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스크랩] 약속과 인내,사도행전7:1-8/박종열 목사

아침그림 2016. 6. 24. 10:20

약속과 인내,사도행전7:1-8/박종열 목사

 


계속해서 사도행전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시간까지 사도행전 6장까지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사도행전안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안에는 지혜로서 교회를 다스리는 좋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서 교회안에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좋은 능력으로 인하여서 교회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부흥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적인 사역은 말씀전하는 것과 그리고 기도하는 것 등등에 마음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다하고 다른데에 신경쓰지 아니할 때 교회안에는 좋은 영적인 자질을 갖춘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난 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좋은 사람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영적인 재생산이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역시 초대교회에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자질을 갖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오늘날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이곳에 좋은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으로 붙잡히게 됩니다. 사람들과 논쟁을 할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반대하는 자들을 이겨냅니다. 사람들이 그의 지혜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데반을 모함하게 되죠.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충동질합니다. 그리하여서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도록 그렇게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위하여서 수고를 마다 하지 않습니다. 마치 스데반을 보면 사도와 같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산혜드린 공회에 유대인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재판장이 스데반에게 이들이 고소한 것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스렸다는 내용으로 고소했습니다. 2절에 부형들아 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형이란 단어는 모인자들을 스데반이 높혀서 부른 단어입니다. 스데반은 사람들 앞에서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면서 그곳에 모인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 가운데 모여 있는 유대인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먼저 강조를 합니다. 공통된 분모를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아브라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왔는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거기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스데반의 모습을 통하여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복음을 전할때에 지혜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접촉점이 필요함을 말씀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악한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교훈을 발견하고 지혜를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말씀드릴 것은 -인도하심을 받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실때에 떠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명령하실때에 그 말씀에 우리가 늘 항상 민감하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7: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느닷없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정든 고향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갈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한 용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나서 자라고 여러 가지 정든것들이 많이 있는 고향을 떠나기 힘들어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부모, 형제, 친구들과 선배들이 있는곳이 고향입니다. 불편함이 없는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거의 태어나서 자라다 시피한 성내동이란 곳에 가면 부모님도 계시고, 그냥 마음부터 편안합니다. 길을 걸어도 익숙하고요. 어려서부터 자란곳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곳 사람들이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도 그렇게 낯설지 않아 보여요. 마음이 따듯해 집니다. 그냥 그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익숙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익숙한 곳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시지요? 개인적으로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하면서 익숙한 교회를 떠납니다. 전도사로 사역을 나가면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으로 갑니다. 정말 어려서부터 다니던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내가 이 교회를 떠나서 전도사로서 성도들을 잘 섬길수 있을까? 고민도 되구요. 어리버리하게 해서 짤리기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에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왜냐하면 새 포도주를 낡은 것에 담으면 낡은 것이 새 포도주를 감당을 못하여서 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둘다 보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옛 포도주가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이 있어요. 고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도전하기 싫어해요. 배우기를 싫어하고 안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요. 옛 포도주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들에 둘러 싸여 있어서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향이라고 하는 장소가 그러합니다. 너무나 우리에게 달콤함을 줍니다. 그냥 안주하고 노력하지 않으려고 하고, 부모님이 주시는 안일함안에 있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면서 다짐을 합니다. 내가 성공하기 전에는 이땅을 밟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서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해서 무엇인가 성공하여서 금의환향을 합니다. 고향은 이렇게 좋은 점들이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일하게 하고 안주하게 하고 노력하지 않토록 하도록 하는 그런 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르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고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제가 안산에서 성남으로 개척을 하려고 이사 날짜를 잡고서 몇주후면 가는구나 하면서 느꼈던 것은 주변 자연환경을 누리지 못하는게 너무 아쉽더라구요.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자연환경을 그냥 다 놓아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 정말 아쉬웠습니다. 푸른하늘과 맑은 공기와 산에서 산새들이 울고 단풍과 맑은 바람과 햇살이 있었거든요. 제가 산책하는 코스를 걷는데 정말 이런곳을 놓고서 가야 하나요? 흙냄새가 지금도 그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야만 했던 곳은 향수를 뿌리지 않으면 모란시장안에 개냄새가 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무슨 악취가 24시간 내내 끊이지 않아요. 안산과 비교하면 환경이 완전히 달랐었지요. 겨울에는 전기장판을 끝까지 올리지 않으면 추워서 다른 것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정든곳을 버리고 떠나도록 하시는 경우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무엇인가?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단계 주님께 헌신하며 따라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덜 합니다만, 사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환경과 결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을 의미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제사를 못드린다면 가족들로부터 내어 좇겨야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시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믿는 것이 바로 이러한 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데, 이 약속은 씨앗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7:4-5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시면서 약속을 주시잔아요. 그런데 이 약속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지요. 그러나 그가 가나안에 도착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5절에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실망이 되었겠습니까? 약속만 남발을 하신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서 개척을 하러 성남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 하나 순조롭게 길을 열어주시는 것 같았어요.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보내 주시더라구요. 내가 부탁한것도 아닌데 하나 하나 채워주세요. 인테리어도 열어주시고 또한 여러 가지 교회의 집기들도 채워주시고, 이사올때에 하나 하나 다 맞추어 주셔서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전세 보증금도 받았구요. 기적과 같은일들이 몇 개월 사이에 계속 연달아 일어남으로 인하여서 3년동안 기도한 결과로서 이렇게 좋은 장소를 주셨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다 붙여주세요. 무슨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것도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정작 사람은 안 붙여주세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이정도로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안 보내주셔도 되는 것입니까? 저 실망한 거 보이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약속만 있는거지요. 처음 우리가 개척했을때에 아무것도 없어요. 새벽에 나오시는 성도님 한분만 오세요. 하나님께서 부도 수표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에게나 씨앗의 형태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약속은 씨앗의 형태로 준 것이다. 심는 것은 너의 몫이야. 그리고 싹이 나도록 하고 잘 가꾸어서 결실을 얻어야 한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씨앗의 형태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 심령 가운데 심어야 합니다. 약속을 가지고 기도도 하고요. 하나님 이런 이런 약속을 주셨지요 라고 되묻기도 하고요. 암송도 하고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달라고 부르짖기도 하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입만 벌리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얻을때까지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여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에게 하신 약속을 소망했습니다. 하나님 신뢰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지 알았습니다. 우리역시 하나님께서 이곳에 약속을 주시고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역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기도도 하고, 햇볕도 보도록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인내로 결실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그러한 길을 걷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지요. 사실 우리를 응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망을 하는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길을 먼저 걸었던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영적인 레이스가 있습니다. 우리가 달려야할 구간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뛰어야할 남은 분량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면 그것이 완성되지 아니하는 그런 퍼즐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공동체 가운데 우리앞에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그런 메시지를 받은 오늘날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주님께 헌신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지명교회 까페

 


출처 : 지명교회까페
글쓴이 : 아침그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