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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로마서14:1-15:13절을 중심으로 성도들의 화평에 관한 바울의 권면연구/박종열

 

 

제목: 로마서 14:1-15:13절을 중심으로 성도들의 화평에 관한 바울의 권면 연구/

박종열 목사

 

 

. 들어가는말

 

성도간에 화평을 추구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성도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나 빠짐없이 다 알고 있는 지식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를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하여서 교회는 분열이 되기도 하고,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악순환을 계속해서 반복하기도 하고, 좋지 못한 본을 후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이 바울이 로마서를 썼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시대의 우리 자신의 문제 이기도 한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로마서 14장과 15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신을 통하여서 전하고 있는 화평과 하나됨에 대한 권면을 살펴봄으로 인하여서, 그 당시에 로마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로마 교회를 향한 화평과 하나됨에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메시지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성도들에게도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어느 시대나 어느 때에나 다른 원리가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로 돌아갈 때에라야 만이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 할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첫째, 로마서가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 시대상황을 살펴봄으로 인하여서 본문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 들일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필자는 바울이 이 서신을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어떤 사람들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바울의 권면을 받았던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봄으로서 또한 본문의 의미를 더 깊히 이해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필자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통하여서 본문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본문의 의미를 우리가 밝히 앎으로 인하여서 바울의 화평에 권면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분명히 이해 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필자는 바울의 로마서 안에서의 화평에 관한 본문과 다른 서신에 나타난 화평에 관한 본문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러한 바울의 화평에 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해석될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화평과 하나됨에 원리를 우리 시대 교회와 그리고 가정과 사회안에서 어떻게 실천할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찰해 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으로 본글을 마치려고 생각을 한다. 아무쪼록 이 부족한 글이 하나님께서 로마서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신 화평과 하나됨에 대한 원리를 우리가 밝히 이해하고, 이러한 화평과 하나됨에 관한 메시지가 우리의 마음에 깊은 공감과 함께 놀라운 형제 사랑으로 실행되어질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인하여서 이땅 가운데 하나님 살아계심과 부흥의 역사가 이땅 가운데 다시한번 불처럼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 본론

 

1. 로마서가 쓰여진 배경

 

로마서는 바울이 쓴 서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서 안에는 바울 당시의 특정한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서신들을 살펴보아도 이와 비슷한 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할수 있다. 그러므로 비평적인 학자들 조차도 로마서가 바울 서신임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할수 있다. 바울은 아마도 주후 57, 3차 선교 여행중에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을 것이다(20:2-3). 로마서는 바울신학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바울이 자신의 신학을 완벽하게 요약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는지는 알수 없다. 다시말하면 이 말의 의미는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것들이, 로마서에 모두다 나타나고 있다고 할수 없다는 의미이다. 로마서는 목적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특별히 쓴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가 여러 가지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유대인과 이방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로마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긴장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로마교회는 아마도 유대인 교회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로마안에 유대인 사회는 부유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가난했다. 주후 40년대 어느해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그 이후에 글라오디오가 죽고, 그의 칙령이 취소되어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로마 교회는 거의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표현되었으며, 그로 인한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 독자들과 그리고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서로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여러 가지 말로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말씀들과 권면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평과 하나됨의 문제 또한 로마서를 바울이 저술한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2. 로마서를 받은 이들이 누구인가?

 

이러한 배경속에서 로마교회는 시작이 되었고,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 안에 어느새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본문이 로마교회안에 강한 자들과 약한자들의 문제를 다룬 것이면,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그룹이라 할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우리는 물을수 있다. 연약한 자들은 대부분 유대적 그리스도인이라 할수 있다. 이들은 음식과 날자에 대한 유대적 규정들을 양심적으로 꼼꼼하게 지키는 자들이라는 학설이 가장 적절하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에 대한 유대인들이 지켜야할 음식법들을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절기도 꼼꼼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권성수 목사는 그의 주석에서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어떤 자들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본문에 나오는 약한자들은 아예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자들이므로 구약 율법보다 더 나가는 자들인 것 같다. 권성수 목사는 이렇게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부 다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 있어서 약한자들 이라고 바울은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자기를 강한자로 표현을 한다. 그러므로 약한 자들은 구약의 음식법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들에 있어서 믿음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강한 자들은 복음의 은총의 본질과 범위를 더 잘 이해함으로써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특별히 날을 지키는 문제 등에 있어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중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로마교회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계속 생겨나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이러한 갈등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중한 지체들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남아 있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을 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스도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소중한 권면의 글을 써서 보냈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법을 지키는 것이나, 그리고 절기를 지키는 문제들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으로 대표될 만큼 중요한 표시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바로 잡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 본문연구

 

1.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이 무엇인지 알때에 화평할 수 있다(14:1-8).

 

음식을 먹거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이 무엇인지 그 중요함을 알때에 성도간의 화평을 추구할수 있다(로마서14:1-8). 바울은 1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연약한자를 업신 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연약한 자들을 받으셨기때문이다. 여기서 받았다는 단어는 προσελαβετο” (프로스람베토) 인데 이 단어는 받아들이다또는 취하다”, “사용하다”, “용납하다등의 용도로 사용할수 있는 단어이다. 3절에 판단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비판적 분석이나 진단의 수준이 아니라, 정죄의 의도로 심판하듯 말하거나 행동하는 일련의 태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점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모든 것을 결정짓는 위치로 올려 놓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5절에서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확정할지니라라고 했는데 이단어는 πληροφορεισθω로서 완전히 수행하다”, 또는 완전히 확정하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음식을 먹거나 절기를 지키는 따위의 것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요소즉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가 알수 있다. 사실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 할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각 개인에게 알아서 선택할수 있는 문제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계속해서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먹는 자나, 먹지 아니하는 자, 모두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변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통해서 권면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수 있다. 본질과 비 본질을 구별할수 있는 능력은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할수 있을 것이다.

 

2. 우리 존재가 누구인지 알때에 화목을 이룰수 있다(14:10-13).

 

바울은 계속해서 10절부터 13절의 내용을 가지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데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때에 형제를 용납하고, 화목할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 같다.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 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형제, 자매들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그 모든 허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심판대로 번역된 해당 헬라어는 공중집회에서 연설용으로 높이 세운 연단이나 재판을 위해 심판관이 앉는 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후자를 가리킨다. 11절의 내용은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자가 심판대 앞에 서서, 그 권위에 복종하고 심판받을 자로서 오히려 심판을 행한 그 과오를 인정하면서, 그 내용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울은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러하듯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을 늘 항상 기억하고 우리가 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누구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실수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는 원리라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거나, 잊어버릴때에 우리는 실수하게 되고, 또한 형제, 자매들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줄만한 행동을 할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존재 자체가 아직은 부족한 면들이 많이 남아 있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할때에, 세상에 지탄의 대상이 될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거듭나고, 예수로 인하여서 새 생명을 입은 놀라운 존재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를 망각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아프게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그런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물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과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 개인의 삶 전체를 놓고서 보고해야 하는, 그리고 평가받아야 하는 그러한 순간이 있음을 성도가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겸비한 태도를 품을때에 우리는 비로소 경건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아니하고 주님을 섬길수 있을 것이다.

 

3. 믿음과 선한 지식이 있을때에 화평을 추구할수 있다(14:14-23).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과 선한 지식이 있을때에 화평을 추구할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또한 날과 절기를 지키는 보수적인 소수를 동정하며,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지식과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품을수 있는 마음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15절에 바울은 음식으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면 사랑으로 행치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약한 자들이 상처를 받거나, 그로 인하여서 실족하게 된다면,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행동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할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을 행할때에 사랑이 그 행함의 동기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할때에 모든 것들이 탈이 없어 질것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한 자들은 각각의 형제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남용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대의에 의해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15절에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조금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먹을수 있는 형제들에게, 또한 선한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다고 여겨지는 형제들에게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아야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부탁을 하는 것처럼, 그로 하여금 억지로 어떤일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과 자발적인 태도와 그리스도를 향한 좋은 마음으로 연약한 형제를 섬겨야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바울의 권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믿음이 있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먼저 관용으로 다가서야 하는지? 그들이 알아들을수 있는 쉬운 언어로 권면하고 있다. 바울의 권면을 귀기울여서 들을수 있는 이들이라고 한다면, 결코 그의 권면을 피해갈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강력하게 정곡을 찌르면서, 소중한 원리로 권면하고 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안에 들어와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을 하는데, 물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성숙한 이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음식법이나 절기등에서 자유를 누리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성숙한 이들이라고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선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바울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이들이 먼저 연약한 이들을 섬겨야 하고, 그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 부분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섬김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권면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수 있다.

 

4.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더욱 주도적으로 먼저 화평을 실천해야 한다(15:1-13).

 

지식을 가지고 있는것과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대로 실천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라고 할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가지고 사랑으로 실천을 하는 것이다. 지식도 물론 매우 중요하다고 할수 있다. 지식도 중요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수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로마서 151절에서 주장하기를 강한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몸을 이루고 한 목소리로 찬양해야할 공동 운명체 속의 지체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15:3절에 먼저 본을 보이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누구보다 강하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3절에 강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하면서, 그 무엇보다 강하신 자가 먼저 우리를 섬겨 주셨기 때문에, 그 이유로 인하여서 우리 역시도 연약한자의 약점을 감당할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해서 바울은 157절에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가장 강하신 자이셨던 그리스도께서연약하고 소망이 없었던 우리를 먼저 섬기신 것을 바울은 강조를 한다. 그리고 강한자가 먼저 연약한자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섬겨야할 정당성을 그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숙한 사람이 먼저 화평을 실천해야 한다는 원리, 성숙한 자들이 먼저 섬겨주어야 한다는 원리는 사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동안에 통용되는 원리라고 말할수 있다. 또한 일반적인 자연법칙 안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 원리라고도 할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먼저 사랑과 인내로서 오랜 세월동안 그들을 향한 비전을 가지고 사랑으로 섬겨준다. 그러한 섬김과 사랑으로 자녀들은 오랜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격으면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을 갖춘 건강한 사람으로 사회에 배출되어진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이고, 또한 법칙이다. 학교에서도 선생된 자들이 부족하고, 어린 학생들을 사랑으로 또한 긍휼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그러한 교육으로 인하여서 학교에서도 건강한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사회인이 배출이 되어진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먼저 된 이들이 후배들과 배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원리를 나누어 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사실은 사회와 가정과 모든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자연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원리를 성숙한 이들이 먼저 섬겨야 하는 원리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원리가 바울이 로마 교회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나타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계속해서 9절 이하에 보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인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은 서로 받아야 할 존재들이며(15:7), 또한 함께 마음을 합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세워 나가야할 그런 지체들이다.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다면, 성숙한 이들이 먼저 다가서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서, 성도들로 하여금 행하지 않을수 없도록,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고, 왜 하나가 되고, 왜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일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에 강력한 소원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의 이러한 메시지를 듣고서 그냥 있을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아 보았을 것이며, 자신의 형제 사랑에서 민감하게 행하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바울은 일관성 있게 성숙한 자강한자가 먼저 섬겨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 로마서안에서 화평에 대한 권면과 신약 성경 다른 본문들과의 차이점.

 

1)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비교.

 

로마서와 고린도전서8:1-13;10:14-33 모두에서, 사도바울은 교회, 물론 신자들 개개인들도 포함된다. 연약한 자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일상생활에 끼치는 의미를 모르고 있거나, 모르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을 존경과 온유함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은 우상들에게 드려졌던 식물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고전10:20,28).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이러한 진술이 특별히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묵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로마서 14:5에는 특별한 날들을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고린도전서에는 이 항목이 빠져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견되어 진다.

 

2)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비교.

 

사도바울이 이곳에서 로마서14:1-15:13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갈라디아서4:10,1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안식일, 새 달의 날들, 유대적 주기에 속해 있는 절기, 안식년이나 희년, 신년에 대한 언급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절기나, 날들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과 이러한 것들이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 아니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말하자면 혐오감으로 그의 머리를 흔들고 있다. 그는 이렇게 까지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4:11).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14:5절에서 간단하게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표현하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의 문체는 비판적이었고, 또한 공격적이었다면, 로마서에서는 그러한 모습들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유순한 태도로 말할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 교회안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고 있었던, 날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들이 구원을 얻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3) 로마서와 골로새서 비교.

 

2:16,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서에서도 역시 바울은 그의 서신을 받는 이들을 날카롭게 꾸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바울이 강한 비판을 했던 이유는 이러한 행위들이 그들의 구원과 관련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태도와 동일한 주제 같지만, 다른 서신들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던 것은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은 그들의 먹고 마시는 것, 또는 그것들을 금하는 것, 그리고 어떤 특별한 날들을 준수하는 것에 구원의 중대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로마서와 다른 서신과의 차이점에 대한 결론.

 

그러므로 로마서와 다른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는 차이점은 바울이 서신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느냐? 하는 것에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할수 있다. 성도들의 믿음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였느냐? 하는 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일수 있다. 그리고 날과 절기를 지키는 이들이 진실된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느냐? 하는 문제 역시도 바울이 날카롭게 비판을 하느냐? 유순하게 반응을 했느냐? 하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 이유였기도 했다고 보여진다. 바울은 성도들의 신앙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수 있다고 판단되었다면, 그는 날카롭게 그들을 책망을 하였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이 되었을때에는 유순한 태도로 그들이 왜 화목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성도들을 권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라 할수 있다.

 

.결론.

 

이제 이 짧은글을 끝맺으려고 한다. 서두에서도 필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화평과 하나됨의 문제는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일수도 있다. 또한 바울 당시의 로마교회안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때가 많이 있다. 교회와 사회, 우리 이웃들간의 문제일수 있고, 또한 지역과 국가간에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서 늘 항상 발견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문제는 발생되어질 것이다. 이런 문제는 아마도 줄어들지 않을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 앞에서 세상은 세상이기 때문에 화평과 하나됨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어긋난 기대일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교회안에서 발생된 문제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때로는 중요하게 이 문제를 다루었던 것처럼 교회가 이 문제를 성경적인 원리로서 다루어 줄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화평과 하나됨을 깨뜨리는 문제가 그들의 구원과 연결이 되거나 믿음을 지키는 문제와 연결이 된다고 생각이 되었을때에는 바울은 그 문제를 아주 엄격하게 다루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위를 사용하여서 책망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원리에서 빠져나오기를 권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판단하기에 로마교회안에서 발생되어진 그런 문제처럼 그것이 복음을 깨뜨리지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판단이 되었을때에는 바울은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리고 각 개인이 그 문제를 판단할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바울은 로마서14:1-23, 15:1-13절의 본문을 통하여서 성도들의 화평에 관한, 그리고 하나됨에 대한 권면으로서 여러 가지 권면을 하고 있었지만, 필자가 발견한 원리를 요약하자면 4가지 원리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필자는 로마서14:1-8절을 중심으로 주변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이 무엇인지 알때에 화평과 하나됨을 추구할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음식을 먹거나 절기를 지키는 것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일뿐 본질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둘째, 필자는 로마서14:10-13절을 근거로 우리 존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 때에 화평과 하나됨을 추구할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 앞에 서야할 그런 존재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존재를 우리가 잊지 않을때에 우리는 더욱더 겸비한 삶을 살수 있을뿐 아니라, 소모적인 삶을 줄이고 더욱더 소중한 것에 헌신하는 삶을 살며, 또한 지혜로운 삶을 추구할수 있을 것이다.

 

셋째, 로마서14:14-23절 말씀을 바탕으로 믿음과 선한 지식이 있을 때에 화평과 하나됨 역시 성도들이 실천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넷째, 로마서15:1-13절을 중심으로 해서 필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주도적으로 화평과 하나됨을 먼저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다섯째, 로마서 본문과 신약의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에 비슷한 본문이 나타나고 있는데 로마서와 비교해서의 차이점이 있다. 바울은 본질적인 문제이냐 부차적인 문제이냐에 따라서 다른 서신들에서는 바울이 심각하게 성도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급하게 그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서 안에서는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은 온유하고 부드럽게 그 문제를 각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평과 하나됨의 문제를 오늘날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비본질적인 것들을 정통의 시금석과 교제의 조건으로 만들어도 안되고 본질적인 것들을 문화적인 비본질의 문제로 주변화해도 안된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분별해 내기가 쉽지 않은 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와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서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앞에서 우리가 크게 다루었던 4가지 원리에 집중할때에 우리 역시도 가장 중요한 본질을 깨뜨리지 아니하며, 또한 주변적인 것들로 인하여서 소중한 것들을 밀어내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성령에 민감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땅에 살아가도록 하신 목적을 이룰수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야할 것이다. 화평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원리는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원리이자, 포기하지 말아야할 원리로 우리 가운데 남아 있다 할수 있을 것이다.

 

 

 

  출처:지명교회 까페 

 

 

 

 

 

 

 

 

 

 

 

 

 

 

 

 

 

 

 


출처 :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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