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

[스크랩] 청교도사상

아침그림 2017. 7. 9. 13:35

                              청교도사상



청교도 운동은 종교개혁 시대이후인 16세기와 17세기에 잉글랜드국교회 안에서 교회 갱신을 부르짖으며 일어난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청교도라는 말은 종교개혁자들과 순교자들처럼 경건하고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1550년에서 1700년 사이에 무서운 핍박에도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은혜의 교리를 따르는 잉글랜드의 목회자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


그들은 복음을 귀히 여기고 강단에서 하늘의 진리를 불꽃처럼 토해내는 설교자들이며, 성경에서 배우고 깨달은 모든 것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목회자들이다. 또한 청교도들은 따뜻한 목회적 돌봄과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고, 인간의 변화, 새사람이 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성령 충만한 설교를 하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원동력은 회심체험이었다. 존 번연은 두권의 책인 평범한 사람의 천국으로 가는 좁은길’, ‘경건의 연습을 읽으면서 자신의 죄와 종교적 각성을 체험하게 되었고 존 기퍼드는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임을 깨닫게 되었다. 존오웬, 토마스 굿윈, 리처드 십스, 윌리엄 퍼킨스, 토마스후커 등 많은 이들이 회심을 체험했고 강단에서 복음을 설교하는데 탁월하였으며, 죄인을 일깨워 회개와 믿음에 이르도록 하고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애썼다. 청교도 목사들은 설교가 그들의 일차적인 소명이라고 믿고 설교 사역의 우위성을 견지하였다. 설교가 성례나 어떠한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성패를 말씀 사역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또한 청교도들은 강단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드는 특권에 놓여있다고 말하면서 내일 다시 설교하리라고는 확실치 않으므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설교했다.

 

또한 청교도들은 기독교 주요교리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를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칭의, 원죄,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과 부활 등을 붙잡고 있었으며, 인간의 죄악성과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삶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균형이 잡힌 교리를 붙잡고 있었다. 청교도 예배의 특징은 단순성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오직 순전한 교회를 추구했고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요란한 예복들을 벗어던지고 우상들과 여러 형식들과 의식들을 없애버림으로써 소박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주일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강하게 나타나며 주일은 모든 신앙생활의 활력을 얻는 날이라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어느 때 어떤 시기를 막론하고 학대와 핍박의 대상이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목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귀를 베이거나 처형당하기도 했다. 결국 16209102명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잉글랜드 플리머스를 떠나 미국 신대륙을 향해 출항하였다. 그 후 모든 교회는 잉글랜드국교회에 맞추어야 한다는 통일법령이 통과되었는데 청교도들은 이를 반대하고 예배의식의 불필요한 형식 절차들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통일령의 요구에 서명하지 않고 반대한 청교도들은 약 2000명이 국교회에서 추방되었다. 이것이 1662년 대추방령사건이다.



위클리프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존 위클리프는 독실한 로마카톨릭 신자였다. 대학시절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열심히 연구하였던 위클리프는 동료 학생들로부터 복음박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위클리프는 134829세에 성경에 흠뻑 마음을 적시어 심령에 큰 변화를 받아 회심하게 된다. 회심 이후 주님을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전하기로 결심하였고, 전 생애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였다. 위클리프의 시대의 교회는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영향 아래에 있어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기였다. 교황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면서 실상은 잉글랜드를 지배하기 위해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 교황의 권력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교황의 무차별한 권력 남용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또한 교회가 갖고 있는 부는 잉글랜드 전 토지의 거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고 수입은 정부의 수입보다 2-3배 많았다. 성직자들은 세속주의에 빠져 소명을 망각한 채 세속적인 것들에 탐닉하였다. 중세로 들어서면서부터 잉글랜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왜곡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각 마을 신부들은 7성례와 관련된 결혼식, 세례식 등을 주관함에 열중하였으나 말씀을 강론하는 설교를 전함에는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위클리프는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었는데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난 교황주의와 교황의 세속적 통치권, 교황의 무오성, 성직매매, 교황청의 횡포 및 권력 남용을 비판하였다. 교황에 대해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인간인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잘못된 구원관 등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일체의 신앙 사상들을 비성경적으로 비판했고 또한 교회 성직자들의 각성을 외쳤다.

 

중세교회는 성경 해석권이 사제들에게 묶여 있었고 성경과 복음의 빛을 가리우고 있었다. 이때 위클리프는 성경의 권위를 보았고 사제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성경을 일반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가 교회 안에서 다시 유일한 권위로 세워질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당시 번역 성경은 라틴어 성경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경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라틴어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으며 평신도들도 얼마든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성경번역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성경을 번역했고 1382년 최초로 영어 번역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다. 원어인 히브리어, 헬라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서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기도 하지만 신구약 성경 전체가 번역된 것은 라틴어 번역 성경 이후 거의 1000년 만에 있는 놀라운 일이었다.

 

존 위클리프를 통해서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동시에 성경의 권위가 교회 안에서 유일한 권위가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것과도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한국교회 안에 성경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맡고 있는 다음세대의 어린이들에게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세워주는 것이다. 그 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어둡고 혼탁한 한국교회의 상황 가운데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존 위클리프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그 때처럼 성경을 갈급해하는 심령가운데 성경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된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흥의 대로를 열어주실 것이다.



윌리엄 틴데일

 

위클리프에 이어서 성경 번역에 목숨 건 틴데일은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후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옮겨 독일 종교개혁자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는 외국어 실력이 탁월하였다. 특히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하여 성경을 원어로 읽고 연구하였다. 성경으롱 인해 자신의 삶이 새로워진 틴데일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와 유럽대륙에서 말씀의 사역자로서, 성경 번역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14세기와 마찬가지로 15세기 때에도 중세교회 종교 지도자들은 보이는 외형적 건물인 성당 건축에 온갖열정을 다 쏟았고 교회는 말씀 선포와 복음전도, 교회의 생명력에는 태만하였으며, 교리적으로 점점 퇴보하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8세는 성경 번역을 금지하였고 왕들의 승낙 없이 성경 번역과 출판을 할 수 없었으며 나라를 떠날 수도 없었다. 성경을 자기 말로 읽는 잦들이 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틴데일 시대에는 위클리프 영어 번역 성경이 유일한 성경으로서 은밀하게 보급되고 있었다.하지만 사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고 틴데일은 성경없이는 사람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우는 것이나 진리를 깨닫고 확신을 갖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틴데일은 암흑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 될 수 있도록 라틴어에서 자국어가 아닌 원어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일념이 강했다. 성경번역에 대한 틴데일의 열정은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한 공격이었기에 그가 가는 길에는 항상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틴데일은 비밀리에 어느 부유한 상인이 제공한 집에서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방해가 뒤따랐고 왕의 승낙없이 영국을 떠나 독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곳까지 첩자들을 파송하여 방해하였다. 1524년 독일에 도착한 틴데일은 함부르크에서 비밀리에 영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그 후 1526년 보름스에서 신약성경 6천부가 인쇄되었다. 그 후 틴데일은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하여 모세오경과 요나서, 여호수아와 역대하를 번역하였다. 하지만 모든 구약성경을 완결하지는 못했지만 일부를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번역한 성경은 곡물을 실은 잉글랜드 행 배 안에 다른 상품처럼 위장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경을 반입하였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성직자들은 항구를 조사하여 성경을 찾아냈고 찾아내는 즉시 성경을 불태웠다. 런던 감독은 많은 돈을 주고 신약성경을 대량으로 사서 소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 더 많은 성경을 찍어 낼 수 있었다. 성경을 잃어버린 중세시대에 틴데일은 목숨을 다해 성경을 그들에게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다. 틴데일 성경의 책임 운송을 책임졌던 동료들이 순교를 감당해야 했다. 결국 틴데일도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고 빌보드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성경에 목숨을 건 틴데일은 위클리프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 이유는 원어에서 바로 영어로 직역했기 때문이다. 틴데일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성경 번역에 힘을 썼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틴데일의 가슴 속에 품은 분명한 비전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분명한 비전을 품은 사람, 목숨까지 내놓을정도로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할 각오가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면 말로는 가볍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나에게 영광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공부하며 더 성경보고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틴데일처럼 목숨까지 내놓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말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고 사모할 것이다. 위클리프의 성경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려던 틴데일의 모습을 통해서 더 분명한 하나님나라를 전하도록 준비해야겠다.



존 낙스

 

하나님의 귀중하고 중요한 도구였던 존 낙스는 1514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가까운 해딩턴에서 태어났다. 낙스의 회심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초기에 나타난 복음의 영향을 통해 변화를 받게 되었는데 낙스는 로마교회 교리를 반대할 뿐 아니라 개혁주의 교리를 확산시킨 위샤트의 설교를 통해 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낙스는 로마카톨릭과 결별하게 되고 개혁주의로 전향하게 된다.

 

16세기 초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스코틀랜드에 넘쳐나게 되었고, 틴데일의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박해도 심해지면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백성들은 수없이 로마 교황권에 대항하여 싸웠다. 또한 16세기 스코틀랜드국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아서 대부분의 사제와 수도사들은 너무나도 무지하여 알파벳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며,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낙스는 세인트앤드루스에 있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설교자로 청빙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가슴속에 품었던 꿈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를 세워가는 것과 스코틀랜드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설교 사역하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이 프랑스 함대의 공격으로 인해 함락되면서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낙스 역시 포롤 잡혀갔다. 그 후 그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낙스는 개신교를 지지하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나 잉글랜드에서 설교자로 다시 사역을 했다. 먼저 낙스는 개혁교회 예배가 가장 성경적인 예배임을 주장하였고 성경을 근거로 자신이 작성한 예배서를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공기도서의 사용을 거부하고 교회가 예배와 성례 집행에 있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특히 성찬식 때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로마카톨릭교도인 피의 메리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핍박하였다. 메리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에 도착한 낙스는 칼빈을 만나 난민 사역을 하게 된다. 그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로서 칼빈 강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며 목회하였다. 그리고 낙스는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 전체를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성경 주석의 집필 과정에도 관여했다. 이것이 바로 1560년 출판된 제네바 성경이다. 15595,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슴에 품은 존 낙스는 12년 동안의 힘든 망명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조국에서 주님의 나팔을 불기 위하여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낙스는 에든버러 세인트자일스교회의 목회자로 부름받아 칼빈주의적인 개혁을 표방하며 종교개혁운동에 앞장섰으며 그의 설교 주요 주제들은 철저히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이었다. 마침내 종교개혁 운동은 스코틀랜드에서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의 사자처럼 선포한 낙스의 종교개혁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존 낙스는 이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이 핵심이었다. 존 낙스처럼 성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는 내 삶을 그리고 내가 사역하는 교회가 얼마나 성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를 되돌아보고 다시 성경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물론, 존 낙스도 핍박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핍박의 길로 자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핍박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슴을 능력의 사자처럼 선포하는 것이다.



언약도

 

교회사 가운데 오랜 시간이 흘러가도 여전히 신앙의 거장으로 기억되고 거론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박해 속에서 말씀으로 영혼을 일깨웠던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를 빼놓을 수 없다. 존 낙스의 영향을 받고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의 전통을 지켜온 장로교인들은 언약도의 길을 걸어 가는데, 이 언약도는 순수하게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만을 일컫는 용어이다. 언약도들이 살았던 시대는 왕이나 국가의 권력이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간섭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언약도들은 교회의 머리는 예쑤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 국가의 교회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반대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은 국가와 교회를 손에 쥐고 세속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국가 권력의 세력 앞에서 담대하게 싸우며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자신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내던졌다.

 

제임스 6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이 국가만이 아니라 교회까지도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으로 부여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왕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러한 왕의 잘못된 정책을 물려받은 찰스1세는 아버지 제임스의 종교정책인 감독제를 계승하였지만 실제로는 로마카톨릭교회로 복귀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언약도들은 장로교를 국교로 한 성경적인 개혁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 복귀하려는 왕의 처사에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6382월 애든버러에 있는 그레이 프라이어스 교회에서 유명한 국가언약을 체결하였다. 이날은 하나님과 스코틀랜드 민족 공동체가 혼인 서약을 하는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언약도들이 국가 언약을 체결한 그 언약의 내용은 스코틀랜드의 영적 자유와 진리, 복음과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언약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한 언약신학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언약도들은 생명력 있는 믿음과 불같은 열정으로 명료하게 성경의 진리를 전파하고 온 몸을 던져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력하게 설교하였다. 그러자 전부 당국은 언약도 목사들을 추방하였다. 추방당한 언약도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조지 길레스피, 윌리엄 거스리, 제임스 더럼, 알렉산더 페든, 도널드 카길 이와 같은 언약도들은 진리에 강하고 불의에 투쟁하며 능력있는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대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들은 분명코 하늘에서 온 불꽃 이었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그러나 16605, 화란에서 망명중이던 찰스 2세가 다시 왕으로 추대됨으로서 곧바로 감독제도가 부활되고, 성직 임명권 제도가 도입되었다. 찰스 2세의 학정과 종교탄압은 갈수록 강도를 높여갔다. 가정예배가 금지되었고 언약도 목회자들이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야외집회는 반역죄로 다스려졌다. 진정한 예배를 사모한 언약도들은 전부 당국의 방해와 탄압 때문에 무장을 하고 예배를 드렸으며, 야외에서도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1661년부터 1688년기간 동안 무려 18000여명의 언약도들이 순교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또한 붙잡혀간 언약도들의 수용소는 지붕이 없는 감옥이었다. 그곳에 갇힌 언약도들은 비 맞아서 죽고, 헐벗고 춥고 얼어서 죽고, 굶주려 죽었다. 특별히 얼마든지 탈출 할 수 있었지만 신앙의 순수성을 붙잡으며 끝까지 언약 신앙을 지켰다. 그러므로 지붕없는 감옥은 언약도들의 흔들리지 않은 믿음과 탁월한 영성을 말해준다.

 

언약도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지켰다. 언약도들의 삶을 보면 단 한순간도 언약보다 먼저 생각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하는 우선순위 하는 것들이 있지는 않은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언약도들의 삶처럼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을 지키며 삶 가운데 무엇보다 코람데오의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



사무엘 루터포드

 

언약도의 성자 사무엘 루터포드는 1617년 에든버러 대하에서 성경과 라틴어, 헬라어, 교회사, 개혁교회 신학, 논리학 및 수사학 등의 교육과정을 공부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기를 열망하였다. 신학자인 루터포드는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가 얻어낸 것들이 위협받던 시대에 살았다. 1627년 루터포드는 스코틀랜드 앤워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교회에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부임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고 복음을 증거한 복음 전도자로서 그의 목회 사역은 그의 수고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신앙의 바른 지식과 실천으로 이끌었다. 그는 목회 사역하는 동안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 심방하는 일, 저술하는 일이 항상 그의 일이었다. 그는 항상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연구를 하였다.

 

그런 반면에 루터포드는 앤워스에서 목회하는 동안 인간이 경험하는 슬픔과 고난을 겪게 되는데 13개월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품으로 간 아내의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또한 딸 한명을 제외하고 사랑하는 두 자녀을 잃게 된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는 큰 시련을 겪에 된다. 폭풍처럼 밀려온 뼈아픈 일들로 인해 그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갖게되는데 곧 사랑의 선한 목자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그는 1645년 또 하나의 큰 시현이 다가오는데 신학적으로 알미니우스파 시드세르프가 겔로웨이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감독주의를 열렬히 옹호한 알미니안 감독이었기 때문에 개혁 신앙의 후예이며 장로교주의자였던 루터포드에게 독을 뿜어대면서 감독권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이때 루터포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하시는 은혜요 불가항력적인 은혜임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는 남부 스코틀랜드의 주된 옥외집회 설교자로 나섰다. 옥외집회를 감행한 루터포드는 종교법원에 소환되었고 목회직 박탈과 설교금지령을 당하였다. 결국 그는 스코들랜드 아버딘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 형벌을 받게되며 9년동안 섬겼던 교회와 교우들을 주님께 밭기고 그 당시 감독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의 요새였던 아버딘을 향해 출발하였다.

 

루터포드는 유배지 아버딘에서 가장 가혹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 서한집을 기록하였으며 총 365편의 편지 가운데 220편의 편지를 약 2년에 걸친 유배중에 썼다. 그 편지 주제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과 혐오스러운 죄의 죄 됨에 대한 깊은 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와 권면으로 가득하고 근심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깊은 동정과 양떼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천국에 대한 그의 불타는 열망이 가득하고, 개혁주의 교리와 신자의 영적 경험들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다. 또한 루터포드는 성도들의 실천사항으로서 신앙생활의 핵심인 주일성수와 성만찬 준수, 기도생활, 말씀생활에 순종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이처럼 그의 편지 속에는 말씀을 적용하며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 많다.



리처드 백스터

 

참된 목자의 본이 되는 리처드백스터는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615년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한 잉글랜드의 슈롭셔의 로우토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지만, 성경을 읽는 중 회심을 하였고 백스터에게 영적으로 감명을 주어 어린 백스터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역사 부분을 읽고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학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지만 존 번연처럼 독학하였고 혼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와 신학적 지식을 위한 논리학, 형이상학, 물리학 등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한 백스터는 일생동안 그의 사역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1638년 백스터는 잉글랜드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1641년 작은 도시 키더민스터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서 교회에 부임하였다. 먼저 백스터는 목회사역에서 최우선적으로 설교준비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설교사역이 항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부지런하게 준비했고 자신을 준비했다. 백스터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제대로 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보조 사여자들과 함께 매주 2일에 걸쳐 교구민들의 각 가정을 반문하여 교리문답교육을 하였다. 백스터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회중들이 요리문답 교육을 통해 많은 영적 지식을 얻도록 하였다. 백스터가 생각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회심이었다. 그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교리문답 교육을 필수적인 목회 요소로 보았던 이유는 영혼들의 회심을 위한 가장 유익한 수단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기도생활도 강조하였다. 그의 기도는 매우 강력했고 기도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특별히 성도들에게 쉬지 않는 기도생활을 가르쳤다. 더 나아가 백스터는 철저한 공예배 출석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드리던 예배를 회복할 것을 가르쳤다. 또한 백스터는 경건한 신앙생활의 실천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그는 성도들의 생활이 개혁되기를 원하면서 특별히 거룩에 대해 자주 설교하였다.

 

그 결과 작은 촌락 키더민스터에 살고 있는 2천여명의 성인들 중 매주 600여 명의 신자가 회집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부흥으로 인해 아침과 저녁의 가정예배시간이 되면 모든 가정에서 시편을 읽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모든 골목이 찬송과 기도 소리로 메아리쳤다. 백스터는 키더민스터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얻은 경험을 통하여참된 목자를 썼다. 그는 교회의 온갖 부패가 목회자에게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면서 목회자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교회의 성장이 외적인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먼저 목회자의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주변 교회의 목사들과 함께 기도와 성경연구와 기도모임을 가졌다.

 

백스터는 1638년에 잉글랜드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나 실은 비국교도 목사였다. 그는 잉글랜드국교회의 예배 의식과 규율에 얽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교회 안에서도 비국교도들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이와 같은 정부 당국과 청교도들과의 대립은 백스터의 설교사역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하였다. 백스터는 1662년 대추방 이후로 비국교들 가운데 보수적인 집단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정부 당국이 설교를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온 성도들에게 당당하게 설교를 전했다.



조지 휫필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소망이 없던 잉글랜드의 18세기 초반을 가장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대로 바꾸어 놓은 이물이 바로 조지 휫필드이다. 하나님은 21세의 젊은 조지 휫필드를 어두운 시대에 복음의 빛을 발하기 위해 준비시켰던 것이다. 휫필드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 속에서 옥스퍼드 펨브로크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가운데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 찰스 웨슬리를 알게 된다. 그 후 그는 그들과 함께 홀리클럽모임에 참여하여 엄격한 신앙생활과 영적 훈련을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휫필드는 스코틀랜드 신학자인 헨리 스쿠걸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이 그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 후 거듭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끼게 되면서 심각한 영적 투쟁의 절정에 도달한다. 그 후 휫필드는 메튜헨리의 주석과 여러 청교도들의 유명 작품들을 읽음으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올수가 있었다.

 

회심 후 휫필드는 그동안 읽었던 청교도 저서 등 모든 책들은 옆으로 다 치워둔 채 오직 성경만을 무릎위에 놓고 묵상하였다. 그는 말씀 한구절 읽고 기도하고, 또 한구절 읽고 기도했다. 그 때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순간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휫필드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한시간 동안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그의 신앙은 칼빈주의적인 신조를 고백하였고, 그의 신학 사상과 교리에 있어서 개혁주의였다.

 

휫필드는 1736년 영국교회 성공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 잉글랜드국교회는 매우 침체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성령충만한 영적 생활이 그의 설교에 불이 붙게 하였다.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교회당을 매우고 첫 번째 설교에서 15명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휫필드의 설교 무대는 교회 강단 뿐만 아니라 야외인 정거장, 돌담, 승마대, 풀더미, 빈들이 되기도 하였다. 휫필드의 설교주제들은 칭의와 중생,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과 선택교리, 경건의 능력들이었다. 특별히 그의 핵심 메시지는 중생이었다. 더 나아가 교회의 죄악이 국가의 죄악보다 더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는 메시지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계속해서 설교하였다. 휫필드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고 놀라운 영적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의 설교를 통해 회심한 다수의 청년들이 목회자가 되었다. 18세기 잉글랜드에 일어난 부흥은 기성교회를 완전히 깨워 생명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휫필드는 설교 사역 중에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았다. 영국 성직자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그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교를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욕이나 반대에도 사랑의 무기로 맞섰다. 그리고 그는 미국 땅에서도 대각성운동에 불을 당기게 되었다. 미국을 7번 방문하였고, 마지막 미국방문중 숨을 거두었다.



존 웨슬리

 

동시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던 비범한 사람 존 웨슬리는 청교도적 신앙유산을 양친 모두에게 물려받았지만 특히 어머니 수잔나에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녀는 라틴어, 헬라어, 철저한 규율, 엄격한 경건생활, 영적 성장 등을 웨슬리에게 교육시켰다. 웨슬리는 17세기 청교도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다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칼빈주의이지만 잉글랜드는 알미니안주의가 강하게 들어왔다. 특히 웨슬리 시대에는 이신론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가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고 있었다.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고 학교에서 경건운동을 일으키며 회원들과 함께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728년에 잉글랜드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의와 내적 체험의 증거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1738년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저녁집회에 참석했는데 누군가 마틴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때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믿음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깨닫게 되었다.

 

회심 체험 이후 웨슬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오직 사람의 영혼구원이었다. 불붙은 복음전도에 대한 열기로 그의 마음이 매우 뜨거워진 웨슬리는 복음전도 사역자로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오직 영혼 구원하는 일에만 모든 시간을 보냈다. 더 나아가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자랑하는 100명의 용사만 있으면 온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온 세계의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갈망하던 존 웨슬리는 그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씩 기도하였다. 또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매일 하루에 몇 시간씩을 따로 떼어 부지런히 말씀을 읽었다. 웨슬리는 회심 후 한달만에 옥스퍼드대학에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라는 주제로 담대하게 설교하였는데 이것이 그날로부터 일생동안 웨슬리의 설교 주제가 되었다. 복음에 불붙은 웨슬리는 1738년부터 런던시내나 시외를 막론하고 어디든지 강단을 빌려주기만 하면 열심히 설교하였다. 웨슬 리가 설교할 때마다 청중들 가운데 다수는 크게 감명을 받고 눈을 흘렸는데 특히 소외된 계층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많이 나타났다. 웨슬리는 하루에도 30km나 말을 타고 가서 설교하기를 4-5번씩 하였다. 어떤 때는 그가 설교하기로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여 보면 3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메말라가는 영국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서 영국의회가 살아나고,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윤리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18세기 영국교회 부흥이며 웨슬리는 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다니엘 로울란드

 

자신의 교회 성도들을 끝까지 성실하게 목양한 참된 목자 다니엘 로울란드는 1733년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고서 형 존 오울란드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로울란드는 대다수의 웨일즈 성직자처럼 자기 임무에 태만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과 술 마시는 일에 보내고 있었다. 로울란드는 죄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면서 율법을 설교하였지만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지 못하여 큰 열매를 거둘 수 없었다. 로울란드는 너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교하라는 동료의 조언 이후로 회심하고 그의 설교도 율법과 십자가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로 바뀌었다. 로올란드는 그리피스 존스 목사의 설교와 기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지만 놀랍게도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그 진리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삶과 사역에 완전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는 몸과 영혼과 마음을 설교에 완전히 쏟아 부었다. 로올란드 설교의 독특한 특징은 그의 모든 메시지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놀라울 만큼 표현해 내는 적절한 언어 사용능력이 뛰어났다. 또한 그의 설교는 매우 실제적이고 경험적이었고 신선한 사고와 주제에 대한 로올란드의 남다른 풍성함이 있었다.

 

다인엘 로올란드는 홀란가이쏘에서 목회하였는데 갈수록 그리스도의 진리의 충만한 빛의 사람으로 변해갔고 온전하고 명료하고 균형잡힌 복음의 설교자로 서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웨일즈 지방의 각 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했는데 어떤 이들은 50-60마일 떨어진 먼 곳에서도 왔다. 이처럼 로올란드의 설교를 통하여 1738년 흘란가이쏘에서부터 놀라온 웨일즈 부흥이 시작되었고, 로올란드는 수백명의 영혼들에게 복의 도구가 되었다. 웨일즈 전 지역을 다니면서 설교하였던 다니엘 로올란드는 자신의 교구를 벗어나 설교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는 교회가 허락해주지 않을 때에는 방이나 헛간, 노천에서 설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로올란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알지 못하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성경을 많이 외우고 암송하고 이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안에 풍성히 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지속적이고도 열정적인 기도의 실천이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면서 살았다.

 

존 번연과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하웰 하리스도 동일하게 쓴잔을 마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웨일즈 부흥을 경험하고 있던 로울란드에게도 큰 시련이 다가왔다. 가장 큰 시련은 30년 동안 오로지 잉글랜드국교회 목사로서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던 그가 많은 주의 목회자들의 오해와 질투 속에서 1763년 국교회로부터 축출을 당하고 그의 직분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 한순간도 뒤로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반대나 핍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 주님의 일을 해나갔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복음 전하는 일에 바쳤다.

 

로올란드을 보면 놀라운 것은 친구의 조언에 충격을 받고 회심했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귀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로올란드는 진리를 깨닫고 홀란가이쏘에서 목회를 한다, 목회의 부분에서 로오란드에게 배울점이 많다. 특히 성경을 다 알고있었다는 것, 많이 암송하고 있었다는 것은 반드시 배워야할 점이다. 그는 또한 설교의 장소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는 장소를 중요시여긴다. 로올란드에게서 배워야한다. 말씀의 씨는 그 장소가 아닌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속에 살았다는 것이다. 나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안에 풍성히 거하며 일생을 살아가야겠다. 그래서 훗날 로올란드처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길 기다려야겠다.



하웰 하리스

 

18세기 웨일즈 부흥에 있어서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어 수많은 회중들이 회심하도록 했던 하웰 하리스는 1735년 그가 탈가쓰에 있는 교구교회에 참석하였을 때 교구 목사는 다음 주일에 거행할 성찬에 대한 광고 중 만일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면 기도하기에도, 살기에도, 죽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다고 말한 것에 충격을 받아 그의 심령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는 다음 주일 성찬식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는 중에 죄의식을 깨닫고 회개의 고뇌에 빠졌다. 이 투쟁에서 결국 하리스는 자신의 죄 용서의 확신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얻게된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무언가를 더 필요로 하는 무한한 갈증이 남아 있었다. 회심 후 1개월이 지난 하리스는 흘란가스티의 교회 종탑에서 은밀하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였는데 그때 그는 이전의 모든 체험들을 무색하게 할 만한 성령이 처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케 하는 또 다른 체험을 하였다. 그 후 하리스는 불신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향한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고, 죄 가운데 빠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발로 뛰며 사람들을 방문하여 예수님을 전하였으며 구령의 열정에 불이 붙었다.

 

결국 하리스는 간절히 영혼 구원에 힘썼고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력한 말씀 선포로 잠자는 웨일즈를 깨우기 시작했다. 하리스는 노천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그가 메시지를 외치는 곳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그의 설교는 회개하는 자를 격려하고, 무관심한 영혼을 일깨우고, 악한 자들을 경고하고 부주의한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하리스의 메시지 방식은 조지 휫필드처럼 철저하게 준비된 성교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감동 속에 영감의 메시지를 전했다. 설교 듣는 청중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회심하는 은혜가 있었고, 그들의 심령에 깊이 파고 들었으며 한번도 설교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은혜도 있었다. 하리스에게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귀한 목회자들을 배출해 내는 대학을 세우는 꿈이 있었다. 결국 그는 선교의 비전이 있는 천팅돈 백작부인과 함께 다른 이들의 도움을 얻어 트레베카에 설교자들을 훈련시키고 목회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세운다. 이 대학에서 졸업한 젊은이들 가운데 후에 영국에서 가장 크게 쓰임받는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편 하리스의 순회 설교 사역은 결코 녹록치가 않았다. 사탄의 가장 험악한 공격과 극심한 방해도 그를 기다리고 잇었다. 그는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성직자들의 비방과 비난하는 설교와 군중들의 협박과 심한 욕설, 악한 음모 등 많은 고난을 겪었다. 복음에 불탄 하리스는 갈수록 더 심해진 박해 속에서도 독수리의 날개를 단 것처럼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겨내며 설교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하리스의 목회 사역으로 인해 신도들의 숫자는 크게 늘어났지만 그는 많은 사역들로 인해 너무 기진하고 지치고 피곤했다. 1773721일 하리스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의 장례에는 20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하리스는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 나는 아직 많은 친구들이 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거나 적극적으로 권유하거나 눈물을 흘린기억이 없다. 하리스를 보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것을 느끼게되었다. 또한 하리스는 목회자 양성에 큰힘을 쏟았다. 이런 그의 열정은 모두 죄를 깨닫지 못한사람들을 어떻게든 깨워보기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리스에게 이런 모습들을 배워서 나도 나만 알고, 나만 누리는 복음이 아니라 진짜 복늠을 친구들에게 전하도록 해야겠다. 그들을 위해 울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윌리엄 맥컬로흐, 제임스 로브

 

맥컬로흐는 1731년 글라스고 근교 캠부스랑에서 안수받았으며, 학식있고 사려 깊고 유능하고 영적인 사람이요 신실한 목회자였다. 교구민들과 동료 목회자들은 그의 열정과 목회적 헌신을 인정하고 있었다. 맥컬로흐는 자기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늘 큰 고통을 느겼다. 하지만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했고, 개인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하나님께 부흥을 간구했다. 1741년 중생의 교리에 관한 설교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자기의 회중들에게 중생의 성격과 필요성을 명확하게 가르쳐주었다. 제임스로브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킬싸이스의 신실한 목회자 였다. 로브 목사는 1713년부터 성경에 충실한 말씀을 매주 선포하였다. 1740년 로브는 중생의 교리에 관한 설교시리즈를 시작하였다. 1742년 맥컬로흐 교구의 영적부흥의 소식이 킬싸이스에 있는 로브에게 전해졌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강한 임재와 사역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특별히 자기 성도들에게 역사해 줄 것을 간구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영적 유산 중에 기도모임이 있는데 그곳은 성도들의 기도모임이 잘 이루어지는 지역이었다. 윌리엄 맥컬로흐, 제임스로브 등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이 오랫동안 부흥을 위해 기도하였고,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는데 부흥의 불길이 퍼진 주요 원인은 결국 말씀사역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대부분 장소에서는 그 각성운동이 백성들 사이에서 나타났고 비상한 기도의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목회자들은 회중들과 함께 모인 집회와 기도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결국 이러한 여러 기도회와 모임들을 통해서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였다.

 

부흥의 효과로 캠부스랑과 킬싸이스에서는 전반적으로 도덕과 윤리가 크게 회복되었으며 사람들 중 죄에 대해 일시적이거나 가볍게 또는 표면적인 회개가 아닌 깊고 마음 속을 꿰뚫어보는 회개가 있었다. 그들은 눈물로 자신들의 죄악과 부패한 본능을 통회했고, 존귀한 그리스도를 경멸한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면서 자신들만큼 악한 사람이 없다고 고백했다. 스코틀랜드 부흥을 통해서 장로교회의 정신 안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요소가 스며들기 시작했고, 복음주의의 설교 강조와 개인의 성결이 두드러졌다. 특히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심이 자라면서 선교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1740년대 스코틀랜드 일어났던 부흥의 현상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깎아내리고 비난하여도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임을 드러내었다. 윌리엄 맥컬로흐와 제임스로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만을 담대히 전하였으며 대중에게 인기를 끌기 위한 어떠한 형태의 설교를 하지 않았다. 특별히 그들이 중생의 교리 시리즈 설교를 계속하였을 때 영적 부흥이 임했으며 더 나아가 그 부흥이 매우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했을 때 임하였고 자연스럽게 퍼졌다.

 

기도모임운동은 그 시대나 현대나 모두 부흥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같다. 책에서는 기도모임을 스코틀랜드의 영적유산이라고 표현했다. 기도모임은 그 안에 자연스럽게 회개가있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두세사람이 모인곳에 나도 그들중에있다고 밀씀하셨다. 기도모임을 한적이 있었다. 지금도 하고있는 곳도있다. 확실히 그 기도모임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다시한번 느끼는 것 깉다. 로브목사는 기도모임의 비밀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기도모임을 통해서 스코틀랜드의 부흥의 불길이 번지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었다. 결국 기도모임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셨고, 참된회개와 복음주의적 요소들이 그 가운데 스며들게되었다. 맥컬로흐와 로브목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십자가만을 선포하였다. 나도 이런 목회자가 되어야겠다. 다른것을 전하는 것이아니라, 대중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십자가 나의 확신을 가지고 전달해야겠다, 내 안에 복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토마스 찰스

 

1755년 태어나 신앙적으로 자랐지만 1773년이 되어서야 다니엘 로울란드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심하였다. 그 이후 그의 가슴 가운데 복음이 확실히 새겨지면서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사역을 하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대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옥스퍼드대학 지저스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지적능력을 연마하였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위를 마칠 때 쯤 그의 고향 웨일즈에서는 자리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남 잉글랜드 서머셋에 있는 두 교회에서 부목사 자리를 찾게 되어 5년 사역을 하였다. 이 사역 기간 동안에 찰스는 수많은 고난과 훈련의 시간을 겪게 되었다. 1784년 가을 그의 설교 사역가운데서 곧 열매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토마스 찰스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의 확장이 빠른 시간안에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장애물들이 많았다. 그는 설교만 해서 북웨일즈의 영적인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해결책으로 순회성경학교를 조직하게 된다. 그는 먼저 성경을 각 사람이 갖게하고 성경을 읽고 쓰고 암송하도록하였으며 성경교리를 많이 가르쳤다.

 

북웨일즈 감리교의 본부가 된 발라에서 토마스 찰스는 감리교들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는 목사들 중 하나로 사역을 계속하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변함없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가르쳤으며 성도들이 성경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큰 힘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신실한 그의 사역이 밑바탕이 되어 1791년 하나님은 발라 땅 가운데 잊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었다. 설여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온 부흥 이후 찰스의 후반기 사역의 초점은 순회설교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견고히 하는데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웨일즈에는 실로 놀라운 이들이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길거리 어디서나 성경을 읽는 모습이 보였으며 노동자들은 일터로 성경을 가져가 기회가 날 때마다 성경을 꺼내서 읽었다. 성경을 향한 이런 격렬한 사랑은 아침이슬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찰스는 여전히 많은 학교와 교회들을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었다. 감리교 목회자들 모임에서는 그의 리더쉽 또한 필수적으로 필요하였다. 그의 이런 끊임없는 사역, 순회설교 여행 등은 그의 몸을 많이 상하게 하였으며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1799년 한 겨울날 웨일즈 산을 넘으면서 손에 동상이 걸려 왼쪽 엄지를 절당해야 했다. 목숨까지도 위태로웠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놀랍게 응답되어 찰스는 살아났고, 이후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아 다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14년 가을,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 분명히 가장 무시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토마스 찰스는 하늘나라로 부름받았다.

 

토마스 찰스는 복음이 널리퍼지게하는 역헐을 했지만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할 것이 필요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쓰고, 암송하고를 반복시켰다. 그리고 성경교리를 많이 가르쳤다. 사실 나는 교리에 대해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교리가 중요하고 내가 가진 복음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교리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토마스찰스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교리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찰스목사는 성도들이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길 원했다. 그래서 성경교육에 힘을 쏟았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강한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오직 성경이라는 말이 절대 틀린것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알고 묵상하고 깨달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려야겠다. 토마스 찰스와 같은 뛰어난 엉적 지도자가 되기위해 먼저 준비되어야겠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미리미리 준비해서 훗날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함없도록 나를 잘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겠다. 성경중심, 교리중심 그리고 암송하기 등을 체계적으로 지켜나가 친밀한관계를 유지해야겠다.



크리스마스 에반스

 

크리스마스 에반스는 17661225일에서 태어났다. 경건한어머니였던 그녀는 에반스에게 항상 자신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을 권면하였다. 1783년 흘로인뤼도와인에 있는 장로교회에 참석하였던 에반스는 그 지역 근방에 일어난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이 부흥으로 인해 에반스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깨어났으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에반스는 불경건한 상태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 두려움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고자 진리를 더욱 갈망하고 찾게 되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에반스는 그의 세상적인 친구들을 떠나 글을 읽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회심은 배움에 대한 필요성과 열망을 평생 갖게해주었다. 에반스의 불경건한 친구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회심에 반감을 샀다. 친구 중 한명이 막대기로 그의 눈을 때려 그는 한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한쪽 눈을 실명하던 날 에반스는 심판의 날에 대한 생생한 꿈을 꾸게 되었고 에반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되었다.

 

1790년 에반스는 북웨일즈 흘린지방에 있는 침례교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함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으며 곧 새로운 능력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실 그의 설교는 자기가 직접 작성한 설교가 아니라 베버리지주교의 설교집에서 빌린 것이었는데 회중 중 그 설교집을 가지고 있었던 한 농부는 이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농부는 에반스가 나중에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 이유는 그의 기도만큼은 은혜가 넘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반스의 다소 독특하지만 열정 넘치는 복음적인 설교에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셨다.

 

1792년 쯤 에반스는 하나님이 그를 앵글시 섬으로 부르고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에반스는 하루동안 금식과 기도를 선포한 후 사역을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사역 가운데 큰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하였다. 34년동안 앵글시 섬에서 사역을 마친 1826, 60세에 접어든 에반스는 카필리에서 2년동안 놀라운 사역을 하게 된다. 이 작은 마음에서는 뛰어난 에반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의 최고의 설교들 대부분이 이 부흥의 시기에 행해졌다. 그리고 그 후 카티프로 이동하여 4년동안 사역하다가 마지막 목회지인 카나번으로 이동하였다. 1838716, 에반스는 스완지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하였지만 그의 특유의 드라마틱한 복음주의 설교였다. 에반스는 그 주 금요일 하늘나라로 갔다.

 

에반스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를 애꾸눈이라 불러가면서 그의 회심에 초점이 맞춰지면 맞춰질수록 나는 에반스의 불경건한 친구들에 대하서 궁금해졌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을 떠난 에반스, 나는 이 모습이 올바른 모습인지에 대해 의아하다. 나도 내 친구들이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모른다. 그런 친구들을 뒤로한채 나는 오로지 나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갈수가 없다. 내 세상이 이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반스는 떠났다. 물론, 그들이 갑자기 변한 에반스를 놀리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에반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편, 에반스는 기도의 사람미었다. 기도에서 은혜가 넘쳤다는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 에반스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셨고, 그 원동력이 기도인것같다. 나는 에반스에게서 기도의 뮤습을 배워야겠다. 에반스는 기도로 준비하며 사역을 준비했고 설교를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이런 준비가운데 있으니 설교가운데 부어주시고 채워주시는 말씀의 은혜가 부흥의 불길로 번질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무엇을하든지 e.m바운즈에 명언처럼 기도하는 사람을 결코 이갈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며 기도로 준비해야겠다. 지금부터 기도를 하며 나의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진짜복음을 위해서, 설교를 위해서 기도해야겠다. 에반스에게 있던 설교의 능력은 곧 기도였고 나도 그 능력을 소유할것이다.



존 엘리아스

 

토마스 찰스와 함께 부흥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갔던 존 엘리아스는 1774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깊은 할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법을 배웠다. 엘리아스는 어렸을 때부터 남웨일즈에서 하웰 하리스와 다니엘 로울란드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과 부흥의 소식을 들으며 자라왔다. 사실 동 시대에 엘리아스만큼 하나님께 쓰인 종이 없었으며 북웨일즈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일으킨 사람도 없다. 다니엘 로울란드와 하웰 하리스가 주로 사역한 남웨일즈와는 달리 북웨일즈의 영적 상황은 매우 어두웠다. 모든 불경건한 죄들이 난무하고 설교자들이 심한 핍박을 받을 정도로 영적으로 죽은 곳이었다. 엘리아스는 방탕함과 죄와 악행으로 유명했던 한 박람회에서 설교하였고 놀랍게도 그의 설교로 그 유명한 박람회가 다시는 열리지 않게 되었다.

 

발라를 중심으로 한 북웨일즈에 부흥이 일어났을 당시 존 엘리아스는 18살이었다. 1794년 성탄절 때 카나번셔에서 열린 장로교 모임에서 엘리아스를 목회자로 받아들였다. 엘리아스는 목회를 매우 진지하고 장엄하게 하였다. 목회자로 첫 모임을 인도하였을 때 엘리아스의 대표 기도를 통해서 모든 회중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웠다. 존 엘리아스는 매우 귀한 설교자 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 나타난 효과는 참으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많은 자들은 그저 호기심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지만 순식간에 그들의 영혼은 위대한 진리들 속으로 동화되었다. 1802년 엘리아스는 사탄의 요새 중 하나인 뒤들란을 반문하여 설교하였다. 이곳은 주일날 수천명씩 카니발에 참석하여 모든 모양의 불경건과 죄가 행해지던 곳이었다. 엘리아스는 몇몇의 신자들을 데리고 카니발 밖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기도의 강력함은 그곳의 영적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존 엘리아스는 그의 힘과 능력, 권위를 하나님과의 매우 깊고 가까운 교제 속에서 얻었다. 그의 서재에서 무릎꿇고 하나님과 늘 은밀한 교제를 하였으며 그의 의자 위에는 기도의 흔적으로 눈물이 늘 있었다. 엘리아스는 늘 성령의 충만함과 깊은 교제를 강조하였다. 또 그는 연구와 공부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계속적인 설교 사역과 순회 사역은 그로 하여금 성경을 연구하고 독서를 통해 공부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도록 하였다. 존 엘리아스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 웨일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들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1837년 그는 설교 속에 나타난 힘, , 권능, 권위는 요즘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고백하였다. 이같은 현상의 원인을 엘리아스는 교리의 약화 속에서 찾았다. 교회를 허물고 무너지게 한 가장 큰 원인을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지적하였다. 엘리아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사건과 인간의 의지나 결단이 아닌 오직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개인의 구원에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또한 인간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고 부패하였기에 절대로 혼자서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존 엘리아스는 18살의 나이에 목회자가 되었다. 청교도들의 일부는 이른나이에 목회자가되웄다는 것이다. 복음의 확신이 있다면 하나님은 나이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강력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통해서 사역을 감당하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청교도들을 보면서 느낀다. 어린나이에 많은 언어를 독학하고, 책을 많이읽어 자신을 준비한사람들이었다. 나는 24살의 나이에 아무것도 이뤄논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이런 청교도들의 삶을 본받아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겠다. 분명한 것은 준비되었을때 하나님은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의 확신을 붙들고 니가 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하면서 진혜를 구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겠다. 그리거 엘리아스처럼 하나님께 붙들린 도구로 사용되어져야겠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1813년에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맥체인은 14세가 되던 해 애든버러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1,2년 동안 세상적 쾌락과 즐거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형의 죽음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매우 친하게 지낸 형이 어린 나이에 죽게되면서 맥체인의 영혼을 강하게 흔들었고 영적인 잠에서 깨우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세상적이고 육적인 생활에 큰 충격이 되었다. 그 때부터 맥체인은 진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세상적인 즐거움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맥체인이 29세의 짧은 생애를 살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으며 주관하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맥체인의 회심과 목회자로의 부르심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맥체인은 그의 삶과 사역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멘토 토마스 찰머스를 만나게 되고 열정적이며 경건하며 복음주의적 칼빈주의를 따르고 있었던 칼빈주의자 찰머스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

 

1835년 목사 안수를 받은 맥체인은 두니페이스에서 1년동안 사역을 하게 된다. 그 후 던디의 성베드로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대부분의 회중들은 단지 교회만 다니는 형식적인 사람들이었다. 던디에서 처음 몇 달 동안 맥체인의 사역은 매우 힘들었지만 그는 성령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사역 가운데 가장 먼저 오는 것은 죄에 대한 인식과 죄책감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죽음과 타락에 눈을 떠야 성령께서 십자가를 그들의 마음에 보여 줄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서 맥체인은 늘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성령께서 역사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영적으로 깨어나고 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모임은 매주의 기도모임이었다. 기도를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을 매우 강조했는데 이런 기도모임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맥체인은 심방사역을 하였다. 그는 보통 하루에 20가정을 심방하였고, 그가 회중들을 만나러 나갔을 때에는 열정과 사도요한의 사랑이 그의 가슴에 담겨 있었다.

 

영혼을 향한 열정만큼 맥체인의 삶을 풍성하게 한 것은 그의 묵상과 경건 생활이다. 매일 아침 630분에 일어난 그는 2시간의 기도와 묵상 속에서 보냈다. 또한 맥체인은 사역 말기에 성도들을 위해 성경읽기표를 만들었다. 그 읽기표에 따라 성경을 읽으면 1년에 구약한번 신약과 시편은 두 번 통독하도록 되어있다. 마틴 로이든 존스는 54년동안 맥체인의 성경읽기표에 따라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맥체인은 광범위한 독서가였다. 신앙의 거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경건한 삶의 원칙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영적 성장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38년 말쯤 쉼 없는 사역 때문에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서 던디를 떠나 애든버러로 가서 쉬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양들을 기억하며 목회서신들을 그들에게 썼다. 1839년 맥체인은 건강을 회복하고 성베드로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매주 열리는 기도모임에 맥체인은 번즈와 함께 강단에 섰을 때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만큼 교회가 꽉 찬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많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맥체인은 죄와 심판이 대한 설교를 많이 했다. 나는 과언 많은 청중들을 앉혀놓고 죄와심판에 대해 얼마나 강력하게 선포할 수 있을것인가를 생각하보게 되었다. 정말로 힘들것 같다. 말은 할 수있지만 스쳐지나가며 말할것같다. 그러나 나는 청교도들을 보면서 복음의 확신이 있다먼 죄와 심판을 강하게 말할수있다고 생각하게되었다. 청중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설교자가 되기보다는 청중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듣고 변화를 시키는 강한 설교자가 되어야겠다. 맥체인은 그 일을 자기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성령께서 분명허게 그의 설교깨마다 임하셔서 일하셨다. 나가 하려고 하지말고 성령이 할 수 있도록 성령이 변화시킬수 있도록 설교의 공간을 내야겠다.



제임스 맥퀼킨

 

제임스 맥퀼킨은 북아일랜드에서 쓰임 받았던 사람으로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콜빌레라는 여인은 회심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그녀가 북아일랜드의 밸리메나를 방문하여 다른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 여인이 예정에 대하여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부분에서 접근을 하고 있을 때 그대는 한번도 주 예수를 만난적인 없다는 말에 조지뮬러 목사의 일기와 책들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얻었고 무엇보다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은 주님을 만나 변화된 맥퀼킨을 붙잡고 부흥의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857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소식들이 점차적으로 북아일랜드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코너 근처의 작은 학교 교실에서 기도모임이 시작된다. 그 기도모임은 제임스 맥퀼킨, 제레미아 메닐리, 존 윌리스, 로버트 칼라인이라는 네명의 청년들로 출발했다. 이 기도모임의 특징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코너 교구에서의 복음 설교 사역과 오직 하나님이 성령님을 그 지역 사람들과 교회에 강력하게 부어줄 것을 위하여만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코너 작은 기도모임에 불붙은 부흥의 불길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코너에서 회심한 한 사람이 아호길 주변의 친구들에게 찾아간일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매우 간절하게 기도하였는데,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셔서 그 친구들이 거의 모든 가족들이 죄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1589년 제임스 맥퀼킨과 그의 친구들은 아호길 장로교회의 부흥회에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하였다. 저녁에 모인 군중들의 수는 차고 넘쳤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설교를 들었다. 이와 같이 부흥이 일어나면서 교회 공공 예배와 모임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위해 울부짖었으며 끊임없이 기도모임들을 계속 생기고 진해오디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은혜의 부흥의 불길은 아호길 외에 여러지역에서 일어났다. 여러 지역에서 열린 기도회에는 수백명, 수천명이 몰려 계속 부흥의 불을 타오르게 했다. 단기간 내에 수백명이 회심하였다.

 

1859년 얼스터를 휩쓸었던 부흥은 약 1만명의 회심자들을 교회로 불러모았다. 이 영적 각성은 기독교가 개인과 전 사회를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지역사회에 범죄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얼스터 판사들은 재판할 사건이 없었고 경찰이 조사할 범죄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감금 중인 죄수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방탕한 삶의 요새였던 술집들이 여러 군데 문닫게 되었으며 술취함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과 더러운 언어 생활은 사라지게 되었다. 깊은 회개와 생활의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별히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깊은 사모함은 깊어져만 갔다. 사람의 이름이 높아지는 일은 없었으며 모든 기도 모임 가운데 사랑의 교제가 넘쳤다.

 

제임스 막퀄킨은 조지뮬러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밑에서 배운것은 아니지만 그의 착을통하 그의 삶과 그의 신학을 배웠다. 나도 나의 멘토를 만나는 일아 굉장히 중요한것같다. 그것이 책을 통해서든 직접만나서든 너무나도 중요한것같다. 그 멘토를 통해 영향을 받고 삶의 코칭을 받는 것은 나혼자의 결정보다 훨씬 이로울것이다. 맥퀄킨은 조지뮬러의 말에 깊은생각을 갖게되고 기도모임을 이끄는 지도자가된다. 기도모임은 분명히 하나님이 부흥의 도구로 세우시는 귀한 자림임이 분명하다. 그 기도의 제목이 맥퀄킨의 기도모임처럼 오직부흥을 위한 것이더라도 하나님은 응답하심이 분명하다. 나도 기도모임이 있는데 그곳에서 부흥을 위해 좀더 기도하고 부르짖어야겠다. 청교도들은 부흥에 갈급히했다. 하나님은 갈급한 심령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갈급해야한다. 갈급함은 진정한 복음을 소유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값진 복음에 대해서 진짜 복음, 진정한 복음의 확신을 다시한번 되새겨야 함이 필오하다, 복음의 확신을 제대로 가져야겠다.



다비드 모건

 

다비드 모건은 칼빈주의 감리교인으로 경건하게 성장했다. 그는 어떠한 은사도 지니지 아니했고 목사로서의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1857년에 안수받은 후 그는 부흥이 시작되기 전부터 성령 충만함을 구하고, 항상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날 성령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임하여 놀라운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2년 동안 사자처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는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듯 하나님이 그의 설교에 많은 기름부음을 서락하셨다. 모건의 설교비법은 이중설교이다. 그는 전통적인 설교를 했지만 그러면서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예배 때 찬양을 하고 아주 뜨거운 설교를 전했다. 다비드 모건이 가는 곳마다 성령이 강하게 임했고 수십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이 다비드 모건을 따라다녔다. 모건 같은 평범한 설교자가 그의 능력 훨씬 너머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다. 부흥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다.

 

험프리 존스는 1854년 이후에 미국 뉴욕과 웨일즈 웨슬리안 공동체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27세의 감리교 목회자인 험프리 존스의 사역은 그 당시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과 찰스 피니의 부흥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이후로는 부흥사 험프리 존스로 알려졌다. 웨일즈로 돌아온 험프리 존스는 먼저 고향인 트레돌에서 설교하였다. 존스 설교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즉, 교인들을 깨우려는 의식적인 시도와 교회일이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잘못하는 성도들을 설득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하나님이 매 예배 때마다 그의 메시지에 기름을 부으셔서 능력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다. 그의 설교와 충만한 기도생활과 열정은 이웃하고 있는 두 마을을 일깨우는데 사용되었다.

 

웨일즈 부흥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기도의 회복이다. 성령께서는 다비드 모건과 험프리 존스의 순회설교 사역과 모임에 큰 은혜를 부어주셨다. 하지만 동시에 웨일즈 전국에서는 많은 기도모임들이 생겨서 성도들이 기도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기도 모임이 활발해졌으며, 어떤 교회는 8월 첫 주일을 부흥을 위한 기도 주일로 정했다. 이러한 기도 운동을 인도하고 주관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의 리더쉽이 드러나기보다 성령의 역사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모임과 예배 가운데 성도들과 회중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강력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장언함과 영광 앞에 항복하였다. 또한 모든 부흥의 현장을 따르는 특징 중 하나는 영적 생활의 생명력이다. 성도들이 죽어있던 영적 생활과 신앙은 다시금 살아나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의 모습들은 풍성한 회심의 역사가 나타났고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다비드모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지적인 사람, 지삭안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된다. 모건은 목사로서 훈련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성령충만에 대하 갈급하였고 무엇보다 복음에 확신이 있었다. 그후 다비드모건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몰고다녔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부어주신다, 절대 지식이 많은사람, 하나님을 문자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아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통해 나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길,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충먼에 대해 갈급해야 함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적으로 채우기보다 내가 먼저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내가 먼저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겠다. 그러기위해 신학도 중요하지만 낭,ㅇㅇ을 먼저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경을 바로알고, 복음의 확신을 가져야겠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좋은 서적임이 분명하다.



찰스 스펄전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찰스 해돈 스펄전은 17명의 자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회중교회 목사 가정에서 그리고 잉글랜드 국교회에 반대했던존 번연의 영국 침레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이 청교도 스펄전가는 비국교도 목사들과 회중교회 목사들을 배출하였는데, 스펄전은 개신교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 때문에 고난 받았던 청교도 신앙을 가진 자신의 혈통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스펄전의 상상력은 풍부했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위대한 책에 사로잡혀 그의 독서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스펄전이 제일 귀히 여기는 책은 존번연의 천로역정이었지만 최고의 책은 성경이었다. 1950년 주일 아침 스펄전은 궂은날씨 때문에 본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콜체스터교회로 가려했지만 심한 눈보라로 아틸러리 스트리트 감리교회 예배당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시골교회 설교자는 스펄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설교했고 그날 선포된 말씀이 스펄전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1851년 스펄전은 17세 때 워터비치 한 오두막집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했는데 나중에는 주변의 여러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캐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침례교회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교회 목사로 초청하였다. 특별히 스펄전은 영적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능력을 보였고, 그 능력은 설교할 때마다 나타났다. 그가 설교하자 사람들이 회심하기 시작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되었다. 스펄전은 1854년 런던에 있는 뉴파크스트리트 침례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되고 200년 전에 청교도 침례교인들이 세웠던 유서 깊은 역사가 있는 그의 교회는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한 달이 못가서 주일마다 아침 저녁으로 예배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복도까지 차고 넘쳤다. 맣은 사람들이 교회에 자리가 없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청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청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스펄전의 설교철학은 설교를 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말하는데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의 목회 주제처럼 그의 신경도 예수그리스도이며, 그가 강단에 존재하는 한 예수그리스도가 설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스펄전의 모든 것은 그의 설교에서 나왔으며, 그의 사역 기간 동안 예배나 성례전보다는 설교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 그의 설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위대한 비밀에 대한 영광스러운 비전으로 가득 채워졌고, 죄와 은혜교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구원의 영광이었다. 그의 목표는 어느 본문을 다루더라도 주 예수와 그의 십자가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스펄전의 영성 키워드는 예수 그리스도, 말씀, 기도, 교리, 은혜 성령이다. 특별히 그에게 기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우선시했고, 교회 모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최선책은 개인기도훈련이라고 가르쳤다. 특별히 스펄전은 시편강해에서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찰스 스펄전은 내가 꿈꾸는 설교자의 모습이다. 그는 설교를 하지않고 오직 진리를 말하는데 집중하여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하는 그 모든 순간에 회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 내가 설교할 때에 오직 진리에만 초점을 맞추어 회심하는 사람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 돌아오는 역사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되어지고 싶다. 스펄전의 설교에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강단에 있을 때에는 그가 없고 예수그리스도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독서이다. 찰스스펄전은 독서량이 굉장히 많았다. 성경뿐 아니라 천로역정을 100번이상 읽었다고 한다. 나도 지금부터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하면서 독서량을 늘려나가야 겠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날까지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겠다.




에반 로버츠

 

부흥 사역을 위해 선택된 에반로버츠는 어린 나이부터 영적인 일들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토마스찰스의 기독교지침, 존번역의 천로역정, 하지의 신학개요 와 그 시대의 중요한 신학 서적들을 읽었으며, 특히 부흥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3세에 회심한후 그는 교회 모임인 예배와 기도회, 주일학교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나중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고, 찬송을 인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11년 넘게 두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울부짖었다. 자신을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실 것과 웨일즈에 강력한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었다. 에반로버츠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설교자로서의 소명에 대해 눈을 뜨고 25세의 나이에 칼빈주의 감리교회 목사 후보생으로 뉴캐슬 엠린에 있는 예비학교에 입학했다. 에반로버츠는 성령을 강하게 체험한 후 웨일즈를 복음화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으며 영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소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규 훈련과정을 포기하고 개인 성경공부와 기도, 찬양,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로버츠가 인도한 공적인 부흥전도 사역은 1904년 러훠의 모라이야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모두 17명이 모여 기도회를 시작하였던 첫 집회부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로버츠와 모인 사람들은 새벽 3시까지 성령의 임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 결과 모라이야 교회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로버츠의 첫 집회 후 30일 만에 37천명이 주께 나아와 회개하였다. 에반로버츠가 도구로 쓰임 받았다. 설교는 별로하지 않았고, 찬송과 기도 그리고 간증이 집회의 주요 성격이었다. 집회를 위해 어떤 동원이나 광고도 없었지만 더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계속 진행되었다. 그 때 하나님이 또 가시 불같은 성령을 쏟아부어주셨다.

 

웨일즈 부흥의 불길은 여기저기서 엄청난 능력을 동반하면서 번져나갔다. 죄를 깨닫는 사람들의 억제할 수 없는 흐느낌과 통곡, 통회하는 사람들의 참회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환호들로 가득했다. 교회는 밤낮으로 가득찼으며, 충성되고 헌신된 사역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 때 부흥은 모든 계층과 연령대에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젊은 층과 여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다. 부흥 시기에 웨일즈 신문에서는 매일 회심자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1904년부터 1905년에 기록된 사실 6개월의 기록된 회심자들의 숫자는 10만명이었다. 이와같은 영적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때에 범죄 발생률은 크게 하락세를 보였고 극장가와 축구장도 숫자가 크게 감소했고, 술집과 도박도 크게 줄어들었다. 광부들이 회심하여 지하 갱도에서 기도모임을 가졌고 어린아이들도 가정과 헛간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웨일즈 부흥은 처음에는 많은 열매를 맺었지만 말씀의 부재로 인해 성도들이 깊은 영적 생활로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로버츠에게서 정통 개혁주의, 칼빈주의의 신학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회심자들을 교회의 신앙고백이나 기독교의 진리 안에 굳게 서는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성도의 수가 감소하고 복음이 변질되었다.

 

에반로버츠에게 배울 점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11년동안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은 끈기와 인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힘들다.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힘들어서 때로는 잊어버리고 기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음을 인지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또한 집회를 통해서 찬송과 기도의 집회가 인상적이다. 기도를 통해서 새벽 3시까지 철야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철야기도를 해보았던 적이 있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면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로만 하지말고 실제적으로 삶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다시금 다짐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일생동안 성령의 기름부름과 부흥을 갈망하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흘란가이쏘에 있는 트레가론문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6세 때에 성 바돌로뮤병원의 부속 의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나중에는 탁월한 성적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또한 그는 왕실 주치의였던 토마스 호더 경을 보좌하는 수석 진료 소장으로 일하면서 병원 의료 학교에서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어린시절부터 20대 이전까지 복음을 듣지고,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았던 젊은 로이드 존스는 지성적이고 교양있는 명의로서 이름을 날리는 길에 막 들어써다. 그 무렵 하나님은 그의 삶에 끼어드셨다. 20대 중반에 거듭나게 된 로이드존스는 내과진료를 통해 가난한 자들이나 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술과 성생활의 방종으로 망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문제는 신체나 지식에 있지 않고 영적인데 있다는 것을 깨달을면서 자신의 죄인 됨의 의식과 영적 빈곤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7년 로이드 존스의 첫 목회지역은 에버라번 샌드필즈에 있는 베들레헴 전진운동 선교교회로서 웨일즈 칼빈주의 메써디스트 회중교회이다. 그 지역은 철강 산업과 관산 지역의 중심지로서 노동자 계층과 극도의 가난한 주민들이 많았고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첫 설교는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 선포하였고 이러한 그의 복음의 선포에 성령의 능력이 크게 역사하였다. 인류의 구원을 향한 그의 열정은 그의 회중들에게 불을 붙였다. 웨스트민스터교회 담임목사인 켐벨모건은 웨일즈에서 사역을 열심히 잘하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를 청빙하였다.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 로이드 존스는1938년부터 캠밸 모건의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모건의 은퇴로 인해 1943년부터 본격적인 담임목회사역을 하였다. 알미니안주의와 세대주의적인 색깔을 내포하고 있었던 캠벨모건과는 달리 로이드존스는 성경본문에 충실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신학과 청교도들의 신앙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칼빈주의의 주권적 은혜의 교리를 주저없이 선포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진정한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설교사역은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며, 교회와 목회사역의 최우선적 임무였다. 로이드존스의 설교핵심주제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이었으며, 더 나아가 죄, 회심, 살아있는교회, 확신, 중생, 거룩, 교회연합, 교리, 하나님의 주권, 영광, 진노, 심판, 마귀 등으로 설교했다.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설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특징은 능력이었다. 그 능력은 곧 성령의 기름부음이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와 영성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다. 설교자에게 기도의 영역과 성경연구의 영역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로이드존스는 하나님과의 생명력있는 교제를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로 삼았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사상의 핵심중의 하나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이다. 즉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는데 다른 표현으로 빛과 열, 그리고 논리와 불을 의마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란 불이 붙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신학이었다.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을 쓴 저자,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의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이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만큼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설교에 대한 열의가 뛰어났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처럼 나도 설교가 가지는 권위가 그 무엇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그의 신학사상 또한 나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이 말씀과 성려이다.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불이붙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신학이라고 말한 로이드 존스목사님의 사상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늘 다짐하게 만든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그처럼 나도 담대하게 설교를 통해 구원을 선포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던칸 켐벨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쪽 헤브리디스의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섬과 여러 작은 섬에 하늘의 부흥이 수차례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부흥의 요충지였던 헤브리드스는 첫 번째 1824년부터 부흥이 시작되어 1835년 사이에 루이스 섬 곳곳에서 부흥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1949년 루이스 섬 부흥의 주역인 던칸 캠벨은 교회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캠벨은 실력있는 백파이프 연주자였다. 그런데 연주도중 성령님이 그에게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여 죄를 깨닫게하셨다. 그리고 깊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이 그를 엄습해 버렸다. 그는 갑자기 그의 인생의 허무함과 빈곤함 그리고 공허함을 느꼈으며 이 고독한 마음 때문에 그는 그 날 더 이상 연주를 하지 못하였다.

 

그의 회심의 첫 열매는 믿음선교회에서 나타난 그의 열정적인 헌신이었다. 곧 바로 갬벨은 작은 마을들을 거의 다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데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켐벨은 오랜 기간동안 신학공부하는 것보다 믿음 선교회에서 제공하는 9개월 집중교육에 지원하여 복음 전도하는 일을 위하여 중점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또한 마음속에 동족 스코틀랜드인들을 향한 소망을 품고 있었던 캠벨은 그의 동역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북부와 섬들을 순회하면서 열정적으로 설교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캠벨은 3년간 이러한 순회사역을 하다가 1924년에는 스카이 섬까지 방문하여 전도사역을하였다. 캠벨은 믿음선교회에서 사퇴하여 스카이 섬에 있는 아드바서 자유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4년간사역했다. 그 후 모라이 포스지방으로 사역지를 옮겨 교회를 건립하였고, 10년간의 충실한 사역으로 많은 청년들의 신앙이 바르고 굳게 자라게 되었다. 그 후 그는 1940년 팔키크에 있는 자유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지만 그곳에서는 의외로 사역의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도중에 다시 믿음선교회로 들어갔고 곧바로 북부지방을 돌며 사역을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여러 번 부흥을 체험했던 루이스섬 부흥의 열기가 식어지면서 젊은이들은 믿음을 버리고 타락과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다. 1949년 던칸캠벨은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루이스 섬에 도착했다. 그 때 두 할머니의 중보기도가 루이스 섬 부흥의 불을 붙이고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고백하게 되었고 예배가 끝난 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임재에 실신하고 영혼의 고통으로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그들의 죄악성을 깨달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던칸캠벨은 기도하는 사람, 부흥을 여러번 목격했던 사역자, 성령에 사로잡힌 부흥사였다. 그는 헤브리디스 부흥 시기에 말씀 증거하는 일에 크게 쓰임받았던 설교자 이다. 성령께 사로잡혀 루이스 섬에 도착한 캠벨은 성도들의 영적 기대감에 놀랐고 피곤을 잊어버리고 온 열정을 다하여 집회인도에 나섰다. 캠벨은 발바스에서 5주동안 저녁마다 집회를 인도하였고 캠벨의 설교주제들은 구원받은 자의 영광과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진노, 기도의 중요성, 거룩, 성결, 죄인들의 멸망, 천국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던칸캠벨을 보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역이 사람마다 정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던칸캠벨은 믿음 선교회에서 순회선교를 하며 많은 것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본인을 부르심을 개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스카이섬에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사역지를 옮겨서 또 사역하기 시작했다. 14년동안 놀라운 사역들을 하였다. 청년들의 신앙이 바르고 굳게 자라났다. 분명히 그 당시에도 하나님이 쓰신 것이다. 그리고 팔키크로 옮겨서 사역을 한다. 역시 이 때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크게 사용하신 것은 그가 처음 순회선교를 하였던 믿음선교회로 돌아왔을 때이다. 하나님은 그의 첫모습을 보시면서 그곳에서 크게 사용하시기를 계획하고 계선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자 하는 자리를 찾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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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바른신학 바른신앙
글쓴이 : 이성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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