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1:1-15. 죄의 속성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들/박종열 목사
Ⅰ. 서론
1.들어가는 말
한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면 출생과 성장과 쇠퇴하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만든 모임이나 회사등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기가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나중에는 죽음에 이르는 그런 과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루스 월트키는 사무엘하 2장에서 8장을 다윗의 발흥기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사무엘하 9장부터 20장을 다윗의 쇠퇴기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죄의 속성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 설교를 자주 들어 보셨습니까? 아마도 죄에 대한 설교를 자주 듣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전하는 분이나, 그 설교를 듣는 분들 모두 때로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죄에 대한 설교가 필요한 것은 죄를 다룸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은혜가 무엇인지? 은혜의 깊이를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살핌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죄를 다룸으로 인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놀랍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이해함으로 인하여서 죄를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주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Ⅱ. 본문강해
1. 첫 번째 대지. 죄는 언제나 둔감한 그리스도인을 유혹해 올 수 있다. [1-2절]
삼하11:1-2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브루스 월트키가 다윗의 생애 중에서 사무엘하 11장부터 다윗의 쇠퇴기라고 분류를 했는데요. 그런데 이스라엘 이라는 국가로 보았을 때는 최절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력은 막강하였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라가 안정됨으로 인하여서 조금씩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고 둔감해지는 시기였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이 늘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는 노년에도 하나님 앞에서 청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점이 굉장히 아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못했었습니다. 여호수아 14장에 보면 갈렙은 노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활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청년과 같았습니다. 다윗은 소년시절과 가난하고 고생하던 시절에 오히려 더욱더 경건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것들을 소유하면서 오히려 영적인 긴장감이 느슨해진 모양입니다.
1절에서 ‘해가 돌아와’라는 말은 유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1월 곧 아빕월, 태양력으로는 3월이나 4월이 다시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Living bible은 ‘다음해 봄이 되어’라고 번역을 합니다. 팔레스틴 지역이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왔지만 봄에는 오히려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하기에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들이 전쟁에 출전해야할 그런 시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암몬과의 전투에 출전하지 않았고 부하들과 병사들만 내 보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옥상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죄가 다윗을 유혹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서 죄가 영적으로 둔감한 그리스도인을 언제든지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긴장감을 잃어버린 이후에 직무태만이라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직무에 태만함으로 죄로 틈을 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습니다. 죄가 타켓으로 삼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한 인물이라면, 영적인 지도자라면 더욱더 죄는 공격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할 경우에 수 많은 피해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두 번째 대지, 죄는 주도 면밀 하고, 치밀하며, 때로는 불도저처럼 밀어 붙인다. [3-9절]
죄의 속성이 주도면밀 합니다. 계산적입니다. 치밀하게 작전을 세웁니다. 또한 한번 먹잇감을 발견했다면 멈추지 않고 공격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마치 격투기 선수가 상대의 약점을 발견했거나, 상대가 흔들린다고 여겼을때에 그 기회를 살려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다윗이 마치 오랫동안 그 범죄를 게획하였던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경건한 다윗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속성 가운데 주도면밀하고, 또한 치밀하고, 먹잇감을 발견했을때에 맹수처럼 달려들어 공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타켓으로 삼은 대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신하에게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 여인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삼하11:3-4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신하는 그 여인이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라고 말했습니다. 신하의 대답이 참으로 재미 있습니다. 마치 신하는 그녀는 이미 한 남편의 아내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4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여인을 데려오게 했고, 간음죄를 범하였습니다. 아마도 평소에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했던 다윗이었다면 신하의 말을 듣고 그 지점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사로잡힌 다윗은 자신의 계획을 기어코 실행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뿐 아니라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에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들여 아내와 잠자리를 갖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 앞에서 자기 홀로 집에 들어가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3. 세 번째 대지,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10-11절]
삼하11:10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삼하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공격당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늘 항상 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다름이 아니라, 우리야의 충성스러운 고백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야가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왕궁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왜 집에 들어가지 않았냐고 질문을 했을때에 우리아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을 합니다.
삼하11:11 '우리 군대가 지금 전쟁 중이며 여호와의 궤도 그들과 함께 있고 나의 지휘관인 요압 장군과 그 부하들이 빈 들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아내와 같이 잘 수 있겠습니까 ? 내가 대왕 앞에서 맹세하지만 나는 절대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둔감해 있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아의 고백을 통하여서 한방 크게 먹이십니다. 헷 사람 우리아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마치 소년 시절에 다윗의 고백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아는 하나님과 그리고 자신의 상관인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충성스럽고 참으로 믿음직 스러운 신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포겔만은 “우리아는 가정의 사치와 안전과 포만을 거부하고 전선의 격렬하고 위험스러운 실존을 선택한다.” “우리아는 모세 언약의 가치를 버리지 않고 도덕적으로 실족하지 않는다.” 라고 우리아에 대해서 서술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더불어 싸울때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백성에 의해서 더럽혀 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다윗은 경건하고 참으로 용맹한 어린 군사였습니다. 그러했던 다윗의 모습은 지금 온데 간데 없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으로 개종한 우리아가 그 옛날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다윗에게 각성을 불러 오도록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아의 고백이 하나님과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지 않토록 하는 하나님의 사인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죄를 피할 수 있도록, 또한 각성을 할 수 있도록 소중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파렴치 하고 악랄한 모습을 우리아라고 하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을 통해서 비추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그의 발흥기와 쇠퇴기로 나눌 수 있는 구분을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과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살인하는 시점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이 사건이 주는 파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4. 네 번째 대지, 죄는 깊은 상처를 남기며,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11-15절에 다윗은 자신 앞에서 충성을 다했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고의적으로 죽이라고 하는 편지를 요압에게 우리아를 통해서 전달합니다. 그는 그를 향한 충성심을 발휘했던 신하를 죽이는 것으로 갚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죄로 인해서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아라고 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통해서 다윗에게 주셨던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그는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서 다윗은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51:9-12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전에 누리던 영적인 은혜를 상당부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서 영적인 활기를 잃어버리고, 눈물로 깊은 밤을 지샜습니다. 그렇게 그는 시편 51편의 고백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는 더욱더 크나큰 상처를 남깁니다. 또한 그 상처가 치유되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만일 다윗이 영적으로 민감하여서 간음과 살인을 피할 수 있었다면 그의 섬김으로 인하여서 많은 이들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그 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심각하게 망가뜨립니다. 마땅히 감당해야할 의무와 특권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Ⅲ. 마치는 말.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깨뜨리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이 필요하였지만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죄의 치명적인 파괴력과 죄의 속성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지 우리 가슴에 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니의 자비하심과 택하신 이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 사랑과 은혜는 더욱더 빛이 납니다. 용서받지 못할만한 수준의 죄인을 용납하시고, 기다려 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몸둘바를 모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죽는 순간까지 잊지 말아야할 진리가 있다면, 하나님은 성도를 향한 자비와 사랑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저는 오늘 사무엘하 11:1-15절 본문을 가지고 ‘죄의 속성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마치 횃불과도 같아서 언제 모두 태워 버릴지 모릅니다. 한번 유혹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우리가 기억함으로서 우리가 경계를 삼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우리가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그때까지 충성을 다하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의 깊히가 더해 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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