 자기 재현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 곧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 내재하여 있음과 동시 그것을 초월하여 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는 자기 재현의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역사 속에 포함되어져 있으므로, 역사 안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영광의 재현으로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의 절대적으로 완전한 재현은 역사 내에서는 결코 성취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끝이 없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성취의 초월적인 성격에 대한 시야를 상실함이 없이, 역사에 내재하는 천년왕국의 가능태를 강조한 에드워즈의 입장을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많은 해석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그의 철학적인 신학을 그 당시의 철학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예민한 인식 속에서 수행하였다. 해석학적인 단서로서의 경향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실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비젼을 설명하려는 필자의 작업은, 에드워즈가 17, 18세기의 서구 사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위해 내놓았던 해결안의 창조성과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세대에 전수된 17세기 사상의 근본되는 문제는, 기계론적이고 경험적인 과학에 의해 제기되는 사상의 새로운 방법들과 범주들에 들어맞는 하나의 전망을 마련키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주의의 세계관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 문젯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는 바, 하나는 존재론적이며 우주론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이다. 존재론적 문제는 본질과 본질적인 형상들을 다루는 옛 형이상학의 부적합성에서 생기게 되었다. 이에 있어 본질적 형상(form)이란 동작이나 힘 및 관계적인 법칙들이라는 개념 하에서 실재를 검토하려는 경향이 많았던 당시에, 그에 따른 지성적인 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본질과 본질적 형상의 개념들은 또한 하나의 초자연적인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기계적인 과학에 의해서 평가되었었다. 여기서 과학이란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존재론적 문제는 뉴톤에게 있어서 풀려지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었으며, 이에 그것은 그의 우주론 속에서 극단적인 긴장을 야기하였다. 한편으로는 존재에 대한 정태적이고 비관계적인 견해가, 활성이 없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물질 세계에 대한 개념 속에 남아 있었다. 반면 그는 인력과 반발력과 같은 관계적 힘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입자적인 견해에 따라 원인은 어제나 충격에 의한 것이었으며, 관계는 물체의 밖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뉴톤에게는 인력과 반발력의 힘들이 거리를 가지고 작용하는 힘들인 것 같아 보였다. 그같은 내용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이며 관계적인 물질(matter)에 대한 견해와 연결된다. 이 문제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결책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힘의 법칙들이나 경향성들에 대한 그의 개념에 근거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그의 역동적인 견해에 있었다. 존재의 연속성이 더 이상 실체(substance)나 활성이 없는 물질이라는 용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있는 법칙들의 실재 그 자체를 통하여 정의되고 있다. 현실재는 본질적으로 능동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며, 인과관계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은 관찰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운동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며 비의적(occult) 성질들을 배제하는 것이 경험적인 입장에서 존중되었다.

존재에 대한 역동적인 견해는 로크와 같은 에드워즈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다른 사상가들에 의해서 뿐 아니라, 뉴톤에 의해서도 제시되어졌었다. 뉴톤의 우주는 활성이 없는 입자에 의해서보다는 힘과 "행동의 원리"들에 의해 더욱 지배받고 있다. 이차적 성질(the secondary qualities)의 원인이 되는 일차적 성질(the primary qualities)의 경향적 힘에 대한 로크의 논의는 세력(force)들과 힘(power)들의 우선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가들과 에드워즈 사이의 중심적인 차이는 뉴톤과 로크가 현실재에 대한 정태적이고 입자적인 견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반면, 에드워즈는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데에 있다.

18세기 에드워즈의 동시대인들은 현실재를 실체가 아니라 본질적 힘으로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에드워즈가 젊은 시절 읽었던 컫워쓰(Cudworth)와 같은 케임브리지의 신플라톤주의적 사상가들은 "가소성들"(plastic natures)이라고 불리우는 목적론적인 힘들이 세계의 구조 내에서만 기능한다고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의 견해의 차별성은 그가 현상 자체의 모형에 하나의 존재론적 의미를 분명하게 부여했다는데 있다. 물질에 필수적인 것으로서의 세력과 힘들에 대해 모호하게 이야기하거나,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했던 바대로 현상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지 않는 새로운 초자연적인 성질을 말하지 않고, 그는 이러한 것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에드워즈는 전통적 관심들을 일관성있는 개념을 통해 묶어보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에서의 전통적인 관심이란 운동의 법칙들과 관찰할 수 있는 현상들의 우선성에 대한 기계론적이며 경험적인 과학의 주장 및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의 목적론에 대한 강조를 말한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전망을 통해 작업하면서, 우주에 대한 진정한 현대적인 개념을 향하여 진일보를 하고 있다.

에드워즈가 그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인식론적 문제는 힘과 행위의 문제들과 연관되어 고찰되어져야만 한다. 그 질문은 인식적 과정에 있어서 정신(mind)적 작용의 정확한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정신적 행위의 본성에 대한 재정의가 18세기의 긴급한 문제로 출현하였다. 왜냐하면 인식의 자료에 대한 새로운 원자론적인(atomistic) 개념이 그와 함께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질서와 구조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로크는, 인식과정에 있어 감각경험(sense experience)의 우선성은 단순하고 혼합되지 않은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에 대한 경험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유일한 기초가 됨을 요청한다고, 믿었었다. 스콜라주의의 인식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식의 자료들은 혼합적 현실재의 형태들이 아니라, 오히려 혼합되지 않는 감각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기때문에, 추상적인 정신적 행위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더 이상 지지되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로크는 실재 안에 있는 질서의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단순한 관념들을 함께 엮는 것이 정신 자체의 행위임을 단순히 주장하였다. 정신 자신의 행위가 실재 안에 있는 질서에 대한 인간의 경험의 원천이라는 로크의 생각은 현대 사상의 상상력에 대한 많은 이론들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로크는 정신의 창조적인 행위에 대한 심리학을 분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체로 남겨두었다. 그리하여 그 과제가 젊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규명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에드워즈와 같이 상상력이 풍부하며 질서를 세우는 정신의 행위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였었던가? 직접적인 감각에 대한 경험론적인 강조는 모든 합법적인 지식에 대한 기초가 보존되어 있는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고 에드워즈는 보았던 것이다. 컫워쓰나 샤프츠버리(Shaftesbury)를 위시한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정신의 인식과정에 대한 중대한 기여를 주장하였는 바, 그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에드워즈를 고무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론은 에드워즈가 중시하였던 로크의 경험론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로크가 문제 삼았던 것과 씨름하였는 바, 그것은 그가 "마음의 감각"(sense of the heart)이라고 불렀던 상상력과 미학적인 지각에 대한 그의 이론들의 결과를 낳게 하였다. 물론 경향성의 개념 또한 그것의 핵심을 이룬다. 하나의 행동의 힘으로서의 정신의 경향성은 에드워즈로 하여금 정신의 행위에 대한 성향적 이론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마음의 행위란, 의미있는 관계로 감각 관념들을 질서세우는 것을 말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관계적이며 조건적인 경향성은 적당한 경우들에서만 행동으로 화하게 된다. 즉 정신이 감각 관념들을 외부적인 세계로부터 수동적으로 수용할 때에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에드워즈는 정신과 감각 개념이 인식과정에서 수행하는 필수적인 역할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전인격의 성격과 방향성으로서의 정신의 경향성에 대한 관념은, 감각 관념에 대한 정신의 수용과 정신의 상상력있는 행위 및 정신의 정서적 반응이 모두 합쳐져서 사물이 존재하는 방법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감각의 사건을 구성하게 된다는, 에드워즈의 개념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흄(David Hume) 또한 한 종류의 관념들의 연합에 대한 성향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의 경향성이나 성향에 대한 실증주의적인 개념 및 존재에 대한 비관계적 개념 때문에, 정신의 경향성에 대한 연합적인 행위가 실재의 구조와 어떤 진정된 인식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었다. 어쨌든 샤프츠버리적인 인식과정에 있어서의 정신의 능동적 역할에 대한 주장과, 인식의 유일한 자료로서의 감각의 단순한 관념에 대한 로크의 주장은 에드워즈의 상상력과 미학적 지각의 이론 안에서 창조적인 종합을 이루게 된다. 그 에드워즈의 이론은 19세기의 낭만주의적 경향인 콜리지의 미학(the Coleridgian aesthetics)을 예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실재와 행위가 하나의 절대적인 우선성을 가지고 있다. 창조된 세계의 실존과 의미는 완벽하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앎과 존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인 개념은 본래 역동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의 재개념화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곳의 설명에선 필자는 신론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 필자는 다음 장에서 필자의 해석 원리를 확고히 세우고자 한다. 그 원리란 에드워즈가 경향성의 개념을 재개념화 한 것에 있다. 그런 다음 필자는 3장에서 6장까지에 걸쳐, 존재론과 인식론을 다루려 한다. 영속적(permanent)임과 동시 역동적인 에드워즈의 존재에 대한 성향적인 재개념화를 그곳에서 설명하려 한다. 그런 다음 필자는 인식과정에 있어서의 상상력(imagination)의 역할에 대한 성향적 이론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상상력의 행위가, 하나님의 역동적인 삶과 세계의 생성이 그 안에서 또는 그것을 통하여 그들의 목적들을 획득하는, 창조된 실존 내의 지점임을 보일 것이다. 7장에서 필자는 현실적이며 또한 변화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재개념화의 중요성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래적이며 역동적인 본성이 세계의 존재와 생성을 위한 기반이 됨을 필자는 말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필자는 에드워즈의 시간성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재개념화의 가장 기본되는 언명 중의 몇 개를 분명히 하려 한다.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확대

하나님의 성향적 본질의 실천으로서의 하나님의 세계 창조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전달하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의 자기 전달이 영원한 신적인 성향에 "전적으로 동등한" 자기 전달이라고 에드워즈는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대해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하나님 안에는 신적인 본성의 동일한 완전성(the same perfections)의 실천이었던 그러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과, 이러한 행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자신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한 같은 종류의 실천은 아니었다. 자신의 완전성의 실천 속에서 기쁨을 찾는 하나님은 온갖 종류의 실천(all kinds of its exercise) 속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여기서 하나님의 성향의 서로 다른 "종류"의 실천이란 곧 내재적/외향적(ad intra/ad extra)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을 외향적으로(ad extra) 흘러나가도록 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경향성"(이탤릭은 후에 첨가됨)의 행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제 시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외향적으로 전달된 자신 안에서 기쁨을 찾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성향은 자신을 외향적으로 "실천할 경우를 찾는데," 여기서 경우란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기뻐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경우로 작용할 수 있는 존재, 곧 하나님 이외에는 이전부터 있었던 개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향은 자신의 실천을 위하여 그러한 경우 자체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영역 그 자체를 창조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향의 실천의 일부분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자기 전달 또는 자기 확대의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창조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전달함을 통하여 그들(피조물) 안에서 자신의 선함을 성취할 수 있는 경우를 가지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역동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내적인 삶은 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재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역동적인 내적인 삶을 시간 안에서 재현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를 창조하였고 그들은 의지력이 있고 능동적인 주체들 또는 매개체들로서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능동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달은 본래적으로는 오직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들을 향한 것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기뻐하며, 또 찬양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며 인정되며, 하나님의 충만성은 수용되는 동시에 또한 되돌아온다. 여기에 유출이 있으며 회귀가 있다. 그 광채는 피조물 위에, 또 피조물 속에 비추어지며, 또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에게로 되돌아간다.


이 우주 안에는 지각 능력이 없는 부분도 있는데, 그러한 부분은 "신적인 존재의 형상이나 그림자"가 되도록 빚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부분도 하나님의 영광의 자기 전달로서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지각 능력이 없는 존재의 운명이 성취되는 여부는 지각 능력이 있는 피조물의 의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재현의 과정은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이 무한히 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은 하나님의 원초적 현실태에 그 현실태에 대한 무한한 증대와 재현을 더한 것인데, 그러한 증대와 재현은 내적인 삼위일체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이러한 충만성은 이제 유한하고 시간적인 존재들의 영역 안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영원한 지속 기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무한한 진보가 있을 것이며, 하나님에게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 무한히 증대할" 것이다. 사실상, "이제는 하나님의 무한한 높이에 완전히 다다랐다고 말해질 수 있는 그러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세계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기 전달을 논의하는 하는 데에 있어서 에드워즈가 유출적인 언어와 목적론적 언어를 자유롭게 섞어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목표를 "지향하며," 또한 그 목표를 성취할 것을 "추구한다." 반면에 에드워즈는 또한 창조가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의 "흘러나옴" 또는 유출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언어 선택에 있어서 부주의한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창조의 행위를 목적을 지향하는 행위로 보는 동시에 유출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출의 범주와 목적론의 범주를 결합시켜주는 것은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하나님에 대한 성향적 이해이다. 보통은 서로 관련을 맺지 않는 두개의 개념의 이러한 결합 뒤에 자리잡고 있는 논리는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성향 개념과 성향이 가지는 존재론적인 생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성향은 존재론적인 원리일 뿐 아니라 작용의 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성향의 실행은 존재의 현실태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실태의 증식을 가져오기도 한다. 동시에, 성향은 또한 목적론적인 원리인데, 그것은 성향이 어떤 종류의 실제적 사건이나 행위를 성취하는 목표를 지향하는 경향성이기 때문이다. 성향이 지향하는 것은 곧 진정한 가능태(a real possibility)이며, 이러한 진정한 가능태는 성향이 실천될 때 현실태가 된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참으로 목적론적 운동이 있게 되는데, 이 운동은 실질태로부터 충만한 현실태로(from virtuality to full actuality) 이행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점에서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하나님의 창조성에 대한 이해는 플로티누스(Plotinus)나 스피노자(Spinoza)가 전개하는 신적인 창조성의 이해와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플로티누스나 스피노자가 전개하는 유출의 범주는 필연적인 모습을 띄고 있으며, 따라서 목적론의 여지를 하나도 남겨두고 있지 않다. 반면에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유출하는 것은 목적 지향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도 참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운동에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흘러나옴"이거나 자기 전달인 동시에 또한 목표를 지향하는 목적론적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에드워즈의 주장을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의도한 바는 하나님 자신의 본래적인 성향적 본질을 더욱 실행한 것인데, 하나님의 본래적 본질은 이미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 안에서 충만하게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본래적으로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성향, 곧 자신을 전달하고 자신의 충만성을 확산시키려는 그 성향을 하나님의 본성의 완전성으로 이해해야 하며, 바로 그러한 성향이 세계를 창조하도록 하나님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하나님 자신을 외향적으로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성향이 하나님이 가진 전달적인 성향 그 자체(communicative disposition per se) 또는 하나님의 "전달적인 성향 일반"(communicative disposition in general)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본래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의 완전성으로서" 존재했던 이러한 전달적 성향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기뻐하는 하나님의 성향이며, 그러한 신적인 성향의 실행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문집" 제 1218번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전달적 성향은 다름 아니라 "자신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려는" 하나님의 "성향"이며, "또 어떤 결과를 향하여 자신을 실행하는" 하나님의 "성향"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과란 곧 하나님 자신의 외향적 전달"이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향의 실천은 자기 전달적인데, 그것은 신적인 성향의 실천이 존재론적으로 생산적인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향적 본질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요점을 에드워즈는 다음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하나님)로 하여금 자신을 확산하고 전달하도록 만든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을 풍성하게 유출하고 분출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내적인 충만성과 영광에 대한 기쁨이다. 그(하나님)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도록 만든 바로 그 동일한 성향이 또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영광의 발현과 표현과 전달을 기뻐하도록 만든 이유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논문에서 같은 논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 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무한한 지향성과 기쁨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의 풍성한 확산을 지향하게 만들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유출을 기뻐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 안에 있는 본성이 새순을 돋아나게 만들고, 그 가지들을 솟아나게 하며, 잎사귀와 열매를 맺게 하듯이, 나무 안에 있는 그 본성이 곧 자신의 완성된 자아를 지향하는 성향인 것이다. 따라서 태양 안에서 빛나게 하며 자신의 충만함과 온기와 광명을 풍성하게 발산하는 성향은 오직 그 자체의 가장 영광스럽고 완성된 상태를 지향하는 경향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전달과 자신 안에 있는 무한한 영광과 선의 발산을 자신의 충만함과 완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한다. 마치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가장 완성되고 영광스러운 상태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인 양 그러한 전달과 발산을 자기 자신의 완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따라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세계를 창조하도록 만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 안에서 이미 충만히 실천되고 있었던 바로 그 신적인 성향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는 요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곧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어떤 제한적 의미에서 하나님 존재의 계속되는 자기 실현이라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가장 완성되고 영광스러운 상태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인 양") 만일 하나님이 영원토록 "가장 완성되고 영광스러운" 분이라면, 하나님 존재가 세계 창조를 통하여 더욱 더 실현되며 현실태화(化)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세계 창조를 통하여 "확대"되는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향적 본질의 실행으로서 파악하는데, 그의 이러한 세계 창조 이해는 이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존재의 계속되는 현실태화의 과정이라는 결론을 낳는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 가운데서, "그 자신(하나님)이 실행되며 그 자신이 전달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행복이 "확대된다." 그렇다면 세계 창조에 있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충만성과 완성"을 목표로 삼는다.

더 나아가서, 만일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의 삶을 "확대"하고 또 "완성"한다면,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삶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하나님 자신에게 중요하게 된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향이 세계 창조에 있어서 더욱 더 실천됨에 따라서 하나님은 "참되고도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며 심지어 "더 큰 기쁨"을 가진다. "만일 하나님이 덜 선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자신의 선함을 실천함에 있어서 방해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또는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방해받을 수 있다면(물론 그것은 방해받을 수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덜 행복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전적으로 현실태를 지니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이미 지적되었다. 에드워즈는 세계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하나님 존재 안에서의 어떤 결핍을 암시하는 것이 아님을 매우 강력한 용어를 사용해가면서 주장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하는 분이며, 자신 안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분이며, 그리고 무한하고 독립적인 선을 소유함에 있어서 완전한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을 덧붙이거나 더 이상 높임을 받을 필요가 없고, 또 그 어떤 면으로도 더 나아지거나 더 행복하게 될 수 없는 분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뒤에, 에드워즈는 또 다시 자신이 이전에 말한 내용으로 되돌아가서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에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진정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긍정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in some sense)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의 거룩함과 행복에 대해서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세계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인한 함축적 의미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에드워즈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좋게 인식되는 것을 좋아하듯이," 하나님도 "그들[피조물들]에 의하여 영광을 받는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그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라는 구절의 의미이다. 영원히 현실태를 지니고 완전한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 세계의 창조를 통하여 아직도 "확대"되며 "더 행복하게" 된다고 말해질 때, 그 "의미"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에드워즈가 언급한 내재적/외향적(ad intra/ad extra)의 구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에드워즈의 성향적 이해가 또한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는데, 이러한 성향적 하나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충만하게 현실태를 지니는 분으로 인식되는 동시에 또한 계속되는 실천과 계속되는 자기 현실태화를 향하여 나아가는 본질적인 성향으로서 인식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내재적으로는 자기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풍성한 성향적 본질의 외향적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외향적으로 계속적인 자기 현실태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내재적으로는 이미 충만하게 현실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어지는 외향적 자기 현실태화(self-actualization)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것의 재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기 재현(self-repetition)으로서의 자기 전달이 에드워즈가 말하는 "어떤 의미"라는 구절의 적극적인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세계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을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의 "증대, 재현 또는 증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의 행위를 통하여 의도된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의 "외적인 충만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하나님 자신의 충만성에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더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향적 본질의 실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확대의 행위는 하나님이 비로소 하나님이 되는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내적인 현실태의 외적인 재현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세계는 그것이 하나님의 내재적 자기 실현에 무엇인가를 더한다는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세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향적 본질을 외적으로 실천함을 통하여 세계가 하나님의 내적이며 우선적인 현실태성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 개념적 틀, 곧 하나님에 대한 성향적 이해와 내재적/외향적(ad intra/ad extra)의 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존성을 시키는 가운데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우선적인 현실태성(現實態性)과 자존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자신 안에 갇힌 순수 행위(actus purus)로 간주하는 정태적(情態的)인 하나님 이해를 버리고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영원히 현실태를 지닌 분으로 이해되면서 또한 계속적으로 자기를 확대하는 분으로 여겨진다. 원래 내재적/외향적의 구분은 정통적인 서양 기독교 신학의 신론에서 사용된 개념인데,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세계와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성(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을 긍정하기 위하여 이러한 개념을 사용해 왔다. 에드워즈가 이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외향성을 단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정도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외적인 재현으로 이해한 것에 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새로운 공헌 뒤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논리는 물론 그의 하나님 이해인데, 그는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현실태를 지니는 분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또한 본질적으로 성향으로서 존재하는 분으로 파악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본질적 현실태성이라는 개념과 내재적 삼위일체론, 그리고 내재적/외향적 구분의 개념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우선하는 현실태성과 자존성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하나님 이해에 충실한 신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또한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성향적 본질로서 이해하는데, 곧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성향적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현실태를 재현하는 성향으로서 여겨진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성향적 하나님 이해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삶을 고갈될 수 없을 정도로 재현가능한(repeatable) 삶으로 파악하였는데, 심지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재현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도 그러한 재현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자신을 확대할 수 있는 분이라는 명제의 구체적이면서도 독특한 뜻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에 더함을 가져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분이라는 명제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세계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확대한다는 말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 안에서의 하나님의 현실태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기에 더 이상 증가될 수 없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은 하나님의 원초적 현실태 더하기(plus) "무한한 정도로, 그리고 있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원초적 현실태의 증대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내재적 현실태 안에서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내적인 삶에서 현실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그 본질에서 또한 성향으로 성향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성향의 외향적인 실천을 지향한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외향적 자기 재현은 아직도 더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실태의 이러한 시간적인 연장은 하나님의 내적인 현실태를 시간 안에서 재현할 뿐이지, 그 현실태의 질을 더 고양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이 이미 완전한 현실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존재의 자아 실현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에 대하여"라는 그의 논문의 서두에서 다루고 있다. 에드워즈는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의 탁월성에 의하여 최고의 가치보다 열등한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최고의 가치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라면, "[하나님이] 그 자신의 사역에서 자신을 궁극적이며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자신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이 충만하게 현실태를 소유하고 있고 더 이상 증가될 수 없는 것이라면, 세계 창조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실존과 무한한 완전성이 그 자체로서 무한히 가치 있고, 또 하나님이 무한히 중요시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실존과 무한한 완전성은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으로 여겨질 수 없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실존, 곧 하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자아 실현은 창조의 목적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보다 열등한 가치를 지닌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아직도 타당한 사실로 남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자아 실현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목표로 삼을 수 있는가? 여기서 에드워즈의 답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충만성의 외적인 재현과 전달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세계 창조의 목표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세계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 자신의 외적인 재현, 곧 "외향적으로 실존하는" 하나님이다. "궁극적인 것은 그(하나님) 자신의 영광이었으며,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목표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전달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둘째, 하나님은 그 본성에 있어서 질적으로 더 나아질 수 없다.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은 이미 충만한 가운데 현실태로 존재하는 참된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은 "모든 존재와 모든 아름다움의 근거이며 원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합의(consent)의 무한하고도 완전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내적인 삶은 최고의 선이며, 그 자체로서 더 아름다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신적인 성향의 외적인 실천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시간적인 표출은 아직 완전히 다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신적인 아름다움의 외적인 재현이 가지는 시간적인 성격은 심지어는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도 새로운 것을 더해준다. 그러나 시간 안에서의 사건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 사건들이 하나님의 내적인 삶 안에서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일치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일치의 정도에 따라서만 그 사건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의 시간적인 재현이 진정으로 새로움을 가져온다는 것과 이러한 외적인 재현이 아직 다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시간 안에서의 구현은 새로운 양식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이러한 시간적인 구현은 전체의 의미 연관 속에서 살펴져야 하는데, 이렇게 살펴질 때 그 구현은 영원 전부터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재현 내지는 유형(type)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자체는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현실태의 측면과 하나님의 본성의 측면에서 하나님이 더 이상 증가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이 더 이상 증가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는 셋째 방식은 하나님의 능력의 충족성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독립하여 존재하거나 행동하는 그 어떤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분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삶 뿐 아니라 외적인 삶에서도 그러하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어느 피조물의 능력이나 의지에 의하여 증가될 수도 감소될 수도 없다. 또한 하나님은 변하거나 우연적인 그 어떤 존재에도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


비록 그(하나님)가 피조물의 거룩함과 행복에 진정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즐거움은 본래적으로는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받아 누리는 즐거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거룩함과 행복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주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에 의하여 증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조물의 거룩함과 행복 속에서 하나님이 누리는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이 누리는 즐거움이며, 피조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피조물의 행위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 이외의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능력으로 그 행위를 실행한다.


물론 하나님의 외향적인 자기 전달은 지각력과 의지력을 가진 존재를 필요로 하며, 그러한 존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에게 능동적으로 "회귀"시키고 되돌려 줌을 통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참여한다. 그러나 피조물의 행위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행위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즐거움이 아니다. ... 그것은 오직 피조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행위의 결과이며,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전달인데,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피조물을 창조하고 피조물들이 하나님 자신의 충만성 속에 참여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소유인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에게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리고 있는 행복의 그 어느 부분도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들은 자발적인 행위자로서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삶의 외향적 확대를 위하여 지각 능력이 있는 피조물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피조물의 존재와 행위는 하나님의 계속적이며 직접적인 뒷받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피조물의 행위는 참으로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들의 그러한 행위는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자기를 외향적으로 재현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충만성의 유출 또는 전달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 안에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유출과 전달은 하나님과 피조물 모두에게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이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기뻐하며, 또 찬양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며 인정되며, 하나님의 충만성은 수용되는 동시에 또한 되돌아온다. 여기에 유출이 있으며 회귀가 있다. 그 광채는 피조물 위에, 또 피조물 속에 비추어지며, 또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에게로 되돌아간다. 영광의 광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또 하나님의 것이며, 그 광채의 원천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 안에 있으며, 또 하나님에게로 가고, 따라서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시작이며 중간이고 마지막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내재적인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증가도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은 내재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참된 아름다움이며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성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장의 논의의 요약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곧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성향적 개념화(化)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실태의 의미를 현저하게 확장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현실태는 역동적인 현실태이다. 하나님의 존재 속에 목적론적인 원리가 도입되어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현실태로 존재하는 동시에 또한 본질적으로 성향적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향적 본질은 내재적으로는 영원하며 완전한 실천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완전성의 표지로서의 현실태성(現實態性)을 손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현실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전개한 것과 같은 순수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자신 속에 그 어떤 종류의 운동도 가지고 있지 않는, 전혀 구분되지 않은 현실태가 아니다. 물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완전한 현실태라는 의미에서 순수 행위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하나님이 가진 완전한 현실태는 본질적인 현실태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운동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현실태의 본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일 위격 안에 있다. 그리고 영원한 운동으로서의 하나님의 현실태는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부의 현실태의 영원한 재현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현실태는 역동적인 현실태이며 역동적인 충만성이다.

에드워즈는 또한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현실태성(現實態性)의 의미를 확장하였다. 하나님의 자신의 충만성 가운데서도 그 본질에 있어서 성향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의 영원한 실천은 세계의 창조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충만성의 시간적인 재현이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현실태는 내재적 차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충만성뿐만 아니라 그러한 충만성의 외재적 재현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외적인 자기 재현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가지는 현실태와 하나님의 자기충족성은 손상되지 않는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내재적인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이 본질적이며 영원한 현실태이기 때문이고,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재현이 하나님께서 이미 소유한 현실태를 재현하는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의 존재는 하나님 자신의 성향적 본질의 실행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하나님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또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무엇을 더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의 외적인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상과 같은 제한적이면서도 참된 의미에서, 피조물의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현실태에 대한 이러한 확장된 의미를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존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동시에 세계의 시간적인 과정 속에서 참으로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구절의 성서적 의미를 지적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실태의 확장된 의미를 설명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충만성" 또는 "위대함 또는 풍성함")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진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영화로우며, 또한 외향적인 자기 전달에 있어서 영화롭다. 에드워즈의 결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그 단어의 보다 확장된 의미에서 그(하나님)의 영광으로 불려질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탁월성, 아름다움, 본질적 영광의 외향적인 빛남 또는 펼쳐짐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기를 확대하는 영광이며, 하나님의 현실태의 충만성은 더 충만하게 되는 충만성이다.





8장 하나님과 세계의 생성

에드워즈의 성향적 하나님 이해가 성취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창조적인 존재로 이해한 동시에 참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족적인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개념은 세계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을 내포한다: 곧 피조물은 하나님 자신의 성향적 본질을 외적으로 실천(exercise)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함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확장시키거나 재현하는 실천이다.

시간이란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목표를 향한 운동일 뿐 아니라 영원에의 회귀이기도 하다. 역사는 그 기원(Origin)을 향해 거꾸로 돌아가는 운동일 뿐 아니라, 기원의 시간적인 재현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의 시간성(temporality)은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것이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으로서 지속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 안에서 되풀이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재현의 지속성은 영원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에드워즈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향적 본질을 드러내는 이러한 과정이 절대적으로 성취될 그러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이 참으로 (물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되풀이된 많은 사건들이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역사란 그러한 실현들의 연속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가 시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는 그러한 종말은 오지 않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론과 그의 창조론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이전에 다루었던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인 삶을 시간 안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고 사랑하는 내적인 사랑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들을 창조하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사랑하는 자신의 성향을 실천한다. 에드워즈의 경향성과 존재 이해를 다룬 3장과 4장에서 우리는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이 설정한 능동적인 경향성과 성향들의 그물망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경향성들과 성향들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나름대로의 지속성과 독립성을 가지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세계의 경향성과 성향은 그 작용과 구분되는 나름대로의 실재양식(a mode of reality)을 가지지만, 그러한 경향성과 성향은 언제나 지속적인 존재와 작용을 위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연관을 필요로 한다. 에드워즈는 시간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재현이 있기 위해서는 유한한 존재들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유한한 존재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구분되는 존재들이다.

상상력과 미적 감각에 관한 4장과 5장에서, 나는 정신의 경향성을 상상력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상상력은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인지하게 함으로써 실재의 내적인 구조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상상력이 객관적인 관계들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상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상상력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화되었을 때, 상상력은 바로 눈 앞의 감각자료들을 궁극적이며 관계적인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의 정신으로 하여금 사물의 궁극적 의미를 분별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인간의 정신 안에 실재의 참된 구조를 재현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인식하는 사람 자신이 가지는 성향적 본질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행위는 인식하는 사람 자신의 현실태(actuality)를 실현하며 증진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의 상상력은 하나님의 성향이 인간의 상상력 안에서, 그리고 그 상상력을 통하여 실천될 때에만, 즉 인간의 회심이 일어날 때에만, 참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확장하고 되풀이함에 있어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사랑하는 바로 그 행위를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존재론적으로 생산적이며 동시에 심지어 하나님에게조차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인식하는 사람의 존재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삶조차도 인간 상상력의 행위를 통하여 되풀이되며 증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중요성과 한계성은 모두 에드워즈의 다음과 같은 신학적 주장에 비추어서만 올바로 이해된다: 곧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실존이 하나님의 삶을 더욱 증대시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이미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삶을 재현한다는 독특한 의미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간결한 요약이 시사하듯이, 이 연구의 일차적 목표는 에드워즈의 성향적인 실재 이해의 근본적인 논리를 살펴보되, 존재의 성격, 앎의 구조, 그리고 하나님 이해에 촛점을 두고 살펴보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 가운데 나는, 이러한 나의 에드워즈 해석이 세계의 생성(the becoming of the world)의 구체적 역사를 교리적으로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가를 별로 다루지 않았다. 물론 나의 논의 전반에 걸쳐서 나는 이러한 내용을 어느 정도 암시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구원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의 보다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는 현재 이 책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며, 아마도 또 한 권의 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에드워즈의 성향적 하나님 이해가 가지는 근본적 함축점 가운데 두 가지를 이 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피조물의 존재의 의미와 운명에 관계된 것들을 주로 살펴볼 것이다. 첫째, 나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을 간결하게 살펴봄으로써 에드워즈가 자신의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 시간성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현실태와 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초월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것이다. 둘째, 나는 세계의 생성 가운데 드러나는 현실태와 증대의 리듬(the rhythm of actuality and increase)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세계는 이 리듬을 통하여 하나님이 외적으로 자신을 확대하는 사역 가운데 참여한다.


자신을 확대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성과 역사의 의미와 운명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에 관한 물음을 고찰하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수정한다.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어받으면서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데, 그리하여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역사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에 의하여 다스려지기에 궁극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역사 자체를 뛰어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유한한 피조물의 세계가 오직 이 세계보다 크신 분, 곧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창조자이며 통치자로부터만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내적으로 완전하며 자족하고 또한 절대주권적인 분으로 간주하는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 피조물과 창조자 사이의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구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넘어선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주권적인 성향인 동시에 자기를 확대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철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신적인 영광의 "외적인 실존"을 가져오는 분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역사 안에 계셔서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확장을 통하여 역사 자체를 구속하고 성화하려고 하신다.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이, 전 피조물의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세계변혁의 요청, 곧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속에 있는 절대주권의 의지에 의하여 동기부여를 받은 그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칼빈주의의 후예임을 보여준다. 에드워즈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전통이 가지는 변혁적 능력에 기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전통에 적절한 역동적인 형이상학의 기초를 놓아준 데에 있다. 곧 에드워즈는 하나님에 대한 성향적 재규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미 전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과정 가운데 참으로 연관되어 있는 분임을 보여준다.

에드워즈의 사상 가운데 뿌리 박혀 있는 역사에 대한 감각은 이미 페리 밀러(Perry Miller)에 의하여 지적되었고, 또 에드워즈의 후천년설과 관련하여 많이 논의되어 왔다. 알렌 하이머트(Alan Heimert), 괴엔(C. C. Goen) 등과 같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곧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의 인격적 재림 이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주장했다는 것과, 따라서 그가 역사의 정상적인 흐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이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물론 절대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역으로 보았다. 물론 이것은 에드워즈가 '인간이 인간의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며, 또한 천년 동안 지속되는 평화와 조화의 축복 받은 시대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가지는 한계에 대하여 에드워즈보다 더 현실적인 이해를 전개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버트 웨스트부룩(Robert Westbrook)이 표현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임을 믿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 역사 안에서 그렇게 하실 것"임을 믿었다.

에드워즈의 후천년설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역사 이해는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의 틀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틀에 비추어서 이해할 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에드워즈는 2백년 전에 이미 오늘날에도 주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신학적 물음과 창의적으로 씨름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현실태를 이미 소유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의 운동에 참으로 연관될 수 있는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현실태를 가지는 동시에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기는 하지만 운동하지 못하거나 목표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 있어서 무시간적이거나 불변한 분은 아니다. 피조된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성향적 본질의 실천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외적인 확장으로 여겨진다. 하나님 자신의 삶이 역사 안에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기에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외적인 실존"은 세계의 생성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수 있으며 또한 성취되어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요한계시록 20장에 약속된 "평화와 번영"의 천년왕국을, 하나님이 세계에 대하여 가진 목표가 이 땅위에 참으로 실현되는 것(물론 이 목표의 완전한 실현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이지만)으로서 묘사한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 그리고 교회의 형성 등을 포함하는 웅장한 계획을 펼침으로써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되풀이하는 목표를 성취한다. 하나님의 성향적 본질의 외적인 실천, 곧 하나님의 섭리의 행위는 구속의 사역이라는 특정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이러한 구속의 사역은 천년왕국을 통하여 이 땅에서 그 절정에 다다른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는" 천년왕국의 첫 시점에 "그 적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획득할 것이다." 천년왕국은 "참으로 거룩한" 시기이며, "참된 평화와 사랑"의 시기인 동시에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시기이다. "그 때에는 이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또 세계의 구석 구석에서 모든 나라가 달콤한 조화 가운데 하나로 연결될 것이다." 이때는 "이 땅위에 하늘나라가 가장 분명히 실현된 때"이며 하나님 나라의 "중심 시대"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지상의 천국"이 가지는 시간성과 세속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천년왕국. 다음과 같은 점에서 천년왕국 때에는 세계가 더욱 천국과 같아질 것이다: 명상과 영적인 활동 등과 같이 정신과 종교에 관련된 행동들이 지금보다 더 성도들의 일상적인 일이 될 것이다. 천년왕국 때에는 많은 기구와 발명품들이 있어서 성도들의 세속적인 일들을 보다 수월하게 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보다 고상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을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보다 나은 기구들을 가지게 되어서 지구상의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람들끼리도 더욱 신속하고 수월하며 안전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서로 돕게 될 것이다. 선원들의 나침반도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발명된 것으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발견케 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술한 영적인 상태는 세상적인 번영을 향한 자연스러운 경향성을 가진다: 곧 건강과 장수를 향한 경향을 가진다. 그리하여 스가랴 8장 4절에 기술된 것과 같이 이러한 세상적 번영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 또한 그러한 영적인 상태는 또한 정신의 평안, 고요, 기쁨, 즐거움 등과 같은 상태를 자연스럽게 낳게 된다.


괴엔(C. C. Goen)이 표현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이 역사 속에서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위한 황금시대가 펼쳐질 것을 예언하였으며, 그러한 황금시대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상적인 과정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라고 보았다."

괴엔이 주장하는 "종말론에 있어서의 새로운 출발"이 얼마나 새로운가 하는 이 문제는 물론 아직 결론이 확실히 나지 않은 질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참으로 새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에드워즈의 역사적 천년왕국의 뒤에 자리잡은 그의 하나님 이해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인 분이며,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성향적 본질의 실천으로서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시간적인 확장이다. 피조된 세계를 하나님 자신의 성향이 외적으로 실현되는 영역으로 간주하는 에드워즈의 세계관과 신적인 성향에 대한 절대주권적인 그의 하나님 이해는 그로 하여금 이 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에드워즈는 이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의 참된 재현으로서 (비록 최종적인 재현은 아니지만) 이해한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참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영광이 시간 안에서 재현되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하여 "본래적이며 진정한 기쁨, 즐거움, 행복"을 가진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의 선함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의 완전성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선함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리하여 자신의 다른 완전성이 그에 합당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보다 덜 행복할 것이다." 하나님의 삶에 있어서 시간이란 중요한 것이기에, 주권적인 하나님이 시간 속에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천년왕국 실현의 가능성과 그것의 필연성은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그의 이해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맥락 안에서 자신을 확장하는 그 틀 안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역사적 과정 가운데 내재한 분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에 앞서서 존재하는 초월적인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곧바로 강조해야만 한다. 만약 에드워즈의 하나님 이해가 하나님 자신의 삶과 관련된 시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리하여 역사적 천년왕국 실현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동일한 교리(곧, 에드워즈의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이 시간성에 대해 가지는 우선성을 또한 강조한다. 하나님은 천년왕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삶의 역사적 재현이라는 시간성조차도 초월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 없이도 이미 온전히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이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재현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우선적인 현실태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은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그 모습보다 무한하게 더 큰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간 안에서 재현될 것은 유한한 실재가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내적인 현실태이기에,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재현은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논하면서, 에드워즈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세계의 어떤 부분, 곧 최상의 것이며 나머지의 머리가 되면서 목표가 되는 부분은 영원토록 지속되어야만 한다 - 그것은 곧 지적이며 이성적인 피조물이다. ... 만일 세계가 어느 한 시점 동안만 지속되고 무(無)로 돌아가 버린다면, 그것은 헛된 것에 불과하다. 곧 하나님에 합당한 그 어떤 목표도 성취되지 못한다. ... 그 이유는 그 목표가 무한한 하나님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작은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 지속된 기간이 백만 년의 세대이고 그 이후에야 무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무한히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백만 년의 기간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의 창조에 의하여 얻어진 기간이 매우 오랫 동안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에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여전히 한 순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기간은 하나님에 비교해 보면 절대적으로 무에 불과할 뿐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에 합당한 목표가 될 수 없다. 무한한 목표 이외에는 그 어떤 목표도 무한한 하나님에 합당한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획득되는 목표는 무한한 기간 동안 지속되어야만 한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그렇다면 역사가 하나님의 내적인 현실태를 재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과정이 끝나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에 합당한" "무한한 높이"에 다다를 때에만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한 "무한한 높이"는 오직 "무한한 증대"를 요구하는 "무한한 지속기간" 동안에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러한 순간은 이 시간 안에서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재현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모습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현실태와 그것의 무한한 증대에 비추어 보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함은 고갈될 수 없이 풍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확장의 구체적 실현(역사적 천년왕국을 포함하여)을 넘어서 존재하는 초월적 원리로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에드워즈가 쓴 바와 같이, 천년왕국의 복된 시대 뒤에는 엄청난 배교의 때가 있을 것이며, 그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재림으로 시작되는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보다 충만한 실현으로 "대치될" 것이다. "이 땅 위에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모든 영광은 하늘나라에서의 교회의 완성된 영광에 비하면 희미한 그늘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과 역사 속에서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재현이 하나님의 영광의 참된 재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그치지 않을 영원의 "세대" 가운데 앞으로 실현될 것의 한 유형(type)이나 형상(image)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현실태(actuality)는 하나님의 무한성의 현실태를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의 현실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갈되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하나님은 이미 특정한 본성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위의 인용이 말하고 있듯이, 시간 안에서 획득된 선은 무한한 하나님에 합당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되는 선이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적인 아름다움의 시간적인 재현인데, 이러한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이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도로 드러나 있다. 그리하여 역사적 천년왕국의 실현은 곧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성립된 것으로서 곧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표현하는 것은 역사적 천년왕국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을 시간 안에서 드러내기는 하지만 천년왕국이 그것을 완전히 다 실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형상"(image of heaven)으로서, 그것 자체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중심 목표의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실현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내적인 삶 속에서 이미 현실태로서 존재하기에, 시간 안에서 재현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미 우선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히 완전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시간적인 과정 안에서 재현되는 것은 천년왕국보다는 훨씬 더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하는 현실태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재현하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면에서 자족한 하나님으로서 모든 존재와 창조성의 근원이 되는 분이다. 피조물의 모든 영역은 그 존재와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하나님은 미래의 천년왕국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또한 현재와 과거의 하나님이면서 역사와 자연의 주가 되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자신의 웅장한 계획으로써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렇다면 역사적 천년왕국은 피조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적 통치라는 맥락에서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역사적 천년왕국은 그 궁극적 근거와 보장과 중요성을, 온 피조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성향이 외적으로 실천된 것이라는 사실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스티븐 스타인(Stephen J. Stein)에 따르면, 섭리라는 주제는 에드워즈의 초기 종말론적 저작들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굳게 확신하였기 때문에 모든 문제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실 것임을 믿었다. 스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섭리는 종말론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촛점 아래 위치시키며, 동시에 땅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의 균형을 맞추어 놓는다." 나는 다음 부분의 논의에서 하나님의 자기 확장의 섭리적 행위가 미래의 하늘나라의 영역에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내 주장의 요점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천년왕국 이해는 하나님 중심적인 맥락(context)을 가진다는 것이다. 곧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역사적 천년왕국을 넘어서는 웅장한 계획 아래서 진행시키는 그 맥락이 곧 천년왕국 이해의 보다 큰 맥락이다. 하나님 자신의 성향적 본질이 시간 안에서 실천된다는 점에서 살펴볼 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천년왕국의 시간적 실현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완전하고 참다운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현실태를 지닌 동시에 자기를 확장하는 분으로 보는) 에드워즈의 하나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하는 현실태(actuality)를 강조하는 것은 에드워즈로 하여금 천년왕국을 넘어서서 주권적 하나님이 보다 넓은 영역에서 펼치는 섭리의 사역에 눈을 돌리게 한다.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역사적 천년왕국 이해에 관련된 여러 가지 비판들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 가운데 특히 논쟁의 촛점이 되는 것은,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미국을 이해했던 미국의 초기 민족주의 이념을 위한 촉진제가 되었나 하는 물음이다. 예를 들어 대롤 브라언트(M. Darrol Bryant)는 하이머트(Alan Heimert)의 영향력 있는 책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하면서 다가오는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기대를 미국 독립혁명의 자극제로 보려는 모든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브라언트는 먼저 "다가오는 새 시대를 향한 천년왕국적인 기대가 옛 질서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의 근거와 동시에 사회 개혁을 향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천년왕국을 향한 기대가 미국의 독립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보는 가정"을 거부하는데, "적어도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련해서는" 그러한 가정이 거짓된 것이라 주장한다. 브라이언트의 주장에 따르면, 에드워즈의 "비전은 명백히 이 지상의 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목표를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창조의 목표는 초역사적이며 영적인 것,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브라이언트는 에드워즈의 초기 저작 안에 다가오는 천년왕국을 미국의 성립에서 찾으려는 몇몇 개의 언급들이 있음을 시인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극복되고 수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에드워즈는 "역사적 과정을 이 세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간주하는 종말론을 전적으로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가 되었지," "경건한 옷을 입은 이념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에 대한 이러한 논쟁을 에드워즈 자신의 하나님 이해와 창조 이해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양편의 주장에 모두 진실의 일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지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특정한 지상적인 표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점에 있어서는 브라이언트의 주장은 옳다. 하나님의 영광은 역사적 천년왕국의 실현에 국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성립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자주 인용되는 하이머트의 유명한 주장, 곧 "실질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최고도로 뛰어난 기독교 공화국이라"는 주장은 과장된 주장일 수 있다. 그러한 하이머트의 주장 속에는 브라이언트가 놓쳐버린 중요한 진실의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우선성, 주권, 그리고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브라이언트는 하나님이 역사와 참된 관련을 맺고 있음을 간과하여 과소평가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비전은 명백히 이 지상의 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목표를 향한 것"이라는 브라이언트의 주장은 반쪽 진실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여사를 향하여 가진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목표는 물론 그 어떤 지상 나라도 넘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진 그 최종적 목표는 이 역사와 이 세계 안에서 (비록 예기적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실현되는 모습을 펼쳐나간다. 이 세계의 존재는 하나님 자신의 성향적 본질의 실천(exercise)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삶(God's own life ad extra)은 하나님이 이 세계 속에서 교회를 통하여 하는 사역 뿐 아니라 하나님이 다가오는 미래에 영원토록 하실 그 사역에 의해서도 구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삶이 시간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에드워즈의 하나님 이해는 그가 전개하는 날카로운 역사의식의 근거가 되는데, 하이머트와 다른 학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였다.



세계의 생성의 리듬

역사의 의미를 논의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질서와 시간의 경과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모든 존재와 의미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이 이미 현실태를 가진 분이라면, 역사와 자연 안에는 하나님에 의하여 규정된 질서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세계가 하나님의 성향적 본질의 직접적 실행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라면, 하나의 피조물이나 하나의 시간적 사건 자체도 그 안에 완성된 의미와 질서의 모습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건은 기원(Origin)으로의 회귀인 동시에 그 기원의 구현이기도 하다. 반면에 에드워즈의 사상에서와 같이 시간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시간의 경과도 역시 그 어떤 목표를 향하여 진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시간 안에서 목표를 향한 진행 또는 운동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곧, 역사는 기원을 향한 영원의 회귀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목표를 향한 전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질서와 운동의 문제를 실재의 역동적 리듬(a dynamic rhythm of reality), 곧 현실태로부터 그것의 증대로의 운동(a movement of actuality to its increase)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현실태화(化)와 증대(actualization and increase)라는 공식을 통하여 실재를 이미 완성된 질서로 보는 동시에 또한 역동적 운동으로 파악한다. 역사는 기원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는 기원으로의 회귀이다. 역사 속에는 기원에 의하여 규정된 질서가 있다. 그러나 기원이 역사적 과정 안에서 스스로를 재현하기에 거기에는 또한 운동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에드워즈의 궁극적 실재에 이해에 근거하는데, 에드워즈는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을 모든 존재와 창조성의 근원으로서 이미 현실태를 지니는 분으로서 파악하는 동시에 또한 본질적으로 자기를 확대하는 분으로 간주한다.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확대가 시간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에, 심지어 하나님에게서조차도 시간성은 참되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확대하는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서 현실태를 지닌 분이므로,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들의 연속 안에는 이미 질서와 의미가 내재해 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역사적 운동을, 질서를 현실태화(actualize) 시키는 재현 또는 증대의 과정으로서 파악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의 질서 잡힌 영역 안에 진정한 운동의 차원을 도입한다.

시간의 중요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이 세계가 놓인 어떤 특정한 한 단계에서 자신의 계획을 온전히 다 성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은 전체적인 틀 안에서 서로 연결된 여러 다른 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가 놓여 있는 어떤 특정한 한 단계에서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온전히 다 이루지 않으신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의 삶에 변화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변혁을 일으키신다. 섭리는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며, 또한 이 세계 가운데 새로운 것들을 불러 일으켜서 이전의 것들과는 매우 다른 것들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하여 이전 것을 제한다. 그리고 완전성은 최후의 변혁이 일어날 때까지는 오지 않을 것인데, 최후의 변혁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하나님의 외적인 삶의 무한한 충만성은 시간의 영역에서 재현되어야 하며, 그것은 지속적인 시간을 요구한다. 에드워즈의 표현에 따르면 "섭리는 계속해서 전진해나가며," 그렇기에 변화와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때때로 주기적인 완성에 다다름을 또한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과 또한 그러한 실현의 계속적인 재현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의 이미지(image)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회전하는 수레바퀴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지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수레바퀴의 동작과 같다. 수레바퀴들은 돌고 돌아서 다시금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는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과정들도 결국은 수레바퀴들의 회전과 같다. 보다 큰 바퀴가 있는가 하면, 보다 작은 바퀴가 있으며, 작은 것들은 큰 것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표상한다.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처럼 섭리 가운데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은 말하자면 같은 곳으로 되돌아가거나 또는 그들이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같은 곳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 있었던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실현되거나, 혹은 같은 목표가 훨씬 더 심도 있게 성취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떤 정해진 곳을 향하여 진보가 있게 되며, 그리하여 모든 변혁과 회전은 최종적인 종착점을 향하여 더 가까이 가게 된다. 이러한 회전은 지상 위에 놓인 바퀴의 회전이나 마차의 바퀴의 운동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축에 매달려 있는 바퀴의 운동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바퀴가 그저 축에만 매달려 있다면 모든 운동은 결국 헛수고에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에드워즈가 여기서 전개하는 논지는 이제 명백하다. 역사란 순환적(cyclical)인 동시에 직선적(linear)이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질서를 구현하고 재현할 뿐 아니라 동시에 시간 안에서 앞으로 성취될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간다. 물론 그 목표란 곧 영원한 질서의 시간적인 증대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바퀴는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속에는 또한 목표를 향한 진정한 운동이 있다. "동일한 지점"으로 되돌아감으로 인하여 섭리는 "더 큰 목표"를 실현하는데, 그것은 "같은 목표가 더 심도 있게 성취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역사 안에서의 운동이란 목표의 실현인 동시에 그 목표의 실현이 "보다 더 심도 있게" 증대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영원한 질서의 사건 안에서의 현실태의 실현과 계속적인 사건들을 통한 현실태를 향한 실현의 증대가 곧 창조된 세계의 리듬인 것이다.


세계의 존재와 생성의 근거: 성부와 성자, 성자와 세계

현실태화와 증대의 리듬(the rhythm of actualization and increase) 안에서 이루어지는 섭리적 바퀴의 회전(목표의 성취와 동일한 목표의 심층적 재현)의 궁극적 기초는 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삶 안에서 찾아진다. "으뜸가며, 그 기원이 없고, 또한 가장 절대적인 방식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원초적 현실태(actuality)는 신성(deity)의 제1현실태 또는 제1존재양식인데, 그분이 곧 성부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원초적 현실태는 또한 본질적으로 성향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향은 계속해서 자신을 실행하는데, 하나님의 원초적 현실태의 그러한 증대 및 재현을 성부의 반사적 관념의 형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두 번째 모습이 곧 성자이다. "성부가 성자를 낳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모든 행복의 완전한 전달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선함의 영원하고 적절하며 무한한 실천으로서 그 완전성에 있어서 전적으로 (성부와) 동등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자 안에서 자신의 자아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실천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자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행위는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격, 곧 성령의 나타남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내적인 삶은 현실태로부터 그것의 증대에 이르는 영원한 운동의 행위이다. 이러한 영원한 운동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타나는 피조물의 역동적 운동의 궁극적인 근거, 유형, 그리고 의미를 제공해준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현실태와 증대의 원리(the principle of actuality-and-increase)를 가지고 파악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외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현실태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하나님의 내적인 현실태)의 "증대, 재현, 또는 증식"(an increase, repetition, or multiplication)이다.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재현(곧, 세계의 창조)의 행위는 특별히 성자(곧, 하나님 자신의 내부를 향한 자기 재현)에게로 돌려진다. "성자는 성부의 선함의 충분한 전달이며, 성부에 대한 명백하고도 완전한 형상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지만 성자도 자신을 전달하려는 성향을 가지는데, 그의 행복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인격의 형상 안에서 자신을 전달한다." 그리하여 "성자는 하나님의 충만이며, 교회(교회는 세계가 지향하는 목표이다)는 하나님의 아들의 충만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곧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a perfect image of the perfect image of God)이 되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성향적 본질이 실행된 것으로서 삼위 하나님 모두의 자기 재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세계의 창조를 성자 뿐 아니라 성부와 성령의 행위로도 돌린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부도 역시 세계를 창조하였다. 성부는 성자를 위하여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세계를 혼돈으로부터 아름다움과 완전함에로 인도하는 것"이며, "세계에 아름다움과 조화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를 삼위일체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성부는 "성자를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 이 사실은 곧 세계가 하나님의 내적인 삼위일체적 관계(이 관계는 성자와 성령 안에서 나타난다)가 외적으로 재현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현실태와 증대의 리듬은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설명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세계의 존재와 의미가 하나님의 성향의 외적인 실행에 직접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 것이기에, 세계의 생성의 리듬 역시 동일한 리듬, 곧 현실태와 확대의 리듬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적인 존재들(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을 창조함으로써 시간 안에서 자신의 자기 재현을 성취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랑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가지는 신적인 아름다움의 지식과 사랑을 재현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바로 이 사실은 하나님이 시간과 역사 안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야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최고의 선으로 알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제이 위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은 시간 안에서 성육신 되어 나타나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 안에서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의지를 굽히고 인간들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진 신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향적 본질이 외적으로 "무한하게"(곧, 충만하게) 성취된 유일한 삶이며 사건이다.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의 자기 확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현실태를 획득한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의 신조를 확고하게 지지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 그리스도 예수"는 "아리우스파들이 생각하듯이 열등한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의도와 목적에 있어 최고의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충만한 현존은 성령의 형태 안에서 신적인 성향의 현존을 통하여 성취되는데, 이 현존은 "무한한" 현존이다.

그러나 여기에 질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향의 충만한 실행이며, 하나님의 외향적 자기 재현의 완전한 실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피조된 세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바깥에서 존재하는 세계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현실태와 증대의 리듬은 여기서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에드워즈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세계란 예수 그리스도가 실현한 현실태의 증대이며 동시에 재현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간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현실태의 유형들 또는 "전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의 영속적인 재현으로서 의도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향이 참으로 행사된 이후에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행사한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행사하는 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이미 성취된 바로 그것을 증대시키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태와 그것의 증대라는 이러한 리듬과 논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교회론과 관련하여 다음에서 인용되는 에드워즈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성으로서 이해된다. (에베소서 1:23) 마치 교회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완성되지 않은 것인 양, 또 그리스도는 교회를 향한 자연스러운 경향성을 가진 것인 양 말해진다. 우리가 그쪽을 향해 자연스러운 경향성을 가진 그것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먼저 성부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가 언급되고 있다. 다음에 성자에 대한 서로의 기쁨이 언급된다. 그리고 성자의 기쁨은 그의 선함이 전달되는 그 대상 안에 있음이 말해진다. "나는 그분에 의하여 존재하며,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이다."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충만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충만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없이도 (여기서 교회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계의 모습을 의미한다)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참되면 완성된 현실태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성에 더해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완성을 더욱 확대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틀에 있어서, 시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되며 완성된 현실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정적인 실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실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는 일종의 생성의 과정이 드러나는데, 그리스도의 생성의 과정은 이 세계의 생성의 모습을 요약하고 예시한다. 여기서 생성의 과정은 현실태와 증대의 유형으로 나타난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무한"한데, 그러므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러한 완성된 현실태는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도 증대된다.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역동적 존재를 기술함에 있어서, 예수의 신적인 탁월성이 그의 인성 안에서 점점 더 증대되어 나타나는 것으로써 표현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탁월성은 우리에게 나타난 그의 영광과 탁월성의 부가적인 드러남이며, 동시에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분으로서 그를 추천하는 부가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가적인 드러남"은 "그리스도가 가진 신적인 본성의 전달이며 반영"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인간적 탁월성은 역동적인 증대의 과정을 겪는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난"은 "그의 본성의 거룩성"을 증대하는 효과를 가지는데, 그 마지막 고난은 "그 뿌리를 강화하며 증대시킨다." (여기서 뿌리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성령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정도를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예수 안에서 나타난 신적인 본성의 다양하고도 점진적인 드러남과 재현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유한한 거룩성을 보태는 것이다."

교회, 곧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재현의 현실태를 계속적으로 확대시키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벽하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자기 재현을 더욱 확장시킨다. 이러한 모든 과정 속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실천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의 점진적 세워짐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증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세대에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드워즈는 교회의 실재를 완성된 실재로 보는 동시에 점점 더 충만해지며 완벽해지는 과정 속에 있는 실재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에드워즈의 통찰력이 그리스도론에 미치는 한 가지 함축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론의 하나님 중심적인 범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곧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현존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그 이전의 하나님 중심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가진 자신의 목표, 곧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재현하려는 그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궁극적 범위는 우주적이며, 그 지속 기간은 영원하다. 역사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주적 영역도 (제한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성자의 아름다움의 구현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들의 탁월성의 참된 발산이며 그림자이다." 영원한 성자는 자신의 성육신 이전에 이미 이러한 자기 전달의 사역에 관여하고 있었다. 물론 성육신의 사건이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전달의 사역을 전적으로 새로운 수준의 실현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이와 같은 가시적 드러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그림자"로서 "이러한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속의 사건이 예시되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성자가 "하늘로 승천할" 때, 이제 영화롭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매개체가 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에서 있게 될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 of God)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에 있는데, 그 영광은 그의 사역에서 나타나거나 또는 영화롭게 된 인성 가운데 있는 그의 인격에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영원한 성자의 구속의 사역은 그 참된 범위와 그 궁극적 중요성이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영화롭게 하는 영원한 성자의 사역 가운데서 찾아지는데, 바로 이 점이 이 부분 논의의 요점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중요한 목표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성도의 거듭남과 실천을 통한 확대

우주적 차원에서 세계의 생성 속에서 드러나는 현실태와 증대의 역동적 리듬은 개개인의 거듭난 성도의 삶 속에도 또한 발견된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개인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동일한 구속의 사역의 형상(image)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오직 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날 때에만 인간은 참된 의미에서의 인간, 곧 하나님이 의도한 그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또 하나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이 가진 인간적 성향이 전체와 조화로운 방향, 곧 하나님의 존재와 조화로운 방식으로 기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성향의 근본적 변화는 성령의 거하심(indwelling)을 통하여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 안에서" 성도의 성향 및 기능과 연합되어 있으며, "자연적인 원리 또는 경향성의 방식을 따라서 행동한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성향과 매우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는 곧 인간들 자신의 행위일 정도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현존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모습 가운데 전적인 주권을 상실하지 않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자신의 성향이 인간의 행위 안에서, 그 행위 아래서, 그리고 그 행위 뒤에서 작용한다.

이제 성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변화된 그 성향을 제일 처음 실행하는 것은 곧 성도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참된 현실태를 처음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첫 번째 행위, 곧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첫 번째 행위는 영적인 이해력 또는 정신의 감각 안에 있으며, 그것은 또한 영광과 탁월성을 지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것이며 구속의 역사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짓는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희미하게만 발견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참으로 발견하기만 한다면, 그가 이것을 깨닫는 한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이 모든 존재에 우선하여 사랑의 대상이 되며 사랑 받기에 합당한 분임을 인지하게 된다."

성도의 변화된 성향은 곧 성도의 전 자아의 새로운 방향이 되며, 자신의 내적인 지각과 정서를 통하여 행사될 뿐 아니라 외향적인 실천을 통하여도 실행된다. "이러한 경건의 능력의 주된 증거는 실제적인 거룩한 정서(holy affections)가 실행되는 것과 그 정서 자체가 실제적인 것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성도의 정신과 마음 속에 있는 새로운 경향의 필연적이며 직접적인 결과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은혜는 거룩한 실천 안에서 완성되며 마무리된다. 이것은 마치 은혜가 거룩한 실천 속에서 고유한 결과에 다다르며, 그 실행은 곧 은혜의 원리의 목표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성도의 새로운 성향이 가진 진정한 가능태(real possibility)를 현실태(actuality)로 만들어 준다. 그렇다면 성도의 변화된 성향이 성도의 자아의 모든 차원에서, 그리고 그 모든 차원을 통하여 (내향적 차원 뿐 아니라 외향적 차원에서도, 또한 지적인 차원 뿐 아니라 의지적이며 정서적 차원에서도) 실행될 때, 거듭한 성도의 현실태가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실천에 대한 에드워즈의 유명한 강조는 그가 전개하는 성향(하나님의 성향 뿐 아니라 인간의 성향도 포함하여) 개념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향이란 일종의 능동적인 경향성으로서 적절한 경우가 되면 확실하게 실행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마음에 있어서의 경건함은, 마치 샘이 개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실천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다." 또한 성도의 성향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성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인의 실천에 대하여 강조한 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존 스미스(John E. Smith)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는데,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주의의 전반적 특징이었던 신적인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 능력, 그리고 노력 사이의 독특한 조합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에드워즈의 "신적인 필연성"에 대한 강조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는 에드워즈의 역동적인 신론, 곧 전적으로 현실태를 지닐 뿐 아니라 외향적으로 자신을 확대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그의 하나님 개념이 있음을 주목해 왔다. 하나님 존재의 충만성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의 실천이 지니는 필연성 및 필요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해 가는 그 필연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변화된 성향은 계속적으로 성향으로 남는다. 성도의 정신과 마음의 내적이며 외적인 행동을 통하여 그 성향이 완전하게 행사되어 그 목표가 실현된 이후에도 성도의 변화된 성향은 계속적으로 능동적인 모습을 잃지 않는다. 거듭난 성도의 성향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계속적 행위와 하나님과 연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사랑하는 계속적 행위를 통하여 행사됨에 따라서, 거듭난 성도의 현실태는 더욱 확대되며 재현된다.


첫 번째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감각과 기질, 곧 새로운 생명의 원리이다. 그것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능동적인 원리이며, 활력과 힘을 지니며, 계속 고동치며 나아가는 가운데 거룩성을 추구한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에 속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나아가며 진행하며, 자신 안에서 전체의 기초와 원천을 소유한다. 새로운 생명의 원리는 완성됨을 지향하는데,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분출이 시작된다. 또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피조물에 속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나오고 비롯되며 점진적으로 나타나는데, 점점 더 나타난다. 그리고 이 생명의 원리는 그 첫 모습에서부터 자신의 본성을 행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완성되고 결국 그 고유한 완성에 다다를 때까지 진행한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위에서 성도의 변화된 성향의 다함없는 실행으로부터 나오는 거룩성의 "점점 더"(more and more)는 그저 공허한 재현이 아니다. 거듭난 성도가 여러 가지 다양한 맥락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기뻐함에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동일한 지식과 동일한 사랑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또한 여러 가지 다른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서 재현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문집"(Miscellanies) 가운데 "행복"이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상의 연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에 있어서 어찌나 빨리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마는가! 그들은 너무도 빨리 서로의 모든 것을 보며, 너무도 빨리 하나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누릴 수 있는 교제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만다! 그들은 어찌나 빨리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에 다다르게 되는가! 그리하여 더 이상의 새로운 방식은 발견되지도 않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되지 않는가!


에드워즈는 계속 말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영원한 진보가 있는 그 사랑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 속에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며, 더욱 더 큰 사랑스러움이 또한 발견된다.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아름다움 가운데 영원토록 자라갈 것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점점 더 사랑스러운 표현을 발견하고 또 주고받을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하나됨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며, 우리의 교제는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성도들이 새로운 아름다움(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다양한 발산이다)을 알고 기뻐할 때, 그들은 아름다움 가운데 확대되고 자라가며,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최초로 알고 사랑했던 그 가운데서 이미 얻어진 참된 현실태를 재현할 것이다. "영원한 진보가 있는 그 사랑"이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므로, 성도가 아름다움과 존재에 있어서 영원토록 자라가며 진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이루는 자기 확대의 과정 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피조물 안에 있는 이러한 지식은 곧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진 자신에 대한 지식의 형상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계속 성화되는 것은 종말론적 차원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영원 가운데 자신을 점차적으로 전달하는 가운데 의도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점증하는 지식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다. 그러므로 피조물 안에서 더 많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있게 될수록 피조물은 더 깊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사랑 가운데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될수록,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며, 하나님과의 연합은 더 견고해지고 더 친밀해지며, 동시에 피조물은 점점 더 하나님의 모습에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태와 증대의 계속적 역동성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하나님의 아름다움)과의 교제이며 하나님의 삶에의 참여이다.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지금 뿐 아니라 언제라도 현실태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의 성화와 역사의 성화 과정에는 미래를 향한 역동적 추진력이 함께 존재한다. 성도는 자신의 현실태 안에서 계속적으로 증대하며 자라는데, 이러한 증대(increase)는 하나님에게도 의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대는 하나님의 자기 확대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명상한 후에 그저 만족하는 가운데 드러눕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역사와 다가오는 영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 작업 가운데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참여한다. 그것은 이 과정 가운데 직접적으로 관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경건과 실천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하나님의 삶에서 전개되는 현실태와 증대의 리듬 속에 근거한다.



구속과 영생: 세계, 새 하늘, 새 땅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영원, 이 세계와 다가오는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시간성은 중요하다. 그것은 시간 가운데 하나님의 충만성이 재현됨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는 영원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시간성은 하나님에게 영원토록 중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계의 존재를 완성하게 될 것인가?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구속이라는 계획을 완전히 성취할 것인가? 여기서도 답은 현실태와 증대의 리듬이라는 틀 안에서 얻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종말에 이 세계를 완성할 것이지만, 이 세계의 존재는 영원토록 증대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때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은 완전한 현실태로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구속의 열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증대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주님이기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의 현실태를 완벽하게 성취하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목표란 일차적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이다. "구속의 사역의 역사"라는 자신의 글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목표를 성취하실 종말의 시점에 관하여 언급한다. 천년왕국과 그 이후의 엄청난 배교의 시기 이후에 그리스도는 인격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며 사탄에 대한 자신의 최종적 승리를 이룩할 것이다. 이제 교회는 완성되며, 구속의 사역은 (동시에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도) 완전히 성취된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영광 가운데 나타난다. 교회는 한 곳에 모이게 될 것이며,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하여 승천"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제 구속의 모든 역사는 마무리된다 ... 건물의 마지막 돌이 놓여진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는 결혼 예복을 입고 하늘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다. 이제 세계는 마지막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종말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교회가 이 지상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시기의 모든 영광은 새 하늘에서 교회가 누릴 완성된 영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이 올 것이다. 불순종한 자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 "이 세계는 불에 탈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종말에 다다를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최고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상태"에 들어갈 것이며, "그들이 두고 온 것과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무시간(timelessness)적 영역이 아니다. 영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또 완성하지만, 그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은 무시간성도 아니며 그저 지속되는 기간(시간에 대한 질적인 완성이 없는 지속)도 아니다. 영원이란 역사와 자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포함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활기에 넘친 장소들이 될 것이다. 교회가 천국에 들어갈 때 "결코 다함이 없는 영원한 세대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즐길"(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표현들을 주의 깊게 선택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영원"의 개념을 "영속하는 세대"의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최종적 목적(곧 시간 안에서의 자기 확대)이 영속적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의 사역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완성된 구속(救贖)의 현실태의 영속적인 증대는 계속될 것이다. "구원의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역은 계속되기만 하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사역은 아니다." 이렇게 말한 뒤에 에드워즈는 바로 덧붙인다: "하지만 이 사역의 열매는 영원한 열매이다. 이 사역에는 그 결말이 있다. 하지만 그 결말 속에 목표가 성취될 것인데, 이 목표는 종말을 가지지 않는 목표일 것이다." (이탤릭은 후에 첨가됨) 현실태와 증대의 리듬은 여기서도 작용한다. 에드워즈는 이 리듬을 통하여 피조물의 존재를 하나님과 구분되는 가운데 지속적 존재와 의미를 가지는 대상으로서 파악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곧 완전히 현실태의 모습을 실현한 교회는 천국에 들어가며, 여기에서 성부 앞에서 혼인 가운데 연합된다. 혼인은 시작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들은 영원한 혼인의 날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혼인날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혼인의 기쁨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다가올 세계는 전적으로 재창조된 형태의 자연을 포함한다.


부활 이후의 성도들이 외적인 부분, 곧 영혼과는 구분되는 외형의 사람됨을 취하듯이, 그들은 또한 외적인 지각 또는 감각을 틀림없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감각과 지각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그들의 지각 능력은 환희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외적인 감각 가운데 가장 고상한 시각도 분명히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 창조는 옛 것의 회복(restoration) 이상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새 것이 우리가 지금 아는 세계와 전적으로 불연속성을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에드워즈는 그의 "문집" 가운데 "새 땅"(New Earth)이라는 항목에서 천국에서의 재창조된 "육체"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말하고 있다.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서의 성도의 몸의 아름다움은 그들 몸의 각 부분의 매력적인 비율과 그 빛, 그리고 색깔의 비율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은 또한 그들의 정신의 탁월함의 드러남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정신의 탁월함은 그들의 몸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날 것이며, 그들의 몸은 자신들의 정서를 보다 더 쉽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표출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천국"이라고 이름 붙여진 또 다른 "문집"의 항목에서 재창조된 자연에 대하여 좀더 언급하고 있다.


광선이 반사되는 그 비율의 모습은 얼마나 매혹적이며 공기의 진동의 비율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류의 비율이 있어서 감각 속에 완전히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일으킬 수 있도록 새로운 물체를 만들어 내실 수 있다. 그 물체가 만들어 내는 즐거움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질 것이며, 또한 엄청나게 매혹적이며 절묘할 것이다. ...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여기서 지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러한 아름다움은 인간 그리스도 예수와 성도들의 육체에서 주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창조된 하늘과 땅에서 인간 정신의 능력은 또한 엄청나게 확장될 것이다. "천국"이라는 항목에서, 에드워즈는 성도가 가질 새로운 지각과 감각 능력의 모습 뿐 아니라 그들의 지식과 사랑이 점진적으로 증대될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거룩성과 행복에서 영원토록 자라갈 것인데, 나는 이러한 기초로부터 그들이 가질 생각들이 영원토록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도들이 최초로 영화롭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가진 생각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숫자는 유한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영광 가운데 너무 오래도록 살아서 이제는 그들이 살아온 기간의 각 시기(한 시기는 백만 곱하기 백만의 세대에 해당할 것이다)가 그들이 가진 생각들의 수효보다 많아질 때가 틀림없이 도래할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영원토록 증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지식이 증대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거룩성 또한 증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지식에서 증대하고 자라가고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것에서 자라감에 따라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탁월성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탁월성을 보게 됨에 따라서, 마찬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됨에 따라서, 마찬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다가올 세계는 전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도 피조물의 존재에 있어서 역동적인 증대의 운동이 있을 것이다. "천국의 행복은 점진적이며 여러 단계가 있고, 그 가운데 새롭고 영화로운 진보가 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신적인 충만성을 확대하는 무한한 목표는 그 곳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현실태와 증대의 역동적인 원리는 궁극적인 이유와 의미로서 작용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향하여 의도하신 바 이 세계 존재의 현실태와 그 영속적 증대는 하나님의 현실태와 증대의 원리에 근거하게 된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은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간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이 세계 안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영원토록 재현될 나라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 세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세계의 영원한 세대 안에서 신적인 충만성을 외적으로 확대하는 까닭이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그의 주요 저작인 미국에서의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in America)에서 미국 개신교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역동적인 신앙이 어떻게 태동하였나를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삶 가운데 절대적으로 실현되기 전에 이미 세계 안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개신교,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세계 안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만든 열쇠는 무엇이었는가? 니버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적 교리가 열쇠 개념이 된다. 피조물의 모든 면에 걸친 하나님의 변혁하는 주권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향한 기대 뒤에 자리잡은 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라는 착상은 하나님의 생생한 주도권에 대한 믿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니버는 계속 말한다: "삶의 종말과 목표에 대한 착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과 함께 관련되면 될수록, 그것은 피안 세계의 왕국으로서 이해되기보다는 다가오는 왕국으로서 이해되었다."

나의 에드워즈 연구에 의존하여 니버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나는 보충적인 면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할 때, 그 연결의 뒤에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본질적으로 역동적인 성격에 대한 에드워즈의 혁신적 하나님 이해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완전히 현실태를 지니며 자존적인 분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기 확대 및 자기 재현의 영속적 과정을 향하여 영원토록 나아가는 분이다. 요약하자면, 에드워즈는 칼빈주의가 가지는 변혁적인 추진력에 매우 적합한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공헌은 그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현실태적 성격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인간 역사와 관련한 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했다는 점에 있다.


이상현 지음, 노영상, 장경철 공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Sang Hyun Lee, The Philosoph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Princeton, NJ: Princeton Univ., 1988.

서평

"이 책으로 이상현 교수는 에드워즈 연구에 있어서 선두에 서게 된다. 이 책은 페리 밀러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로 에드워즈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이다. 이상현 교수의 책은, 밀러의 책이 놓치고 있는 요소, 곧 에드워즈의 비전의 '역동적' 요소를 올바로 포착하고 이해하고 있다." [알렌 하이머트, 하바드 대학교]

"이 작품은 에드워즈와 관하여 최근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이다.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모든 학생에게 필독서이다." [브루스 커클릭, 펜실바니아 대학교]

헌사
인숙과 서형에게,
그리고 미형에 대한 추억을 위해,
리차드 R. 니버에게

저자 소개
이상현 (Sang Hyun Lee)
현재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하바드 대학교 졸업 (Ph.D., 조직신학 전공)

역자 소개
노영상: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석사과정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
1991-1992년 미국의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논문을 위해 연구
1982년부터 호남신학대학교에서 현재 교수로 재직 중
저서: <Paul Tillich의 기독교윤리 사상에 있어서의 도덕적 명령법의 문제>(1983)
<영성과 윤리>(1991), <경건과 윤리>(1994), <예배와 인간행동>(1996),
<현대 기독교윤리학의 동향>(1997, 공저), <민주정신과 기독교>(1997, 공저)

장경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B.A.),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M.Div.)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졸업(Th.M. & Ph.D., 조직신학 전공)
현재 서울여대 기독교학과 조교수
역서: 밀리오리, 기독교조직신학개론.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그린, 하나님 상상하기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저서: 기독교신앙의 기본진리(예영, 1997), 차고 넘치는 은혜의 물결(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금방 까먹을 것은 읽지도 말라(낮은울타리, 1997), 사랑은 행복한 훈련입니다 (낮은울타리, 1998), 하나님 공부하기(낮은울타리, 1998).

출처 : 지명교회까페
글쓴이 : 아침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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